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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워커 중장이 한국군 트럭에 받혀 죽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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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워커 중장이 한국군 트럭에 받혀 죽은 날이다!♣ 한국전에 참전한 美軍 장성들의 아들 숫자는 142명이나 된다. 이들중 戰死-부상자가 25%인 35명이었다. 사병들의 戰死傷率보다 두 배나 높다. 이들이 위험한 일선 근무를 자원한 경우가 많 았기 때문이다. 글쓴이:趙甲濟 오늘은 60년 전 美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지금의 서울시 도봉 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지프 차 를 타고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로 가던중 맞은 편에서 들이닥 친 한국군 스리 쿼터에 받혀 죽었다. 당시 61세였다. 그는 대한 민국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무서운 집념과 용기로써 낙동 강 교두보를 지켜낸 지휘관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면 서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는 동안 맥아더 사령관은 仁川상륙작 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워커 중장이, 한국군 운전병이 모는 트럭의 과속走行으로 죽 은 것은 우리로선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李승만 대통 령은 운전병을 엄벌하라고 호통을 쳤으나 옆에 있던 미군 고문 관이 말렸다고 한다. 운전병은 징역 3년형을 살고 나왔다. 일본에 주둔하던 美8군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전선에 투입된 것은 24사단이었다. 예하 연대장 마틴 대령은 천안에서 직접 바주카포를 들고 북괴군의 탱크와 대결하다가 탱크가 쏜 직사 포를 맞고 산화하였다. 24 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을 지키는 전투를 지휘하던 끝에 부대가 흩어지면서 낙오하여 한국인 民 家에 숨었다. 아무도 그를 오래동안 보호해주지 않았다. 끝내 는 두 한국인이 그를 북괴군에 넘기고 5달러씩 받아먹었다. 9군단장 무어 소장은 1951년 초 반격작전중 탑승한 헬기가 고 압선에 걸려 추락하면서 후유증으로 죽었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의 아들은 조종사였는데, 북한지역을 폭 격하다가 실종, 戰死로 처리되었다. 미국 CIA 부장의 아들은 프린스턴 대학 재학중 해병대에 지원, 한국전선에서 머리에 총상을 맞고 불구가 되었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중 17명이 한국전선에서 戰死하였다. 휴 전협정을 맺을 때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2사단 소속 중대장으로 斷腸의 능선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미국으로 후송되었는데 이게 세번째 부상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장성들의 아들 숫자는 142명이나 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참전하였다. 이들중 戰死-부상 자가 25%인 35명이다. 일반 사병들의 戰死傷率보다 두 배나 높다. 이들이 위험한 一線 근무를 자원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 이다. 李 대통령에게 사고 운전병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였던 미군 대위 짐 하우스맨은 회고록에서 이런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古風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 숨을 바친 하버드 출신 병사들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 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 망'들을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戰死했 다. 한국에선, 존경하는 소 대장님, 용감한 대대장님, 그리 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얘기는 입으로만 전 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戰後 팔을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 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戰傷者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많은 한국인들은 5만4000명의 미군 戰死者, 10만 명의 미군 부상자가 흘린 피 위에서 지금도 安保무임승차를 즐기면서 웰빙에 注力한다. 6.25 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에 맞은 워커 장군 60週忌를 이 나라는 기억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것 이다. 80代의 金利鎭씨가 자기 돈을 써가면서 워커 장군 추 모행사를 이어온 것이 그나마 최소한의 체면을 살려준다. 워 커 대장 추모기념 사업회 金利鎭 회장은 "좌파정권 10년 동 안은 경찰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사고현장에서 추모제를 지내지 못하였다"고 했다. 지난 12월 초 서울시청광장에서 있었던 추모회는 金씨의 노력으로 마련된 것인데, 추모사를 하기로 약속했다던 모 장관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워커 장군 의 희생적 투쟁이 없었더라면 김정일 치하에 살고 있을 한국 인들과 정부의 놀라운 背恩忘德이다. 은혜를 모르는 한국인, 자기를 지키기 위한 싸움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국인. 이들을 보면 벌써 망하였어야 할 나라이다. 천안함 爆沈이 북한소행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국민들이 30%나 되는 나라는 망하는 게 정 상이다. 그런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은 것도 美軍 덕분이다. '살 찐 돼지'처럼 사는 국민이란 욕 을 먹지 않으려면 마음의 총을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