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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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남자(7.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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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다음날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여자가 그 나이 먹도록 어찌 그렇게 한심하냐고 하며 아침에 가방을 찾으러 가니 숙박은 하지 않았어도 그 가방 때문에 다른 손님을 받지 못했으니 숙박료를 내야한다기에 언쟁을 벌였단다. 


 요금의 반만 물겠다고 하니 안 된다고 완강하게 나오기에 구청 위생과에 위생 문제, 숙박인 명부에 기재하지 않은 것 등 고발 조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파출소에서 순찰대원까지 나와 난리 법석을 피웠다며 어째 그런 것까지 그렇게 몰라서 피곤하게 하느냐고 닦달하는 것이었다. 


 잘 몰라서 그랬다고 사과를 하며 우리 부부는 때로는 너무 호흡이 맞지 않고 의견차이가 많아 피곤하구나 싶어 생각하는 것조차 지쳐 그만 덮어버리고 잊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떠 어찌어찌 하루해는 보낸다 해도 저녁이면 갈 곳이 없어 배회를 해야 하니 50이 넘은 중년의 내외가 거리의 미아가 된 셈이었다. 그 후 고시원이라는 곳도 찾아가 보고 어디 월세 방이라도 얻어 볼까 골몰을 하는 내게 조금만 기다려서 몇 천 만원만 더 내고 70평짜리 아파트로 가면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럼 그동안은 어디로 가서 있느냐고 어처구니없어 물으면 그 대답엔 있는 대로 성질을 내니 그때마다 싸움도 되지 않는 언쟁을 하다가 피투성이가 된 싸움닭처럼 지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계획하고 있는 일과 연관이 있는 지방 공장 근처로 내려가 보고는, 시골은 도저히 가지 않을 것이란 평소 소신을 접고 남편이 내가 시골이라도 내려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그럴 것이라며 같이 가자고 했다. 


 시골에 내려가니 생각보다는 원룸이라고 하는 것도 꽤 넓고 싱크대며 온수까지 쓸 수 있는 욕실도 제법 쓸만했다. 우린 그 다음날로 동생의 봉고차를 빌려 시골로 내려갔다. 


 거의 9개월 가까이 있는 동안 짐도 제법 늘어 봉고 차에 가득 싣고도 남았다. 그렇게 해서 시골까지 내려가서 우리 숙소라고 정하고 나니 서러움보다는 우선은 남편 밥이라도 해줄 수 있으려니 싶으니 마음이 안정이 되는 듯 했다. 


 거처는 시골로 정했다지만 대부분 볼일은 서울에 가서 봐야하기에 어떤 때는 1주일에 2, 3번은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다. 한번 오가는데 기름값,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합하면 5, 6만원은 들어야했다. 게다가 당일로 내려오지 못하는 날은 다시 또 서울에서 숙박료를 별도로 지출해야 했다. 


 그 즈음 남편은 자주 오르내리는 곳 주변에 휴게텔이라고 하는 숙박료 1만2천원한다는 곳에서 묵고, 이따금 나도 서울을 따라서 올라가면 친구네 가서 신세를 지며 오고가기를 거의 한 달이 되어오고 있었다. 


 신의 가호가 있었네


 남편은 여권 만기일도 가까워 오고해서 캐나다를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정하게 갈 곳도 없이 차를 타고 거리를 헤매었을 남편은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이따금씩 어떻게 지내느냐며 전화를 했다. 워낙 전화는 잘하는 사람인데 일주일 넘게 전화가 없어 궁금했는데 전화가 왔다. 큰 아이와 어디를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닌단다. 그것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난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에서 만취가 되어 운전을 하며 극도의 정서, 정신 불안 증세까지 있었는데 어찌 그 때는 아무 사고 없이 그 시간을 넘기게 되더니, 엉뚱하게 캐나다로 들어가서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가 되어 얼마간의 피해 보상금까지 받게 돼 이건 필시 사람의 힘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지 싶었다. 


 남편과 같이 광란하듯 운전을 할 때 사고가 났더라면 음주 운전이니 당연히 어떤 상황이 되었건 남편이 불리한 입장이었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물론이요 동생까지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때면 경기라도 일으킬 듯 자지러지곤 했었다.


 그런데 서울이 아닌 캐나다에 가서 그런 일이 있었다 싶으니 이젠 숨조차 몰아쉬게 하던 거칠고 사나운 태풍은 잠잠해지고 잔잔한 파도타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그 후 캐나다에 다시 들어와 살면서, 문득문득 그때 서울에서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삶이 있는 것이지 싶어 참으로 감사할 때가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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