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yera
또 다시 시작되는 같은 하루지만 그 하루 안에서 조그만한 행복을 찾기를...다녀가신 님들 항상 행복하세여.^(^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225 전체: 610,847 )
다도~~ 다 알려면 머리 마이 아파 골라 읽는 재미징~~^^*
yera61

다사(茶事)
 차 끓이기
차를 끓이는 방법은 잎차를 우리는 팽다법(烹茶法), 말차에 숙수(熟水)를 부어 휘젓는 점다법(點茶法), 차에 물을 넣어 끓이는 자다법(煮茶法)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팽다·점다·자다를 모두 뜻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전다(煎茶)라는 말을 혼히 썼으며, 보다 넓은 의미로 차를 끓여서 대접하고 마시는 일에는 행다(行茶)라는 말을 썼다. 기본 팽다법은 물 끓이기 → 그릇 헹구기 → (숙수 식히기) → 차 넣기 → 숙수 붓기 → 찻잔의 물 비우기 → 따르기 → 마시기 → 재탕 우려 마시기 → 마무리이며, 기본 점다법은 물 끓이기 → 찻잔 데우기 → 차 넣기 → 숙수 붓기 → 휘젓기 → 마시기이다.
 물 끓이기
물을 끓이기 좋은 불은 활화(活火), 즉 불꽃이 있는 산 불로서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화력이 고루 다스려져 생기가 있어야 한다. 물은 100℃에서 완전히 끓어서 익은 물, 즉 숙수(熟水)가 좋다.
 그릇 덥히고 헹구기
다관(茶罐)과 찻잔은 뜨거운 탕수를 부어 덥히는 동시에 헹구어 써야 차의 맛과 향을 그대로 지닐 수 있다. 특히 차가운 찻잔에 차를 부으면, 찻물이 급격히 식게 되므로 차의 향기와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찻잔의 물을 비울 때는 수건에 찻잔을 기울여 눌러서 물기를 빼야 본래의 차맛을 즐길 수 있다. 말차를 마실 때도 찻잔과 물의 온도 차이가 적어야 한다.
 숙수의 온도 맞추기
숙수의 온도에 따라 차의 맛이 다르다. 그 이유는, 물의 온도에 따라 차의 각종 성분이 우러나는 속도가 다르고 물에 녹아 나오는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의 종류에 따라 숙수의 온도를 달리하는 것이 차의 맛을 한층 좋게 한다. 발효차(황차·홍차)와 말차는 뜨거운 탕수를 바로 부어도 되나, 녹차는 찻물이 너무 뜨거우면 비타민C가 파괴되고 감칠맛이 적다. 쓴맛과 떫은맛을 내는 카페인과, 발효되지 않은 폴리페놀(타닌)은 온도가 높을수록 많이 녹아 나오며 감칠맛을 내는 유리아미노산은 60∼65℃에서도 거의 용출되므로 녹차는 숙수를 조금 식혀 부으면 쓴맛과 떫은 맛이 덜 우러나온다. 일반적으로 녹차는 숙수 온도가 90℃ 전후면 적당하나 고급 녹차는 아미노산·카페인·비타민C 등의 함량이 많고 섬유소가 적어 연하므로 숙수를 70∼80℃ 정도로 식힌다. 발효차는 발효율이 높을수록(붉은색에 가까울수록) 높은 온도에서 우려야 향과 맛이 잘 우러난다. 따라서 한국의 황차(黃茶;뜸차)나 중국의 오룡차·철관음 등은 90∼95℃ 정도의 뜨거운 숙수를 바로 붓는다. 중국의 발효차는 잎이 크고 주름이 많아 차의 분량을 많이 넣고 여러 차례 우려 마신다. 한국의 고급 황차(발효 세차)나 약발효된 중국의 청차(靑茶)와 재스민차 등은 80∼90℃ 정도로 온도를 낮추어 우린다. 숙수의 온도를 낮출 때는 숙우(熟盂;귀때그릇)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차 넣고 숙수 붓기
차는 차와 물의 분량이 적절해야 차가 지닌 향기와 참맛을 즐길 수 있다. 차의 분량을 얼마나 넣는가는 차의 종류, 마실 차탕의 양, 마실 사람의 취향 등에 따라 다르나, 너무 진하지도 싱겁지도 않게 찻잎의 양을 알맞게 넣는다. 일반적으로 차의 분량은 잎차의 경우 1인당 1~2g 정도(티스푼 하나)를 넣고, 4~5인 분량으로는 4~6g 정도 넣는다. 잎이 어린 세차는 가늘고 카페인 등 가용성분이 많으므로 적게 넣고, 자란 잎이나 발효차는 많이 넣으며, 납작한 솔잎 모양의 마른 차나 부서진 차 등은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므로 적게 넣는다.

