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Yul
노삼열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석좌교수(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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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ced Retreat(8)
SamYul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웨스턴온타리오대학(UWO)의 자녀를 둔 부모 학생들을 위한 주택단지에 둥우리를 틀었다. 3층짜리 아파트 건물 4개가 둘러싸고 있어서 중심에 커다란 놀이터가 있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머니들이 근처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는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모든 unit이 같은 구조의 2 bedroom 아파트였다. 따라서 더 좋은 곳으로 가려는 경쟁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리고 대학의 직접관리 덕으로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청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세도 일반 아파트에 비교되지 않는 정도였으니 우리에게는 축복의 집이었다.

아내는 W 교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근무 첫날 W 교수가 실험과정을 시범했고 아내는 전 과정을 한번의 실수도 없이 마쳤다. 교수는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아내는 한숨 돌렸다. 감이 좋았다.

W 교수는 전형적 유럽인 타입의 젠틀맨이었다. 그의 부인 캐롤은 명랑한 완벽주의 주부였다. 그들은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고 연어 요리를 대접했다. 가득 찬 정성이 눈에 보이는 만찬이었다. Stained glass windows로 비추인 석양 빛이 골동품 가구들과 고풍의 차이나 셋트를 더 값져 보이게 했다.

빅토리아식 고옥에서 받은 이 만찬 하나로 당장 "캐나다인"이 되어버린 기분을 받았다. 그런데 캐나다인이라기 보다는 W 부부는 California 출신 독일계 미국인들이었다. 역시 독일계의 묵직함을 느끼게 해주는 젠틀맨이었고, 부인 캐롤은 이모의 딸,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들이 두 아이와 함께 좁다란 우리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조금 긴장했다. 연어 만찬 초청에 대한 보답으로 초청했지만 처음 겪어보는 외국인 초청이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아내는 새우와 채소 템푸라와 간장 소스를 기본으로 한 닭날개 그리고 김치를 나물과 된장국과 함께 준비했다. 밥도 준비하고 혹시나 해서 디너롤까지 준비했다.

역시 어린 아들은 밥은 피하고 롤에 손이 갔다. 성공이었다. 식사 후 접시마다 음식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리고 이 식탁은 앞으로 우리가 자주 이용하게 되는 레시피가 되었다.

아내는 조금씩 캠퍼스 생활을 익히면서 즐기고 있었다. UWO campus는 마치 잘 가꾸어진 공원과 같았다. 나는 캠퍼스 끝자락에 있던 King's College(KC)에서 첫해를 맞았다.

KC는 가톨릭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로써 사회사업학과가 있는 특별한 대학이었다. 그때까지 신학과 사회사업 전공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1학년에서 철학, 종교학,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사업을 택했다. 모든 강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모두 명강들이었다, 한 과목만 빼고. 우선 한국에서 흔하던 휴강은 없었고, 교과서도 뛰어 넘지 않았다. 오히려 추가 readings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내용도 시험에 포함시킨다고 해서 더욱 힘들었다. 그렇지만 강의와 토론 시간이 재미있었다. 절반 가량은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무엇이 그렇게 좋았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학부 1년에서 시작했던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왜 M교수가 화내면서 나무랐었는지 이해됐다. 실은 내가 최선을 다 하더라도 매주 읽어야 하는 양을 도저히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네. 접어야 하나?" 혼자 여러 차례 되물었다.

어찌되었건 이대로 지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학교생활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기로 마음 먹고, 우선 교수들의 사무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나와 나의 가족을 소개하고, 한국에서의 대학과 내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동기와 목적 등 잡다한 애기를 길게 늘어 놓았다. 다섯 교수들 중 2분은 60대의 "노교수"였고, 3인은 내 또래였다. 학생들은 나보다 10년은 어렸다.

내친김에 교수들 부부를 새우튀김 식탁에 초청했다. 그리고 나는 동료 학생들 보다 교수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들도 자신의 아이들이나 가족생활 애기를 나와 나누었다. 심리학 교수의 아들은 우리 아들과 같은 커뮤니티 축구팀에서 주말마다 같이 운동하고, 때론 내가 그 축구팀 코치를 하기도 했다.

G 신부는 나에게 신학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가족이 있으면 경제적 생활을 가벼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이 충고는 북미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몇몇 복음주의 거부 목사를 제외한 북미의 신부들과 목사들은 교회에서 주는 stipend(이것은 salary와는 구별된다) 만으로 생활한다.

Dr. G 본인은 기숙사 방 하나를 빌어 살면서 학생들과 같이 식사하셨다. 특이한 분이셨다. 그 이름난(?) 새우튀김 만찬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S 교수는 적당한 길이의 백발에 wave를 주어 마치 슈베르트를 닮은 멋쟁이 신사였는데, 언제나 맑은 웃음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조근조근 속삭이듯이. 그는 클래스를 몇 그룹으로 나누어 작은 세미나에 초청한다. 미리 준 주제에 대하여 학생들 스스로 토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과 결론을 써서 paper로 제출한다. 세미나의 발표와 paper를 평가하여 점수를 주는데, 내 기억에 한 학기 최종점수의 30% 정도를 차지했던 것 같다.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데 세미나를 본인의 가정집 거실에서 한다. 우선 다과가 조금 있고 매우 낮은 볼륨의 음악을 깐다. 전등은 어둡게 한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교수는 주제에 대한 배경을 짧게 소개하고 바로 토론이 시작된다. 나는 이 세미나 형식이 좋아서 다음 해 같은 교수의 종교철학을 수강했고, 훗날 같은 방법을 우리 집에서 내가 지도했던 대학생 성경공부 시간에 시도했는데 결과가 놀라웠다.

T 신부는 매우 열정적인 분이어서 토론 시간에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한 심정을 외마디 소리로 표현하곤 했다. 예를 들면 한번은 T 교수가 "누구나 죽음을 혼자 마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죽음에는 같이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절대자에 대한 신앙과 종교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신학생 하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I'll go with you. We have a prayers' group just for this purpose."

그 학생은 기도회에 나가는데, 그 모임은 숨을 거두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도무지 얘기가 진전되지 않았고 교수님은 답답한 나머지 "악-"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이 다 놀랄 만큼 큰 소리로. 그리고 그는 carpet을 짜는데 꽤 큰 사이즈의 예술품을 만들곤 했다.

정년을 앞둔 H 교수는 사회학 담당교수였는데, 약간 엉터리였다. 미리 알리지 않은 휴강도 몇 차례 있었고, 강의 내용도 충실하지 못했다. 사회사업과 교수는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만 살아 온 Italian New Yorker인데, 교수가 되고 싶어서 50세가 넘어서 UWO까지 왔다. 완전 뉴욕 스타일로, slang도 적당히 섞어 가면서 나름 재미있는 강의를 했다.

이 교수는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과 어울려 학교 앞 "학사주점"을 찾았다. 두 학기를 간신히 넘기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그에게는 런던이 끔찍이도 재미 없었던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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