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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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남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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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해서 통화를 끝내고 나면 왜 아이들한테 그런 식으로 밖에 얘기를 하지 못하느냐며 전보다 더 심하게 차를 몰다가 지나가는 차가 운전을 못되게 한다며 잘하면 차를 들이박을 듯 하니 그럴 때마다 갖가지 상상을 다하며 앞이 캄캄 아찔아찔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어느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이젠 헤어지는 일만 남은 사람처럼 이별의 노래만을 골라 악을 쓰듯 부르는 노래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울부짖는 그런 처절한 통곡의 노래처럼 들렸다. 나보고도 무슨 노래든 하라며 다그치듯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노래를 할 것이며, 아무 말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점점 더 멍청이가 되어 가는 듯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윙윙 소리만 나는 듯 했다. 


 피를 토하듯 한 시간 넘게 노래를 부르다가, 멀거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들어가서 눕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어 숙박료도 모자라 차에서 웅크리고 몇 시간을 잤다. 자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가 싶었다. 이젠 어디든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이 가는 대로 따라서 가며 눈여겨보니 예전에 아이들과 같이 갔던 설렁탕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설렁탕을 시켜 놓고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기에 무엇 때문에 지금 전화를 하느냐며 밥이나 먹거든 전화를 하라고 하는 얘기는 아랑 곳 않는다. 남편이 작은 딸과 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 보니 그 날이 작은 딸 생일이었다. 잊지 않고 있다가 아이들 생각, 예전에 아파트 살 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이곳으로 온 모양이구나 싶으니 마음은 다시 또 착잡하고 서글프기 이를 데 없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선물을 사서 보내 주겠다며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엄마 옆에 있다며 바꿔 주는데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 사정 얘기를 어찌 할 것이며 그냥 잘 지내고 있다며 울먹이기만 했다. 


 아마도 내겐 ‘너 때문에’란 말로 힐책하며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너 때문에 캐나다까지 갔기에 오늘에 이르렀으며, 내게,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떳떳하고, 넉넉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을 것이다. 


 남편은 일정하게 숙소가 없으니 어떤 옷은 작은 고모네, 양복과 속옷, 양말, 와이셔츠는 차에 싣고 다녔다. 나와 같이 숙소에 든 날은 양말과 와이셔츠를 자기 전에 빨거나 엄마네 집으러 가져가서 빨아 오기도 하였다. 남편은 다리미를 차에 갖고 다니며 바지며 와이셔츠는 말끔히 다려 입고 다녔으니 그런 남편이 측은하기보다는 점점 더 정나미가 떨어졌다.

 

 걸음아, 날 살려라


 난 더 이상 친정 올케 눈치보고 싶지도 않고, 견딜 수 없어 비행기 표를 6월 19일자로 예약을 해 놓았으나 그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다시 공항에 전화를 했다. 마침 5월 27일자에 자리가 하나 있다기에 예약을 해놓고는 남편한테는 일체 비밀에 붙여놓고 있었다. 


 내 그런 상황에서 비행기를 탄다하면 곱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몰래 떠나기로 작정을 하였다. 더 있다가는 나까지 머리가 돌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하루라도 빨리 남편 곁을 떠나고 싶었다.


 떠나기 전날도 남편이 불러내어 밤에 나가 몇 번 갔던 모텔로 가게 되었다. 그 밤을 거기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그만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집에 가 봐야 할 일도 없을 터인데 뭐 하러 일찍 가느냐며 강남에 설렁탕 잘하는 집이 있다면서 그리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난 내심 초조했으나 늦어도 오후 3시까지만 집에 도착해도 공항 터미널까지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안심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도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없고 누구를 만난다며 시내 빌딩 주차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 배도 아프고 변비가 심해져서 집으로 먼저 들어간다는 메모를 차에 남겨 놓고 핸드폰은 차 뒷좌석에 놓고는 꽁지가 빠져라 택시를 잡아타고 엄마네 집에 도착하니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급하게 시장에 들러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사서 짐을 꾸려 도망치듯 공항 터미널로 향하게 되었다. 


 올 데 갈 데 없는 남편, 정서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 좀 이상이 있다 싶은 남편을 그 동안 제대로 잠도, 먹지도 못해 10Kg가까이 빠져 있는 남편,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어 병원비도 내지 못하고 독촉을 받고 있는 남편을 남겨 두고 가야했다. 


 나만 살겠다는 것이었는지, 아이들이라도 내가 살려야겠다는 것이었는지, 남편은 죽든 살든 이젠 내 영역 권에서는 벗어났다는 것인지, 아니, 그런 무능하고, 바보스럽고, 행패나 부리는 남편은 이제 내 남편도 아니요 난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을 해 봤다.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할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여 남편이 귀신처럼 낚아채기라도 할까봐 도망치듯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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