다관에 차를 넣고 물을 붓는 것을 순서에 따라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먼저 넣기[下投法(하투법)]: 차를 먼저 넣고 숙수를 부어 우리는 방법으로 오늘날에는 이 방법을 많이 쓴다.

② 도중 넣기[中投法(중투법)]: 다관에 숙수를 조금 붓고 차를 넣은 뒤 다시 숙수를 붓는 방법이다. 1인용 찻잔으로 녹차를 마실 때 이 방법을 쓰면 처음 부은 물은 찻잔을 데우게 되어 찻물의 온도가 알맞게 된다.

③ 나중 넣기[上投法(상투법)]: 숙수를 먼저 부은 뒤 차를 넣는 방법으로 여름에 주로 사용하나 오늘날에는 숙우의 사용으로 거의 쓰지 않는다. 말차는 얇은 약숟가락이나 휜 대숟가락으로 떠내어 찻사발 가운데에 떨어뜨리고 숙수를 붓는다. 말차 1인분의 적당량은 1/4~1/2 티스푼이며 숙수의 분량은 50~70㎖ 정도이다.
 차 우리기
차를 우리는 시간은 찻잎이 거의 펴질 때까지의 시간이며 두벌이나 세벌 우릴 때 찻잎은 다 펴진다. 보통 잎차의 애벌 우림은 1분 남짓이며, 낮은 온도로 우리는 고급 녹차는 2분 정도 걸린다. 차의 카페인은 용해 속도가 빠르고 폴리페놀은 비교적 느리므로 오래 우리면 떫은맛이 난다.
 차 내기
우러난 차는 숙우에 모두 따라 각잔에 나누어 따른다. 숙우에 따르면 농도도 같아지고 손님의 수에도 무관하며 한 그릇의 차를 나누어 마신다는 의미도 되므로 바람직하다. 숙우를 쓰지 않을 때는 찻잔에 바로 따르는데, 이 때는 주인 → 보통손님 → 웃손님 → 보통손님 → 주인의 순으로 따르면 농도가 같아진다. 첫탕으로 차의 풍미를 감상하며, 마신 뒤 다시 다관에 숙우를 부어 두벌 우려 재탕을 마신다. 녹차를 재탕할 때는 첫탕보다 탕수온도를 높여 타닌이 상대적으로 많게 하여 마신다.
 차 마시기
차가 손님 앞에 다 놓여졌으면 주인은 손님을 향해 목례를 하거나 <차 드십시오>라고 권한 뒤 같이 마신다. 잎차를 마실 때는 잔받침은 그대로 두고 두손으로 잔을 들어 오른손으로 잔을 잡고 왼손으로 잔을 받친다. 잔이 크면 두손으로 감싸 쥐고 두세 번에 나누어 마신다. 말차를 마실 때는 손님이 많을 경우 다 같이 마시지 않고 주인이 주는 대로 마신다. 찻잔은 두손으로 안전하게 감싸쥐고 천천히 한꺼번에 마신다. 과자는 먼저 차의 향기와 맛을 본 뒤에 먹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말차를 마실 때는 식후가 아니면 위장을 자극하므로 과자를 먼저 먹고 차를 마신다. 다과는 웃손님부터 드리는 것이 예의이다.
