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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yoon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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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자동차 - 시발 자동차
yyoonca

 

1955년. 전쟁이 끝난지 2년. ?이 때는 우리나라가 최빈민국이었을때다.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은 폐차상태에이른 미군의 차량을 망치로 두들기고 부속품을 맞춰끼어 만들던 때이다.

 

시발자동차를 만들던 국제차량제작역시 해방 후 재생차를 만들던 수준으로 이때는 국제 공업사로 시작하였다. 전쟁때는 부산 부민동으로 옮겨 고장난 미군의 차량을 수리하기도 했다. 재생차를 만들어 돈을 모으게 되자 재생차가 아니라 우리손으로 맨든 차를 만들기 원했던것이다. 1954년 회사를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로 확대했다.

1만여개의 부품을 한 회사가 직접 다 하기는 어려운일이다. 대부분의 부품은 미군에서 나오는 부품을 이용했고 없는것은 직접 만들거나 샀다. 하지만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는 그냥 철덩어리다. 국제차량제작은 1953년 엔진의 국산화를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공부하고온 기술자 함경도아바이를 초빙했다. 당시 국내유일 엔진 기술자였다고 한다.

 

이 조그만 사진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밀짚모자를 쓴 분이 함경도 아바이. 엔진기술자 김영삼이다. 열 한번의 실험만에 드디어 1955년 8월에 4기통의 엔진을 만들었다. 국내 첫 제작엔진이 탄생했다. 엔진 완성 후 용산 신계동 조립공장에선 생산을 시작했다.

4기통엔진에 1.3 GSL 1.323cc 엔진에 전진 3단, 후진 1단의 트랜스미션을 얹으며 국산화율은 50%였다. 1955년 출시당시 가격은 8만환에 한대 생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4개월. 출시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가 1955년 10월 독립10주년 창경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고 입소문을 타며 차 가격은 30만환까지 치솟았다. 현재 얼마인지 환산하기 어렵다.

프레임 작업중인 사진. 최고시속 80km며 무게는 1.5톤.

 

당시 택시차량으로 인기였고 시발 계가 만들어졌으며  선약금을 받고 제작 했는데 선약금이 1억환이나 했다. 국제차량제작은 정부에서 융자를 받아 공장부지를 넒히는등 시발은 승승장구했다.

당시 택시 판매량은 약 500대정도 팔렸다. 시발 판매량이 늘어나자 휘발유가 부족해질것 같던 정부는 차를 폐차하지 않는 경우 더이상 차를 만들 수 없게하는 5.8라인을 발동하며 주춤해졌다.

 

이 때 자동차업계에선 황색딱지가 있었는데 자동차제작 허가서였다. 이런한 상황에도 국제차량제작은 1957~8년에는 9인승 차량도 제작 되었다. 대한늬우스에서는 이 차의 최고속도가 128k 였다고 한다. 가격은 270만환 이었다고. 9인승에 관한 정보는 많이 없다.

 

이 사진을 보면 대부분이 시발택시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다. 5.8라인에 기죽지 않고 국제차량제작은 이스즈와 제휴하고 버스와 트럭을 도입생산하기 위해 무리하게 투자하였고 때문에 회사는 위기에 처해지고 만다.

 

1962년 자동차공업보호법 발표에 따라 시발의 생산은 힘들었고 당시 새나라자동차의 도입으로 시발은 300만환에서 50만환으로 가격이 급락. 화폐개혁으로 5만원으로 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국제차량제작은 시발에 생산을 중단했다. 2,235대를 마지막으로 시발은 단종된다. 그 후 국제차량 제작은 버스및 트럭을 생산하지만 1964년 완전히 문을 닫는다.

 

시발의 원형은 현재 1대도 없다. 아쉬운 현실이다. 2천대 넘게 생산됬는데 하나도 남지 않았다. 현재는 복각차량들로 제작,복원 하였고 제주 세계자동차박물관 1대, 삼성교통박물관 1대씩있다.

 

(왼쪽은 최무성, 가운데 최순성, 오른쪽 최혜성) 시발자동차의 제작주역 중 한 분인 최무성씨는 미국으로 이민 후 자동차사업은 하지 않았고 1993년 별세하였다. 남은 형제들의 소식은 모르겠고 나머지 기술자분은 그럭저럭 잘 사셨다고 한다.



시발자동차 복원모습이다.

 

 시발에 관한 말이 많다. 엔진이 복제품이네 뭐네, 엔진 일부만 국산화된 엔진이네 뭐네. 하지만 어쩔수없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손으로 맨든 차이다. 무슨문제가 많은지 포니가 국내 첫 고유모델로됬는지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그리고 시발사진을 모으다 보니 왠지 그 시대 사진도 넣고 싶었다. 현재는 기성세대, 은퇴시대를 맞은 분들께 잠시나마 향수가 일깨워지기를 바란다.

 

여러장 넣을까 하다가 주제가 자동차인 만큼 시내사진 1장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