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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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히 가버린 남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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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의 남동생, 우리 집의 장남이 췌장암이란다. 그 소식을 올케와 문자로 주고받으면서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요즈음은 암 판정을 받고도 치료를 잘 하면 완치가 되기도,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어 그런 행운이라도 오려나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하였다. 


 가끔은 TV를 통해 보곤 하는 암 판정을 받은 이후 시골, 산골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실제로 오로지 건강만을 위해 올인하다 보니 암이 완치되었다기도 하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그들의 생활하는 모습을 TV화면을 통해서 보며, 그들은 커다란 행운이네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선 나부터도 나나 남편이 그런 ‘몹쓸 병’에 걸렸다 해도 생업을 뒤로 하고 병 치료에만 몰두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나 친지들한테 이제 일 좀 놓고 쉬라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여행도 다니라고 한다. 난 그때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못하나. 그리고 그럴 형편을 만들어 갈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민을 오기 전부터 형편이 좀 낫다는 나나 남편이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다 해도 내 건강만을 위해서 살 형편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남동생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 식구들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그나마도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다녔을 텐데 내 몸 돌아 볼 경황이 어디 있었을까. 


 췌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그동안 전조증상은 없었더냐고 안타깝고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랬더니 등이 좀 아프기는 했어도 병원에 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췌장암은 전조증상이 거의 없어 대부분 그 환자들이 병원을 찾았을 때는 말기에 발견이 된다하니 그야말로 걸려도 회복 불가능한 병에 걸린 것이었다. 


 나였어도 감당하지 못했을 텐데, 시골로 내려가서 전적으로 치료에만 몰두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은 그리 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뭘 어찌 할 수 있었겠나 싶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일은 좀 쉬면서 큰사위가 자주 모시고 나간다고 해서 얼마나 고마워 했는지 모른다. 


 큰사위가 장인 장모 우리 엄마까지 모시고 나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모쪼록 살아 있는 날 식구들과의 좋은 추억이라도 가슴에 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다. 


 암이란 것을 알고 병원치료를 꾸준하게 받으면서 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으면 환자의 기분이 좀 편해지는가 싶다가도, 상태가 나빠지면 두려워 몸을 떨기도 하고, 연로하신 엄마 걱정에 더더욱 안타까워 하다가 엄마와 같이 울었다고 한다. 


 난 그런 문자를 올케와 주고받다가, 드디어 임종이 며칠 남지 않았다며, 의사가 볼 사람들은 다 보라고 했다는 문자를 받은 이후로는 카톡을 열기도 겁이 났다. 며칠 문자가 없으면 그 사이 장례라도 치르느라 아무 소식이 없나 궁금했는데 막내 남동생한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새벽에 갔음’ 그렇게 허망하게 가는구나 싶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올케한테 위로하는 마음을 문자로만 보내 놓고 그 사이 보내온 사진들을 살펴보니, 동생 생일 날 식구들이 같이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린 같이 밖에서 외식도 한 번 하지 못했었네 싶으니 가슴 싸하니 그리움이 되어 밀려온다. 


 한국에서 살았다 해도 자주 보지도 못했겠지만, 이렇게 멀리 떠나 와서 살았으니 그나마 작년에 서울 나갔을 때 얼굴이라도 보지 못했다면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만 볼 뻔 했네 싶으니 그야말로 형제라 해도 가까운 이웃만도 하지 못하네 싶은 생각에 참으로 울적해진다. 


 우리 7남매 중에서 셋째 남동생이 제일 먼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언니가 간암으로 떠났다고 했는데 이번엔 또 바로 아래 동생, 우리집 장남이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한 번도 친정 형제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자식을 셋이나 먼저 보내며 오열하실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으니 내겐 다행이기도 했으려나. 


 통원 치료를 받다가 드디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문자를 받고 식구들 사진을 좀 보내 달라고 했다. 사진속의 엄마는 근심어린 표정, 동생은 어두운 표정에 혈색도 좋아 보이지 않은 사진인데 올케와 둘이 나란히 찍은 사진은 흰머리가 참 잘 어울리네 싶은 동생 옆에 환하게 웃고 있는 올케를 보니 그래도 그 순간 남편이 옆에 있어줘서 참 고맙기도 하고, 딸이 사진을 찍으며 엄마 아빠 웃으라고 부추겼네, 그런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알고 있는 동생은 아직도 내 뇌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남동생은 어디로 갔을까. 다시는 볼 수 없네 싶으니 가슴엔 설렁설렁한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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