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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incanada
이 사이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카나다에 유학와 귀와 입이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알버타 주립 대학에 들어가 기계공학 학사를 마치고 워터루 공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토론토 인근 원자력 발전소 연방정부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그의 신조를 바탕으로 이룩해 놓은 그의 발자취를 실어본다. 현재까지 그의 삶의 발자취는 에드몬톤->워터루->미시사가->대전->밴쿠버->오타와->리치몬드 힐이다. 현재 그는 다음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람쥐 체바퀴처럼 열심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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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다에서의 자녀 교육은 (2편)
nhok

나에겐 내 딸들과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카나다로 다시 들어온지 나는 2년이 지났고, 두 아이가 10학년, 11학년에 있을 때였다. 나는 여기 카나다에서부터 대학 교육을 받았으나, 사고 방식은 공자의 유교사상이 좀 남아 있었다. 나는 카나다가 이민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카나다 수도 오타와에서는 더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민성에서 공식적으로 태어난 나라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곳에서 살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나는 내 가정에서는 우리 딸들이 한국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카나다 생활을 즐기기를 바랬다. 나 역시 직장에서는 카나다라는 한 문화에서 일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한국말로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이웃에 사는 한인 교민들과 주말에 모여 이야기 나누고 하는 것이 편했다. 따라서 아이들도 나와 같이 생활하길 바랬다. 다시말해,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자유 분방하게 생활하고 집에 들어오면, 동양의 좋은 점을 따라, 우리들과 약간의 보수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랬다. 따라서 아이들이 보이 프랜드를 갖는 다면 나나 아내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두 아이 모두 여태까지 그런 일이 없었으나, 큰 딸이 "Just Friend"가 아닌 "Boy Friend"가 생긴 것이다. 여기서 고등학생들이 말하는 "Just Friend"는 그저 몰려 다니는 친구이고 "Boy Friend"는 키스도 나눌수 있는 진짜 연애 상대이다. 나는 그당시 아이들의 고교 환경이 내가 다니던 고교때와 어떻게 다른 지를 잘 몰랐고, 우리 아이들이 겪는 이중 생활의 어려움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남학생들이 술 먹으면 여학생들을 꼬셔서, 연애하고, 담배피우는 그런 생각만 하였다. 그런데 여기 북미에서는 한국과 다른 점이 있었고 우린 그걸 콘트롤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금요일이면 아이들이 모일 껀 수를 여기저기 만든다. 이들의 입에 담는 파티는 한국말로 '모임'을 얘기하지, 한국어의 화려한 파티석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이는 아이들은 같은 학교 아이들일수 있고 다른 학교 아이들과 섞일수도 있다. 누가 생일이면 부모들이 집에서 모이게 할 수 있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모일수도 있다. 이경우 술과 담배는 필수고, 마약이 준비되는 곳이 많다. 우린 오타와 조용한 곳에서 살았으니, 좀 나았는 데 대도시와 소도시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나이에는 보이 프렌드(남자친구)가 없으면 서로 창피함을 느끼게 된다, 당사자에게 정신적, 신체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줄 안다. 따라서 당당히 남자 또는 여자 친구를 꾀차고 있는 게 당연하지, 그게 없는 아이들은 공부만 하는 멍청이(Nurd)거나 못생기거나 그럴만한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모두들 상대편 친구를 형식적으로라도 옆에 차고 싶어한다. 우리 한국과 다른 점은 한국에서는 기발한 킹카 아니면 그걸 갖지 못하나 여기서는 언청이도 남/여자 친구를 가지고 있어야 학교 주관 또는 자기네들 주관 공식 파티에 데리고 나갈 수 있게 된다. 큰 딸이 드디어 필리핀 가정 배경의 잘 생기고 엄마 말 잘 듣는 mama boy를 알게 되고, 나중에는 할머니 , 할아버지가 같이사는 그집까지 놀러가곤 했다. 물론 둘다 순진해서 이성을 밝히는 시점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가까와지지 말라고 요구하였고, 나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한국식을 요구했다. 남자아이을 만나러 나간다는 것을 막을려고 하다가 드디어 목청이 불거지고, 나는 남자아이 만나러 얼굴 치장하는 딸을 보고 외출 허락하기가 힘들었다. 내 딸은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 나쁜 눈으로만 보냐고 따졌다. 사실 아직 이성이 눈뜨지 않은 때, 돌아 다니는 것은 순진하게 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난 우리 부부에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식이 날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러다가 내손이 올라가고, 아내가 아이를 몸으로 막고, 급기야는 딸의 화장대 거울이 깨지고 방문에 내 주먹 자국이 생기고 하였다. 첫번째 내 주먹자국은 학생 아파트에 살던 에드몬톤 시절 집 사람이 너무 아기에 헌신해 내가 화난 때이다. 하도 답답해 우리 부부는 처음 당하는 거라 어떻게 대처할 둘 몰라, 이웃에 사시는 김박사님한테 자문을 구했으나, 뭘 그 정도 갖고 그러느냐는 것이셨다. 