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63 전체: 175,026 )
日露(일로) 전쟁)과 한일 합방
gigo

 


이원용 칼럼
(토론토 동포)

 

1905년 5월27일 오후 1시30분경, 대마도 근처에서 시작된 일본과 러시아 함대의 전투는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만일 그 싸움에서 일본이 졌다면 우리나라의 역사(36년간 일제의 통치)는 또 다른 양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부동항(不凍港)을 원하는 러시아는 이미 만주를 정복, 여순(旅順)에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여 일본군 노기(乃木) 장군이 이끄는 부대에게 막대한 인명 피해(부상자: 4만5712명, 전사자: 1만4500명)를 준 후, 결국 일본군의 인해 전술에 여순은 함락되었고, 러시아 군은 봉천에 제2방어선을 구축, 여순에서 참패당한 것을 설욕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여순에 잠적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도 여순 요새가 무너진 후, 203 고지에서 일본군이 쏜 포탄에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우라지오스톡 항구에 기지를 둔 이 함대는 러시아의 중국, 조선 침략을 위한 위압용 함대였는데 도고(東鄕)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에 전멸당하자 본국에 남아 있던 군함들을 발틱해에 집결시켜 제2 태평양함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지난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도중에 이미 진해, 마산 항구에 대기했던 일본 함대와 대마도 근처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司馬遼太郞씨가 쓴 (坂の上の雲) ‘비탈 길 위의 구름’ 8권, 51 page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이 함대가 진해만을 떠날 때 수뢰정의 한 함장이 “이순신 제독의 영에 빌었다”라는 기록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으나 그것이 어느 자료에 있었는지 쉽게 찾을 수 없다.

 “세계 제1의 해장(海將)“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이순신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해전(海戰)에서 이를 멋지게 쳐부순 조선의 명장이다. 또한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 실제로 행해진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바다의 명장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은 세계 사상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 역사상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오히려 일본인 측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明治)시절 해군이 창설되자 그의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었다.

이 시대, 일본인은 러시아 제국을 동아시아 침략의 야망을 가진 세력으로 보고 동진(東進)해오는 발틱함대를 최대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배 한 척도 남김없이 침몰시키는 것은 동아시아 방위 때문이라고 믿고 동아시아를 위하는 것이기에 과거 아시아가 배출한 유일한 바다의 명장(名將)의 영(靈)에 기도했던 것은 당연한 감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만일, 일러 전쟁 당시 일본이 전쟁에 졌다면, 이미 영국은 인도를, 미국은 필리핀을,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독일은 식민지에 별로 관심이 없어, 한반도는 결국 부동항을 소망하는 러시아의 손아귀에 잡혔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고 보아야 한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 해군 덕분에 (전비(戰費)가 바닥에 떨어져) 명예로운 전쟁 종식을 바라던 일본은 때마침 미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하여금 만주와 한국에서 물러나도록 하고 사할린 섬의 반을 전리품으로 차지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씨 조선이 너무도 약하여) 일본에게 정복당한 것이, 러시아에게 정복당한 것보다 우리민족에게는 결과적으로 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러시아가 바다 싸움에 승리했다면 결국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나라도 러시아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레닌이 주동이 된 공산 혁명으로 무산 몰수, 무산 분배라는 구호 아래 온 나라가 오늘의 북한을 방불케 하는 처참한 꼴이 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주 국방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씨 조선에서는 문관이 무관보다 우위에 서있었고, 국방을 대국(大國)인 당, 명, 청에 의존해왔기 때문에(스스로 국토방위에 대한 관심은 없어…) 영토 확장의 야망을 가진 강대국에게 정복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러시아 군대는 한반도에 남침하여 38선을 경계로 이북 땅에 공산체제의 정부를 세움으로써 오랫동안 꿈꾸어온 부동항 획득에 성공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반쪽에서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시바 씨는 청(淸)에 관한 소설을 쓸 때 아무런 기록이 없어 결국 이씨 조선 왕조실록에 수록된 문헌을 통하여 청나라를 무대로 한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민족을 가리켜 문화민족이라고 칭찬하였다. 역사를 기록하는 민족은 문화민족이요, 아무리 힘이 강해도 역사를 기록 못한 민족은 야만민족이라고 그는 말했다.

 여담이지만, 그가 쓴 소설 서두에 만주족 여인이 아침에 기상 후, 자기 소변을 받아 얼굴을 씻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정착민은 우물을 파서 물을 해결했으나 유목민족은 그렇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고, 어쩌면 이런 풍속도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간 소현세자의 심양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해방된지 78년이 된 지금, 아직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일본의 영토로 삼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독도는 내 땅이라고 연일 선전하고 있다.

다시는 어리석은 조상의 전철을 밟지 말고, 외세의 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