다례(茶禮)
다례란 예절을 갖추어 차를 대접하는 행동을 말한다. 문헌을 보면 ① 궁전이나 지방관청에서 중국 사신을 맞았을 때 ② 왕세자가 스승과 관리를 모아놓고 경사(經史) 등을 복습하는 회강(會講) 때 ③ 일상생활에서 손님을 맞아 예의를 갖출 때 다례를 행하였다. 기제사가 아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여염집에서는 차례, 궁중이나 절에서는 다례라 했던 것 같다. 다례는 목적에 따라 일상차내기·접빈다례(接賓茶禮)·의식다례로 나눌 수 있다. 일상에서는 여럿이 둘러 마시는 두리차, 혼자 마시는 명상차가 있다. 접빈다례는 차벗들의 예다법인 가회다례와 존경하는 사람이나 웃사람에게 차를 올리는 공경다례가 있고, 의식다례는 차례·추모헌다례·잔치다례·개천다례가 있다.
다선(茶禪)
육우(陸羽)는 <덕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것이 차>라고 하였다. 흰 구름과 밝은 달을 벗삼아 마시는 다인의 멋은 바로 푸른 산을 마주하고 앉아 삼매에 든 선사의 법열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풍습이 성행한 곳은 주로 선가(禪家)였다. 이것은 졸음을 쫓아주는 차의 약리적 효과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다도의 정신과 선의 정신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옛 승려들은 <차의 깨끗한 정기를 마실 때 어찌 대도(大道)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랴>고 자부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다성(茶聖) 초의선사(艸衣禪師)에게 써보낸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에서 차와 선이 한 맛으로 통함을 강조하였던 것도 차를 통하여 선을 이루었던 예이다. 다도는 정성스레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잘 끓인 물과 좋은 차를 합일시키는 평범한 일상생활이다.
각 나라의 다도
 중국의 다도
예로부터 중국의 황허강[黃河(황하)] 유역은 물이 탁하고 먼지가 많았던 까닭에 일찍이 차생활이 성하였다. 같은 이유로 북방 유목민족들도 중국의 차를 좋아하였다. 청(淸)나라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중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차를 마시는 습관은 BC 200년 이래 쓰촨[四川(사천)]지방에서 있어 왔다고 하였는데 명확하지는 않고, 4∼5세기에 양쯔강[揚子江(양자강)] 유역의 주민들이 차를 즐겨 마시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한편, 육우는 《다경》에서 <찻잎을 떡처럼 뭉쳐서 말려 두었다가 가루를 내고 거기에 끓는 물을 부어서 대나무젓가락 같은 것으로 휘저어 거품을 일으켜 마신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녹차를 갈아서 분말로 한 말차의 원조(元祖)로 보여지며, 이런 점으로 미루어 중국에서는 당(唐)나라 때부터 차가 성행하고 다도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다도
일본인들이 차나무를 재배하고 음용(飮用)한 지식은 9세기 초인 헤이안시대[平安時代(평안시대)] 초기로, 자생적이기보다는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8세기 후반 당나라에 들어가 30여 년 간 생활을 하다 귀국한 승려 에이추[永忠(영충)]의 영향으로 궁정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단차법(團茶法)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 뒤 한동안 차 마시는 풍속은 퇴조하게 되었으나, 궁정과 사원에서 법회 때 승려의 접대용으로 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사원승려의 사이에서는 다원을 가꾸었다. 헤이안시대 당풍(唐風)의 차는 보존시의 형태에서 <단차>라고 부르고, 또 마실 때 그것을 갈아 탕(湯)으로 끓인 것부터 <전차(煎茶)>라고 하였으나, 중국에서는 송(宋)나라 이래 말차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 말차법은 천태승(天台僧) 조우진[成尋(성심)]의 제자들에 의해 일본에도 전해져, 이후 일본 차생활의 주류가 되었다. 14세기 중엽 차의 탕이 성립된 이래 차의 탕론이 전개되었고, 메이지시대[明治時代(명치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식 다도문화는 국민의 일상생활문화가 되었다.