그 후, 나는 쇼핑몰에서 내앞에서 그 보이와 다정히 손을 잡고 오는 내 딸을 우연히 마주쳤고, 내 딸 입에서 "Oh, my God! My dad is coming" 라고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못 본 척했으나, 그 날 또 딸과 부딪히게 되었고, 집사람은 몸으로 딸을 커버하였다. 그 이후에도 계속는 우리는 둘이서 걷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곤 차로 따라가 아내가 차에서 나와 내 딸에게 그 보이 앞에서 큰 소리로 야단치고 딸을 태워 집으로 온 적이 있다. 그 보이는 참해 보이고 잘 생겼으며, 자기가 뭘 잘못한 것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린 그애한테 아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아이만 통제하면 되니까.. 그 이후 집사람은 그 아이 집까지 쫒아가서 딸을 데려오고, 전화로 "내가 내 딸을 통제할테니 당신 아들은 당신이 통제하시요" 라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집사람은 내 딸을 일주일간 밴쿠버 외할머니 집에 보내 나를 피하게 하고 내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누구네 부모들이 고지식하게 (Too Strict) 너무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나도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학교 교장이 찾아와 여긴 카나다이니 그런식으로 교육하지 마시오라고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부부가 택한 길은 둘 사이를 떨어 뜨리기 위한 토론토로의 이주였다. 그러면 멀어지겠지 했으나, 이건 왠걸, 딸이 고속버스 타고 연휴면 가끔 올라가고, 그 남자 아이가 토론토 조카네 집에 온다고 내려왔다. 우린 둘의 관계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서 싸움 사건 이후로 큰 딸과는 이야기 한번 안하고 오랜기간을 말 안하고 살게 되었고, 내딸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딸도 아빠에게 본척도 않하고 말도 꺼내지 않았고, 집사람이 중간에 끼어 순간 순간을 모면해 나갔다. 그렇게 산지 1년이상이 지나갔다. 우린 남자 아이가 내려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고 그들은 계속 이메일, 채팅, 전화를 이용했다. 얼마전 큰 딸 방에서 큰 소리가 나길래 집 사람이 놀라 올라가보니 큰 딸이 엉엉 울고 있었다. 집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그 남자아이는 대학을 쉬고 있는 데 내 딸이 복교하라고 인도를 하는 데도 말을 안 듣고 계속 키타만 치고 있다는 것이고 급기야는 우리 딸이 너무 답답해 혼자서 우리에게 말도 못하고 터진 것이다. 너무 남자아이가 easy-going이라고.. 우리는 그동안 우리 딸이 몇번이나 그 남자아이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우린 준비가 안 되었다고 피했다. 또한 집사람은 계속 딸에게 남자 친구의 자격, 요구 조건을 강조해왔었다. 너를 고생시키지 않을려면 적어도 대학은 졸업해야 하고 직업이 확실해야 하고... 큰 딸은 그동안 자기 부모가 요구하는 레벨로 남자 아이를 끌어 올릴려는 데 남자아이는 못하겠다고 계속 그러고, 필요성을 모르겠다고 나자빠진 것이다. 그후로 딸은 그 아이를 영원히 포기한 것 같았다. 아니 자격 미달을 강조하는 우리 부모들의 요구조건을 맞추기 위해 계속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얘기했던 것을 계속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두번째 우연히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한국 남학생을 사귀어 영화도 보러가곤 했다. 우린 이 두번째 아이가 한국 말하는 학생이라 더욱 신기하고 또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 신기해 계속 관심을 가졌으나, 너무 자유 분망한 생활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는 지 지금은 만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이제 내딸은 제자리로 다시 돌아와 자기의 앞길을 나아가고 있다. 이번학기 4학년 1학기을 시작하고, Law School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또한 이번 학기부터 다운타운 콘도로 나가 동생과 같이 살고 있으면서 살림을 도 맡아 하고 있고, 5과목을 택하면서 매일 exercise room에 내려가 운동하면서 몸매를 관리하고 있다. 그당시 아빠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큰 딸 , 둘째 딸이 아빠를 잘 따르고, 아빠를 불쌍하다고 더 생각해주고 있다. 엄마는 돈 얘기만하고 야단만 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엄마에게 야단을 친다, 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느냐고 말이다... 둘째 딸은 항상 모든 진로 문제에 대해 아빠의 의견을 듣는다. 그리고 아빠를 Nuclear Engieer이고 Dr 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 우선 호르몬이 다량 분비되는 그 시점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막을 수가 없고 부모로부터 받은 DNA에 의존해 올바로 행동하기만을 기대해야 한다. 수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며 부모로서 기대치를 설정해준다. - 우린 우리 가정만 한국식으로 운영해야지 하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우리 아이들은 더 큰 문화권에서 생활하고 있고, 주입식 한국관념은 통하지를 않는다. 통제할 수도 없다. - 항상 자식들이 올바로 행동하기를 바라고, 차를 타고 갈때를 특히 잘 이용해 듣지 않는 것 같더라도 염불을 외우듯이 되풀이하여 아이들이 의식중에 듣게 된다. - 외식을 가끔하면서 부모가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 해 주어야 자식들이 목표치를 세우게 된다. 외식비 50불은 그 효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자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