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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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서 부침(浮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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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가운데 질병과의 싸움, 어찌 보면 생계 이상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닐까 한다. 결과적으로 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없지만,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몸에 병이 들면 그 다음엔 아무리 살고 싶어 몸부림을 쳐도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으니 삶에서 건강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기에 몸에 이상이 있다든지 다른 징후가 나타나면 그래서 더더욱 겁이 난다.  


내 나이 사십 대 초반에 이민을 왔는데 질병으로 인해 병원을 찾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민생활 이후로는 의료비에 대한 부담도, 가정의가 정기적으로 검진 받는 날짜를 알려주어 한국보다는 수월하게 병원을 찾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기검진이라면 좀 불안하기는 해도 괜찮겠지 하는 스스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하니 심적으로 그렇게 짓눌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며 검진날짜를 알려 오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기분이기도 하다. 갖가지 상상에 짓눌려 병원에 가기도 전에 초주검이 되기도 한다. 


지금 기억으로는 유방, 위, 자궁암까지 검사를 한 번 더 해보는 게 낫겠다고 했다. 그런 통보를 받고 난 후로는, 만의 하나 죽을병에 걸린 거면 어쩌지 검사도 받기 전에 수렁으로 한없이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밥맛도 없고 잠도 편안하게 잘 수 없어 몸 안의 세포들이 풀이 죽어 시들시들한 그런 모습인 것 같았다. 


위 전문의는 내 그런 의중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많이 힘드셨죠?” 하며 진찰을 했다. 위 검사 결과는 무슨 약인가 처방을 받아 약 정도 먹고 치료가 되는가 싶어 내심 안도가 되었다. 


그렇게 저렇게 몇 가지 몇 번씩 검사를 하며 내 나이 60을 넘기면서는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내 나이쯤 되고 보니 중병에 걸렸다 해도 그럭저럭 치료 받다 보면 얼추 70까지는 살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니 그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다 해도 아주 억울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엄지손가락 뼈마디가 약간 돌출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신경이 곤두섰다. 첫째 이유는 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우유도 먹지 않고 게다가 칼슘제품 약이나 골다공증 약도 먹지를 않고 있으니 그래서 더더욱 겁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당장 병원에 가야지 다짐하고도 매일매일의 일상에 떠밀려 밤새도록 하던 마음고생도 하루 이틀 기다려봐야지 하고 뒤로 미루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 주 지났는가 싶은데, 더는 지체할 수 없었음은 실제 손가락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끝간 데 없이 추락하고 있어 그것이 더 견디기 힘이 들어 열일 제쳐놓고 가정의를 찾아갔다. 


내가 증세를 얘기하니 걸레를 많이 짰느냐고 손을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했다. 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일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싶었으니 의사 말이 ‘맞을까?’ 약간의 의구심도 일었지만, 그 진찰결과를 그대로 믿고 싶었다. 만약 오진? 이라면 그건 차차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잔뜩 긴장까지 하고 병원을 찾았다가 노후관절염 증세 정도라고 하니 그 사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가뿐하게 털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며 호두과자까지 한 봉지 사 갖고 차에 탔다. 언제 그런 낭떠러지에서 허우적거리기라도 했느냐는 듯 날아갈 듯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즐겨 듣던 CD를 들으며 호두과자를 맛나게 먹으며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남편과 딸한테 걸레를 많이 짜서 그렇다며 노후 관절염 증세라고 한다고 했더니, 그 얘기가 맞느냐며 작은 딸은 혹시나 의사가 오진한 것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병은 조기에 발견만 해도 살 확률은 그만큼 높기에 딸아이의 걱정이 거기 있었음을 안다.


어쨌거나 손을 많이 쓰지 않으면서 나름 관찰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의사의 말대로 손가락 마디가 돌출되었던 부분이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그랬는지 말짱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금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에 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편하게 지냈는데 이게 무슨 증세인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가게에서 불이 꺼진 창고를 들어서는데 한쪽 눈에서 빨간 불빛이, 번개가 쳤나 싶게 지나갔다.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역시 빨간 불빛이 눈가를 스쳤다. 이게 뭐지 밖에서 레이저가 돌아가나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날 가게문을 닫고 운전을 하는 중에도 눈에서 빨간 불빛이 몇 번씩 스쳐 지나갔다. 무슨 불빛일까 걱정스러우면서 신경이 쓰였다. 집에 도착해서 창가에 서서 다시 밖을 봤다. 그런데 이번에도 빨간 불이 번쩍번쩍했다. 그 다음날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며 어디서 레이저 광선이 비쳤던 게 아닐까 했더니, 아니라며 전문의한테 가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다음 날 바로 안과를 가라고 했다. 


안과에 가기 하루 이틀 사이 벌써부터 눈에 또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어설피 TV에서 본 골다공증이나 당뇨로 인한 합병증의 증세들이 떠올라 다시 또 마음은 한없이 밑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또 눈이니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차츰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면 어쩌지,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더는 그런 악몽에 시달리기 싫어 그 다음 날 안과엘 갔다. 검안 의사한테 자세하게 그 동안의 증세에 관해 얘기를 하고 검사를 받았다. 


검안의 얘기는 ‘노안증세’이며 아직은 괜찮으니 상태가 더 나빠지면 병원엘 가면 된다고 했다. 일단은 노안증세라니 안심은 되었지만, 지난번에 가정의가 혈당 수치가 좀 높게 나왔다며 혈당검사를 하라고 했던 말에 차제에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 그 다음날 바로 가서 검사까지 끝내고 왔다. 


이번에도 역시 편하게 기다리자 했지만 불안하고 신경이 쓰였다. 1주일, 2주일 병원에서 전화가 오지 않으면 별 이상이 없는 것이요, 전화가 오면 다시 또 의사의 지시대로 따라야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없는 걸 보니 혈당수치도 정상으로 나왔는가 보다. 


게을러서 운동도 못하고 영양제 조차도 챙겨먹지 못하는 주제이니 평소보다 다른 증세가 보이면 더럭 겁부터 난다. 이젠 하나씩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이렇게 늙어 가는가, 마음을 다지고 마음의 준비까지 해야 한다. 


아마도 산다는 건, 나도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렇게 늙어가면서 한 가지씩 망가지고 노쇠해져 그러다가 더 이상 신체를 쓸 수가 없어지면서 세상과 하직을 해야 하는가, 정말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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