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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를 만나다(2)
leesangmook

 

(지난 호에 이어)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선물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다.


이건 불교의 ‘방하착(放下着)’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라마교에 대해서 아는 바 없지만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의 그 가르침 말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도 몇 달이 지났다. 밤 11시가 지나 성경을 읽고 막 자리에 누울 찰나였다. 지붕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스코필드는 숨을 죽이고 방구석으로 이동했다. 곧 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뿌리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몸을 묶었다. 하지만 결심은 순간적이었다. 괴한의 거동을 살피려고 즉시 창문 밑으로 이동했다. 호랑이처럼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한국에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사건의 진행은 찰나의 연속이었다. 창문을 넘어온 괴한은 발 디딜 곳을 더듬거렸다. 스코필드는 순간 몸을 굽혀 그의 어깨를 내밀었다. 어깨를 밟고 내려온 괴한의 칼이 그의 목에 닿았다. “보아 하니 한국 사람이군요. 나는 한국 사람을 사랑합니다. 꼭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 이유에 따라 드릴 수도 있으니 온 이유를 말해 보세요.” 


 이 말에 일본 단도를 떨어뜨린 괴한은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었다. “총독이 준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 하마터면 일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 말 않고 그날부터 그를 자기 집에 있게 했다. 타이핑을 가르치고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게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만행들을 취재하는 스코필드는 눈에 가시였다. 총독부는 극비리에 처치하라는 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1916년 세브란스의대 세균학교수로 내한했던 스코필드는 4년 임기가 끝나자 토론토로 돌아온다. 그가 세 번째 한국을 찾은 것은 1958년 8월14일, 광복 13주년과 정부수립 10주년에 국빈으로 초청받아서였다.


 국가적인 행사가 끝난 후 9월 초 민간 주도의 환영행사가 있었다. 여기선 부득이 존함을 밝힐 수밖에 없다.

이화여고 교정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신봉조 교장이 편의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40여 년 전 일본 단도를 들고 침입했던 자객도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장이 돼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은 스코필드가 바라던 한국이 아니었다. 전쟁은 한국사회를 더 비틀어 놓았다. 비리가 도덕을 따돌리고 있었다.


 8월 26일 그는 옛날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찾기 위해 대구행 3등 객차에 몸을 실었다. 국빈용 2등 우대권은 사양했다. “스코필드 박사이시지요? 신문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은 헌병대위 복장이었다. 


 그 역시 대구에서 내린다며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공손히 말하는 거였다. 플랫폼까지 마중을 나온 지인들은 2등 객차인 줄 알았다가 허탕을 쳤다. 다리를 저는 스코필드는 지팡이를 짚고 헌병대위 뒤를 따랐다. 


 잠복해 있던 소아마비가 그의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한 건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그는 스코필드의 손가방을 들고 사람들의 무리를 헤쳐 나갔다. 장로교 선교회 본부까지 동행한 헌병대위는 택시에서 내리면서 “사무실에 들어가 박사님께서 오셨다고 말씀 드릴게요.”한 다음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가방과 함께 사라진 거였다. 그 속에는 여권과 카메라, 3.1운동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대구 감옥에서 찍은 것들도 있어서 보여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었다. 


 스코필드가 한국에 다시 초청된 것은 1969년. 3.1운동 50주년 기념식에서였다. 80세의 고령은 여행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그는 LA 주재 한국영사관을 찾아갔다. 사고가 있을 경우 시신을 화장한 다음 유골을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한 거였다.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한국에서의 어떤 실망과 좌절도 넘어서는 것이었을까. 그 성분 중에는 ‘용서’라는 단어도 섞여 있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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