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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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
kimbokyung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지난 호에 이어)
 그리고 특히 아담/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과, 여자인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과 둘이 아니며, 남자와 여자도 둘이 아니며, 일과 쉼까지도 둘이 아님, 즉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이 어떤 것도 어떤 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총체적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숨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책임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법에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이름을 지어주며 다스리게 하신 것이란 점에서 보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완성하도록 하는 책임이 맡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창세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창조주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그 육체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게 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어떤 경로를 통해 만들어 주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만들어 주신 적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주의 뜻과 법에 어긋나는, 인간 나름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경험하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금하였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한 이유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금하셨던가? 하나님은 인간이 단지 노예처럼 자신의 명령 하에서만 움직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인간을 시험하거나 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과학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과 같이(예로, 아인슈타인),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과의 총체적 관계에서 생존하며 번성하도록 미리 설계되어 있는 것이므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본래의 지혜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인간의 본심이라고 믿는 마음은 본심이 아니라 개인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것들이 쌓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전 행동을 통해 학습한 탐욕과 분노 그리고 무지로 오염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없게 만드는 훼방꾼이 된다.


 선악과는 아담과 이브에게만 금지되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도 우리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도록 명령하시면서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선악과는 지금도 우리에 눈에는 먹음직스럽게도 보이고 먹으면 지혜롭게 할 것만 같아서 계속 따먹으면서 자식들에게도 권하고, 이웃에게도 권한다. 그 결과, 우리의 눈은 환하게 열리는 것 같고 더 밝아지는 것과 같이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자신을 부끄러움으로 “회칠한 무덤”이 되게 하고 탐욕과 불안으로 인간 사회를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만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에는 선악이란 관념이 개입될 수 없다. 선악이란 관념이 본래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한 본심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지혜와 기능이 방해를 받게 되고 또한 본래 둘이 아닌 세계가 둘로 보이게 됨으로써 사랑대신 미움이 생기게 되고 믿음 대신 의심이 생기게 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밝아졌다는 그 눈이 우리가 지금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말이나 문자에 그대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선악이라는 관념, 미추라는 관념, 자타라는 관념, 내외라는 관념, 귀천이라는 관념, 상하라는 관념 없이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글로 쓰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도 아담의 망심에 속하는 인간의 말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낙원을 잃게 한 바로 그 어리석은 마음 그대로를 가지고 우린 성서를 읽고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이후에 동침하여 낳은 카인은 하나님이 자기가 올린 제사는 받지 않고, 동생인 아벨이 올린 제사만을 받았다고 하여 아벨을 남몰래 들에서 죽이고 이를 이웃이 알까봐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의 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는 카인의 죄를 되풀이 하면서 카인과 같은 방랑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 카인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하고자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가 우리의 몸과 같은 유기체의 나라임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금지된 선악과’로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눈으로 보면 실제로는 자기가 한 몸에 붙어 있는 귀나 발이면서도 자신이 전체와 분리된 것으로 보여 선악이나 성범이나 귀천으로 분별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어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눈, 본심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은 한 몸에 붙은 지체로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면서도 서로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처럼 모두가 생각과 판단을 넘어 선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 된다. 


 성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악을 진정 이기는 방법은 어린아이처럼 선이나 악이라는 관념까지도 사라졌을 때만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런 것이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지체들 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있을 수도 없고 자타나 내외라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관념도 없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 모두가 용서라는 관념이 없이 용서의 대상이 된다. 


 성도란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동일한 성령을 숨 쉬는 것으로 동체가 된다. 성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아담의 본질, 인간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 아들의 특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선악이란 관념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생긴 마음으로, 그것 자체가 낙원을 잃게 하는 조건이다. 


 꽃은 꿀을 만들어 벌과 나비가 먹게 하고, 벌과 나비는 화분을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씨를 맺게 한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와 그 안에 있을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 밤과 낮, 여름과 겨울, 물과 물속의 고기떼, 하늘과 공중의 새들, 암컷과 수컷, 아담과 이브 등 모든 것은 상하좌우, ‘대칭(對稱)’을 이루고 ‘대법(對法)’을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대칭’ 또는 ‘대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임의로 붙인 명칭이며 관념일 뿐 실은 두 가지가 실에 있어서 서로 분리될 수는 없다. 모두가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다. 낮이 없다면, 밤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진실로 선으로 악을 이겼다면 그에게는 선이나 악이라는 양변(兩邊) 또는 관념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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