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Yul
노삼열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석좌교수(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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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ced Retreat(7)
SamYul

 

(지난 호에 이어)

그저 매일 성실히 일하고 신앙을 지키며 자녀와 동생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10살이 되면서 집을 떠나 숙부들에게 기대여 살았던 적이 있다. 옮겨 다니다 보니 국민(초등)학교도 5곳을 다녀야 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산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긴장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래저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것이다. 때로는 형제들에 비하여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실수를 피하고 항상 모범이 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도덕적 강박증이 자리잡을 수 있다.

이런 아동기 환경 때문일까.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이웃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무게를 털어내지 못한 채 살았다. 쉼도 돌아봄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 노란색 경고는 무시하고 빨간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달렸다. 이것을 깨닫고 페이스를 조정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통첩이 날아든 거다.

교수들이 가장 희열을 경험하는 순간들은 자신이 쓴 논문이 유명 학술지에 실리고, 다른 학자들이 그것을 읽고 자신의 논문에 인용하는 것을 볼 때다. 이것은 교실이나 세미나 룸에서 직접 전달하는 강의와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더구나 평소에 내가 영웅처럼 바라보던 학자가 나의 논문을 인용했을 때, 제자가 드디어 스승의 인정을 받는 것 같은 들뜬 기분에 빠진다.

내가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하던 그 해는 word processor가 대중화 되기 이전이었다. 컴퓨터의 효능 역시 오늘과 비교되지 못했다. 이런 조건에서 논문 한편을 마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T교수와 나는 매년 계획에 2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물론 나의 계획은 아니다.

매년 여름에 있는 미국 사회학 정기 학술대회(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Annual Conference)에서 2편 이상 발표하고, 거기서 얻은 feedback을 반영해 교정하여 학술지에 투고하는 것을 연례 계획으로 잡고 있었다. 당시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년 2편의 논문이 나오면 훌륭한 성공 케이스였다.

후에 모든 조건이 좋아지고 학생수도 늘어나면서 이 계획안은 크게 수정됐다. 우선 연례학회 참여하는 수가 늘었다. 미국공중보건학회(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APHA)와 International Stress Research Conference와 같은 곳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일년 예상 논문 숫자가 두 자리 수에 달했다.

내가 쓴 첫 논문이 발표된 것은 박사학위 과정 4년 차 되는 해였다. 당시 HCRU에 근무 중이었고 나의 활동이 많은 조건하에 얽매여 있어서 논문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중 나는 논문 한편을 혼자 다 마쳤다. T교수에게 넘겨주고, 교수는 수정하여 한 유명 저널에 접수했다. T교수 자신을 lead author로 접수했다.

이 후 나는 박사학위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 후 논문의 첫 draft를 (cover to cover) committee에 제출했다. T교수는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지만 2개월이 지나도록 논문에 대한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공동지도 교수 Dr. B은 이미 읽고 수정해서 나에게 돌려줬다고 흘렸다. Dr. B의 국제적 명성은 T교수가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을 넘어선다. 그리고 2주 후 T교수는 교정할 곳을 지적하여 돌려주었고, 2개월 후 심사에 들어갔다. 나는 논문 준비를 시작한 후 예정했던 대로 12개월 만에 모든 것을 끝냈다.

내가 갑자기 12개월의 deadline을 정하고 스스로 올가미를 씌운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 해 말했듯이 나의 이민생활이 무리한 도전을 계획하고 그것이 지나면 또 더 큰 도전을 시도하는 식의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그런 중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나 보다.

어느 날 아침 샤워 도중에 갑자기 논문 준비가 생각보다 늦춰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늦춰진 이유가 내가 심리적으로 그 과제와 마주하기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12개월 이내 끝내지 못하면 영영 끝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 스스로 그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피하려면 6개월 안에 논문 첫 draft를 표지에서 표지까지 마쳐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3달은 defense, editing, 그리고 대학원의 절차와 논문 프린트 등으로 틈새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3개월 안에 thesis advisory committee의 수정과 수정에 대한 나의 대응 등 준비과정을 모두 마무리 해야 한다. 급하다.

염려했던 그대로 2개월이 지나도록 내 논문은 책상 위에서 먼지만 collect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B교수 얘기를 흘렸고,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아마 그 때 마치지 못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아니 두렵다.

두려웠던 그만큼 지금 나에게 학위는 값진 것이다. 그만큼 힘들게 숨가쁘게 치러진 값의 대가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엇보다 너무 긴 세월 동안(10년) 학업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던진 도박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끝내지 못했다면 손실이 학위 하나로 끝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손실에 대한 미련은 줄지 않고 재생되어 돌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이 후회의 세월은 매우 비관적이고 파괴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social support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민 초창기에 좌절에 가까운 곳에서 뜻하지 않았던 분들로부터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학위에 대해 cynical 감성에 빠졌을 때 누구보다 나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수긍도 하며 기다려 준 아내의 affective support의 힘은 기적처럼 위대했다. 나의 결정에 대해 이견을 달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내는 내가 지쳐있었지만 모든 것을 다 버리지는 않을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인내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Affective support는 우선 상대의 결정이나 판단에 토를 달지 않고 수용해 주는 acceptance가 필요하다. 그래야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trust가 필수 조건이다. Trust가 없으면 수용(acceptance)도 희망적 자세(hopefulness)도 가능하지 않고, 인내(endurance)함으로 기다릴 수 없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곧 사랑을 말한다.

이 회고록에 잘 드러나 있듯이, 만 18세에 서울에서 아내를 만난 후, 38세에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20년 동안 몇 차례 다시 태어나는 것과 흡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내와의 만남 중, 첫 5년 동안에 (서울에서) 나는 상실되어 있었던 정체성 (identity)을 찾았다. 이민의 첫 5년은 나에게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성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10년은 이런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성숙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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