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Yul
노삼열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석좌교수(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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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ced Retreat(6)
SamYul

 

(지난 호에 이어)

나의 방문 중 한국은 경제적 급성장의 단맛에 빠져들면서도 극단의 군사정권 독재를 향한 공포와 전쟁의 불안이 엉켜있었던 혼란의 시기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은 그 혼란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전두환 정권으로 군사독재는 이어졌고 언론과 기업의 강제 통폐합으로 사회는 불안했다. 다시 광주 학살 사건으로 혼란이 연이어 정점을 찍었다.

캐나다 역시 오일 파동과 경제불황을 겪으면서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그사이 이민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캐나다는 매년 20만 정도의 새 이민자들을 초청했다. 그만큼 사회적 변화의 속도도 규모도 급 부상했다.

특히 토론토의 피부색은 일년이 바쁘게 변하고 있었다. 1971년 토론토 인구의 96%가 백인 혹은 유럽인들이었는데, 10년 후 10%가 줄었다. 동시에 인도와 주변의 South Asian은 10배, East Asian은 2배 가량 늘었다. 음식과 의상과 미디어에도 서서히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복합문화정책(multiculturalism)이나 다문화 사회(cultural diversity)란 단어가 흔하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회변화에는 반대가 따르듯이 반이민 정책 혹은 백호주의 감정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사회적 갈등이 완연히 증폭했다. 보수와 진보적 정당들은 더욱 극단적 대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New Democratic Party(NDP)와 Parti Quebecois(PQ)가 득세하는 등 생각하지 못했던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나는 retreat도 reflection의 여유도 없이 전진하려는 조급한 생활을 계속했다. 이방인으로가 아니라 캐나다의 주인으로 자리매김을 위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이민 1세대의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빨간등 신호도 지나쳐 버리면서. 이번에 내게 내던져진 것은 신호등이 아니라 통보인가? 위험 신호기가 과용으로 고장 나버리고 최후의 통첩이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그래도 은퇴를 결심한 후 지난 10년간 나에게 전진을 위한 강박이 없었다. 여유있고 balanced life style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문제는 1970-2010에 걸친 40년의 행군이 무리였다고 생각된다.

이민 8년만에 연구소 근무를 시작했고, 토론토에서 겪었던 노동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조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stranger의 신분에서 벗어나 Canadian family의 주인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지시하는 것을 따라야 하는 직원들이나 대학원 학생들의 언행에 묻어있는 차별의식을 발견할 때나, 그런 행동을 나의 보스가 눈감아 주거나 은근히 동조할 때 나는 이방인임을 다시 느끼곤 했다.

나는 오히려 행군의 속도를 끌어 올렸다. Full-time 연구소 근무를 계속하면서, 저녁 식사를 마치면 다시 연구소 사무실을 찾았고 학업을 이어갔다. 인도인 security guard는 새벽마다 만나는 나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고개를 까닥이며 입술을 쩍쩍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해를 버티고 내 손에 학위를 쥐었다. 그때 돌아보며 그 인도인처럼 물었어야 했나?

"내가 왜 그랬을까?"

"무엇을 위해서?"

연구소장 T 교수가 나의 학위 논문 advisor 였다. 그는 나를 neurotically upwardly mobile Korean 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는 학부 1, 2년 학생인 자신의 아들과 딸, 그리고 아들의 여자친구까지 연구소에 파트타임 자리를 주고 나에게 지도하도록 했다. 그들이 내 지시를 제대로 따를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정말 neurotically upwardly oriented 되어있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도전을 이어갔다. 연구소를 떠나 교수직으로 이적했고, 상당한 봉급인상 제의를 받고 타 대학 scout에 응해 이적했고, 3년 후 NIH 후원 연구소 설립에 협력해달라는 제의를 받아 이번에는 오하이오로 옮겼다. 그러나 나에게 제의했던 S 교수가 가정과 건강의 문제로 은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토론토에서 집을 팔고 미국에 새 집을 짓고 이주한 마당에 매우 난처했다. 마침 토론토 대학에서 endowment 교수 자리가 생겼는데 그 자리에 신청하고 돌아오는 것을 고려해 보라는 연락이 있었고, 결국 나는 2년만에 같은 대학과 병원 연구소에 더 윗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받았다. 5년 사이에 3번 이적하고 두 차례 국경을 넘고 4차례 집을 옮겼다.

왜 이렇게 부산하게 살았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사이에 나의 몸은 몇 차례 노란등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허리를 다쳐서 누워있기도 했고, 거의 매해 겨울에는 심한 flu를 겪었고, 혈당 수가 치솟아 B형 당뇨병 진단도 받았다. 위에 궤양이 보인다고 매년 위시경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비 신청과 연구비 심사위원으로 일은 늘려갔고 연구발표와 특강으로 매년 몇 개월씩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을 감행했다. 왜 그랬을까?

한인동포 사회에서도 도움요청이 많았다. 캐나다 전역에서 그리고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강연이나 세미나 부탁이 많았다. 그런데 그 바쁜 일정에 지쳐있으면서 왜 커뮤니티의 요구를 사양하거나 거절하지 못했을까?

나는 스스로 이민 1세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규정하고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관념에 묻혀있었던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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