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Yul
노삼열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석좌교수(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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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ced Retreat (9)
SamYul

(지난 호에 이어)

 

나는 강의나 토론 내용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흘려 버렸지만, 다양한 의견 나눔이 좋아서 공부하는 날들이 행복했다. 교수들도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낙제과목 없이 진학하는 것이 우리 부부 기도의 한 주제가 되었다.

여름에 직장을 찾아야 내년을 위해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민 온지 4년이 지나도록 차가 없었는데, 이젠 중고차라도 한대 구입해야만 했다. 나는 차가 없어서 VW의 Beatle를 갖고 있던 김선배의 차에 동승하여 함께 직장 사냥에 나섰다.

첫날 들린 곳이 선반에서 쇠 파이프를 자르는 작업을 하는 곳인데, 잘린 파이프가 여과없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내는 소음수위가 엄청났다. 그런데 선반마다 일하는 직공들이 여자들이었다.

"When is the first break?"

바로 옆 기계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에게 물었다.

"Me no English."

짧고 빠르게 돌아온 답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명쾌한 답이었다. 언어라는 게, 영어라는 게, 참 웃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선배와 나는 도시 남쪽 끝에 있는 조그마한 조립공장을 찾았다. 내부는 깨끗하고 넓으며 밝아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공장장이라는 자는 크지 않은 키지만 그런대로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순진해서 놀려먹기 좋은 그런 친구였다. ITT 회사의 부품들을 받아 조립해 주는 곳이었다. 고속도로의 가로등이 주 품목이었다. 일감이 많지 않아 바쁘지 않았고 모든 조건이 노동직으로는 결핍 없는 곳이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주정부로부터 grant가 나왔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딸려있는 mature students에게 주는 그랜트였다. 2학년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로 $1200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은 내가 1학년을 그런대로 넘겼다는 말이다. 무려 전체 평균 C 학점으로.

그런데 나는 지금도 아내가 애써가며 만든 새우튀김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평생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1967년형 멋쟁이 Mercury Cougar 초록색 스포츠 세단이었다.

우리 부부는 UWO 캠퍼스를 사랑했다. 언제인가 National Geography가 아름다운 캠퍼스로 소개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도서관도 훌륭했고 커뮤니티센터의 시설도 많이 이용해서 3살짜리 아들은 이미 수영 수준이 제법이었다. 어찌됐던지 토론토 공장에서 맞은 막다른 골목에서 새삼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바라던 학교로 돌아왔으니 일단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캠퍼스 생활 재미에 그렇게 깊이 빠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 가정들과의 인연이다. 우선 런던한인교회에서 H형을 만나서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 Y대학의 스승의 막내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 교수님은 소속대학과 전공은 달랐지만 나의 큰 숙부님의 동료였다. 두 분이 모두 유신체제 하에서 강제해직 당하고 김교수는 옥고까지 치렀다.

곧 H의 작은 형 CJ 가정이 UWO 아파트로 입주하여 우리의 이웃이 됐다. 그리고 1년 정도 후 CJ의 처남 T형이 토목공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파트에 입주했다. 이 3 가정보다 먼저 CC 가정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정들과 가까이 지나면서 1 cent 짜리 동전을 걸고 카드놀이(porker)를 했는데, 아내들이 여기에 상당한 재미를 붙이게 됐다. 언제부턴가 토요일이면 의례 모이게 됐다. 테이블 위로 오가는 얘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특히 아내들이 남편과 동등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를 많이 좋아했다.

처음엔 어쩌다 한 가정의 초청에 따라 모였고, 아이들 취침시간이 가까워지면 헤어졌다. 조금씩 빈도가 높아갔고 헤어지는 시간도 늦춰져 자정에 가까워질 때도 있었다. 중간에 막국수 같은 야식도 등장했다. 30세 전후의 식욕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급기야 밤샘하고 아침까지 먹고 헤어지기도 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호스트의 침실에서 부모들의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곤 했다. 아이들 역시 형제처럼 가까워져 목욕도 함께했다. 주말이 기다려지고 한 주간의 삶이 즐거운 중, C 가정도 한두 번 참여해 보더니 곧 더 열정적 멤버가 되어버렸다.

이 모임이 오랜 기간(2년 이상) 왕성하게 계속된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나는 무엇보다 상식을 넘어서지 않는 개인들의 성숙한 인품과 유머로 가득한 담화력에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카드게임은 유머를 건드릴 수 있는 꺼리들을 순간순간 제공했다.

사실 아내의 수입에 전폭 의지해야 했던 우리는 entertainment를 위해 따로 경비를 쓸 여유가 전연 없었다. 다른 세 가정은 조교 수당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상당한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 1전짜리 카드게임은 4-5 달러만 투자하면 주말을 즐길 수 있는 기막힌 entertainment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babysitter 값도 아끼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재미있고 많이 웃고 친구들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멤버들은 하나씩 예정된 기간 안에 학위를 받고 떠났다. 나만은 남아서 학부 공부를 계속했고,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무모한 도전으로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나는 이전과는 전연 다른 마당에서 전연 새로운 이민의 과정을 걷고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념을 얻었다. 일을 벌이고 부딪쳐 보면 가늘어도 빚이 보이고, 도움의 손길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손을 잡고 같이 걷다 보면 어느 새 길의 끝자락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확신이 섰다.

물론 그 자태가 화려하거나 자랑스러운 것이 아닐지라도, 지치고 남루한 모습이라도, 완주의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는 시작 전에 이미 완주에 대한 미세한 의혹도 사라지는 자신감 self-esteem과 mastery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psychological resources는 앞으로 내게 부딪혀 올 수많은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에게 모든 기적(?)은 intimate social supports로부터 시작했다. 이민 초 교회와 친척들의 supportive networks로부터 받은 도움이 위험에 처했던 나에게 구명 줄이 되어주었는데, 이제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들은 모두 나에게 4-10년 선배들이었다) mutually supportive network을 만들고 큰 은덕을 입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특이한 life context를 공유하고 있어서 우리 사이의 supports는 그 효능이 매우 높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healthy network 안에서 나는 퍽 강도의 esteem과 mastery를 키워나가게 된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이 모두가 축복이다. 이전까지 나의 이민생활의 키워드가 무모한 도전과 불안과 초조함이었다면, 지금은 자신감과 결과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얻은 self-esteem과 sense of mastery는 오랫동안 나의 새 삶의 키워드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기적 같은 변화다. 축복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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