 한국의 다도
 삼국시대
많은 국학저서를 남긴 이능화(李能和)가 《조선불교통사》에서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올 때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에서의 차생활은 가야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신라에서는 756년(경덕왕 23)에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의 일화에 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며 828년(흥덕왕 3)에는 중국으로부터 차종자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신라인이 즐겨 마시던 차를 《삼국유사》에는 전차(煎茶), 《월일록》에는 점차(點茶)라고 적혀 있다. 전차란 엽차를 말하며, 점차는 말차 곧 엽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차를 일컫는다. 후일의 학자들은, 엽차와 말차를 함께 마셨으나 엽차보다 말차가 더 성행하였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 이전에 차는 사찰의 귀중품이었다. 같은 시대에 불교가 성행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차생활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는 고급 단차(團茶)로 여겨지는 전차(錢茶)가 발견되었고, 기후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백제도 이미 7세기 이전에 차를 마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 속에서 차를 즐겼다. 특히 국선(國仙)이던 화랑들은 산천경개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가운데 차생활을 잊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설총(薛聰)은 왕이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할수 있다는 <화왕계(花王戒)>를 들려주었다.
 고려
고려시대는 우리 차문화의 전성기였다. 《고려사》 <예부>에 의하면 98종의 의식 중차를 내는 의식이 11회 나온다. 차가 나오게 되는 의식은 ① 신하가 죽었을 때 ② 감형(減刑)할 때 ③ 북조(北朝)의 사신이 왔을 때 ④ 원자(元子)가 탄생했을 때 ⑤ 공주가 태어났을 때 ⑥ 공주가 시집갈 때 ⑦ 고관(高官)회의 때 ⑧ 대관전에서 군신이 연회할 때 ⑨ 연등회(燃燈會)를 열 때 ⑩ 팔관회(八關會)를 베풀 때 ⑪ 왕자를 책봉할 때 등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곳곳에 다방(茶房)이 있었고, 여기에서는 차뿐만 아니라 주과(酒菓)가 함께 나왔다 한다. 고려의 대표적 다인으로는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의 작자인 이규보(李奎報)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서, 이규보는 《다점주면(茶店晝眠)》 등 차에 관한 여러 시편(詩篇)을 남겼고, 정몽주도 《포은집》에서 차생활을 즐기는 시를 썼다.
 조선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다소 다도가 쇠퇴하였으나, 사원을 중심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초기에는 조정과 왕실제도나 의례에서 고려의 음다풍속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차문화가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차의 품격도 떨어졌다. 그러나 조선 말엽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초의선사 등을 중심으로 차의 중흥기가 있었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던 실학의 대성자 정약용은 야생차가 성하던 그곳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차생활을 즐겼는데, 다산이 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초의선사를 만나고부터이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었고 차를 재배, 법제하는 방법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정리하고 이를 발전시켰다.
 현대
8·15와 6·25의 격동기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다도의 계승·발전을 위한 다도문화의 저변확대사업이 일어났다. 이는 사찰과 동호인 모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1982년 7월 문화공보부에서 다도문화진흥책으로 ① 전통다도의 연구와 정립 ② 다도의 홍보와 교육 ③ 관광지에 다원(茶苑) 개설 ④ 차생산 기반의 확충과 내실화 ⑤ 재래차의 보호 ⑥ 다기(茶器)의 대량생산 지원 등을 폈으며, 1989년 이후부터는 다산 정약용의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 조안면(鳥安面) 능내리(陵內里)에서 매년 5월 25일 <차의 날> 행사가 개최되는 등 전통다도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