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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incanada
이 사이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카나다에 유학와 귀와 입이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알버타 주립 대학에 들어가 기계공학 학사를 마치고 워터루 공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토론토 인근 원자력 발전소 연방정부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그의 신조를 바탕으로 이룩해 놓은 그의 발자취를 실어본다. 현재까지 그의 삶의 발자취는 에드몬톤->워터루->미시사가->대전->밴쿠버->오타와->리치몬드 힐이다. 현재 그는 다음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람쥐 체바퀴처럼 열심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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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러시아 여인
nhok

요즘은 새집에 채울 가구들을 찾느라 동분 서주하고 있다. 정가를 주고 사고 싶지 않은 우리 부부에겐 두 발로 뛰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가구점의 상술을 알게 된것도 한 가지 다행이라 생각한다. 웨스톤과 하이웨이 7, 키플링과 하이웨이 7 이 만나는 곳에는 가구점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중 우아한 이태리풍의 가구들을 파는 곳이 우리 부부의 눈을 끌었고, 그간 다녀본 가구점들과는 실로 다른 유럽풍의 가구들을 팔고 있다. 우리 부부는 여기서 눈으로 찍어놓은 가구들을 내일 다시와 사기로 친절한 이태리인 매니저와 약속도 하였다. 다음날 막상 살려고 하니 깍아주는 금액의 폭이 너무 적어 마지막 순간에 가격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는 거액을 쓸 손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린 마음이 상해 다시 우리 동네인 리치몬드 힐로 와서 평소 가던 우드바인과 하이웨이 7에 있는 가구점 몰에 다시 갔다. 그런데 그 가구점에서도 똑같은 다이닝 세트를 팔고 있었고 가격이 약 천불정도 적었다. 아니 동일한 제조업체의 동일한 모델이 서로 다른 가구점에서 천불정도 차이를 두고 팔고있는 것이다. 우린 너무도 다행이었다. 만약 그 우아한 가구점에서 분위기에 매혹되 그 즉시 샀다면 우린 이런 것을 알지 못한 채 천불을 더 주고 샀을것이다. 우린 Brick이나 Leon 가구가 가장 저렴한 것으로 알고있어 이곳을 여러번 가서 15개월 할부제도를 이용하려 했다. 거기서 좋은 것을 사고 싶어 가격을 보니 베드룸세트가 만불이 넘는다. 나이트 테이불 1개가 1300불이 되는 LA지역 이태리가구 디자이너가 만든것으로 사자의 발가락이 모든 가구 다리에 장식되어 있다. 하도 비싸 내 직장 행정담당 아주머니와 상의해보니, Direct Buy 멤버쉽 을 가지고 있는 지라 가격을 체크해보더니 자기는 500불에 살수있단다. 절반 가격이다. 일전에 Direct Buy Open House에 게스트로 갔다가 그냥 돌아온적이있는 데 그때 못한게 아쉬었다. 멤버쉽에 일시불로 3천불을 내고 매년 200불 정도의 돈을 내고는 집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매자와 직접거래해 중간 마진을 줄이자는 것이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다. 배달은 안되기어 Direct Buy 지점에 가서 실고와야 한다. 그러나, 많은 가구 및 부엌, 화장실을 개조할 때는 그 멤버쉽 낸돈이 금새 돌아올것 같다. 이 분의 이야기로는 소니 TV도 절반 가격에 샀다고 한다. 우린 이미 Floor Model, cash deal을 통해 저렴하게 샀기에 Direct Buy를 통하기에는 너무 늦은 편이어서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베드룸 세트를 찾기 위해 다음날 그 이태리가구점 근처 다른 곳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인도 사람인데 여기에도 눈에 뛰는 것들이 많았다. 집 사람이 전에 온 적이 있기에 금발 여자 세일스 아줌마가 다가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다행히 구석진곳에 눈에 띄는 침대 세트가 있어 Floor Model을 사기로 하고 인도 주인과 현금 박치기를 하니 더 깎아 주었다. 그러고 나니, 문닫는 시간이 되어 우린 그 가게를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집사람이 세일스 여인이 우리집 동네에 사니 태워주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버스로 이 늦은 시간에도 퇴근해야 했던 모양이다.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린 무척 놀라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4년전 카나다에 먼저온 남편이 초청해 아이 둘과 카나다에 이민오게 되었고, 러시아 연방 국가중하나에 살고 있었고, 그 끔직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건을 겪은 45세의 역사의 증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민오자 마자 남편이 자기보다 10년연상의 여자와 한 동네에서 바람나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 남편을 죽도록 원망하지를 않고 체념해 사는 것 같아, 무척 마음이 너그러워보였다. 단지 빈털털이가 되어 아이들과 메이저맥과 베이뷰 교차점에서 오래된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성장시킨 것이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1년전 시작한 가구점 세일즈는 시간당 8불 50 센트를 받고 있고 아직 과부 연금은 신청 대기상태라 어떻게 틴에이져 큰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지 궁금했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추, 퇴근을 우리동네에서 버스로 하는 데 편도 1시간 45분이 걸리고 겨울에 좀 춥다고 했다. 내 눈앞에는 매서운 1월의 찬바람과 눈보라가 올 때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버림받은 이 여인을 상상하니, 같은 카나다 땅에사는 사람으로서 미안함이 보통정도가 아니었다. 지금도 큰 집에 채울 가구들을 찾아다니느라 눈이 벌개 다니는 내 모습이 저주받을 것 같았다. 우린 차 안에서 이여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같은 이웃으로서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이 불쌍한 여인에게 일을시키고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돈을 줄 일이 없을까 하고 말했다. 참, 내 이웃이 이런 상황에 있는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위만 보고 살아가는 내가 아래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바닥생활은 나도 20여년전 학생시절 해보곤 다 잊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 나도 청소도 해보고 빈병 수집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20연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옛날 고생을 다 까먹고, 배가 불러 내 이웃에도 이런 도와줄 사람들이 깔려있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