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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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추(老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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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난 삼순이와 럭키를 보는 마음이 펄벅 여사가 쓴 ‘대지’에서 왕룽이가 기생 연화를 사랑할 때 본 부인이 지금 삼순이 마음이나 모습일 것이요, 젊은 여자에게 향하는 마음이 지금 내가 럭키에게 느끼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지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본 부인이, 남편이 기생 연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의 못난 입술 때문이라고 자신의 입을 쥐어뜯는 대목이 나온다. 


 난 그 대목을 보면서 왕룽이가 본 부인이 못났기 때문이 아니고 아무리 절세미인 양귀비 같은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해도 나이가 들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여긴다. 아무리 잘난 미인이라 해도 나이가 든 사람과 적당히 예쁘긴 해도 젊다면 그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보고 싶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이나 느낌을 접어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시대가 많이 변하기도 해서 이젠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가슴에 담고 묻어두기 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서슴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도 오래 가지를 않기 때문이다. 


 지는 꽃과 피는 꽃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우리가 결혼을 해서 딸을 둘 낳고 어렵사리 대리점을 하게 될 때였다. 그 즈음 마침 캐나다에서 사시던 어머님께서 서울에 나와 계실 때였다. 그런데 남편이 대리점을 하게 되면서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친척 조카 애를 데리고 왔다.


 그 조카 애는 작은 아버님 큰 아들 맏딸이었는데, 시골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침 남편이 사업을 하게 되며 경리도 필요하니 그 애가 와서 남편과 나를 도와주며 점차 서울에서 자리잡고 시집을 갈 수 있었으면 했던가 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조카 애는 인물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건강한 몸매에 긴 생머리가 유난히 돋보였다. 얼마 지나는 동안 이건 아니다 싶어 고심하던 끝에 나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그 아이를 도로 시골로 내려 보내기로. 


 며칠 지나는 사이 가만히 보니, 그 아이가 남편과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오히려 내가 그 아이 시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그 아이와 남편이 아침에 같이 출근을 해서 밤이 되어서야 들어오게 되니 시간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편과 그 아이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난 그 동안 밥을 해서 남편과 그 아이에게 차려 주고, 옆에서 앉아 있기도 뭣해서 난 아이를 업고 밖을 서성이게 되었다. 


 그때가 마침 겨울이어서 밖에서 떨다가 온 사람들에게 아랫목에 깔았던 이불까지 걷어주며 따뜻한 자리를 내주고 밥상까지 갖다 바치고는, 추운 겨울 아이를 업고 밖을 서성이던 난, 내 꼴이 무엇인가 싶어 스스로 초라한 생각이 들었다. 


 난 결혼을 해서 집에만 묻혀 있으면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 보니 이미 시어가는 파김치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그 아이는 이제 파릇파릇 솟아나는 풀잎 같은 생각이 들곤 하니 나 자신이 더 비감한 생각만 들었다. 아마 지금 기억으로는 한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 아이는 시골로 그냥 내려가야 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오고 며칠 지나는 사이 가만히 보니 난 이미 지는 꽃이요, 시들해지며 생기를 잃어간다 싶었으니, 나 자신이 초라한 생각만 들어 첫째는 그것이 견디기 어려웠고, 둘째는 아침에 남편과 같이 출근을 했다가 저녁에 같이 들어오는 그 아이가 나를 도와 줄 일은 없고, 오히려 내가 그 아이 시중을 들어야 하니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에게 캐나다에 들어가시기 전에 그 아이를 시골로 내려 보내도록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방을 세를 줘야 하겠기에 방이 여유가 없어 안 되겠다고 시골로 전화를 하시게 되었다. 그 아이는 졸업식에 참석을 한다고 내려가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는 올라오지를 않았다. 


 그 이후 남편은 또 가게에서 일할 사람을 시골에서 데려 오겠다고 하기에 내가 완강하게 거절을 했다. 시골에서 누가 오면 내가 집에서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난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서울에서 출퇴근 할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그래서 그 후로 더 이상은 그런 일로 해서 군식구를 내게 붙이는 일은 없었다. 


 주변에서 남자들이 데리고 있던 여직원, 경리나 비서를 좋아하게 되거나 바람이 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기도 한다. 그렇게 잠시 바람으로 끝이나고 마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본처와 헤어지고 새로 눈이 맞은 여자를 안주인으로 맞아들이는 경우도 더러는 있다. 


 남편이 평소에 하던 말대로라면 경리 애가 인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 지론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가정이 이만큼이라도 유지되어 오기 위한 운명이었는지 대리점을 하게 되면서 두 번째로 오게 된 경리 미스 리가 만 10년은 되었다. 미스 리의 인물은 여자다움은 별로 없었지만 정직하고 성실했기에 대리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미스 리의 공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남편과 미스 리의 감정이야 그들만의 것이었을 것이지만, 주변에서 둘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을 듣기도 하였으나 난 그런 사적인 감정까지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내가 나서서 좌지우지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는 내가 옆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경우지만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 몇 번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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