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lakepurity
It would be a place where all the visitors including me share the life stories and experiences through their activities,especially on life as a immigrant.
Why don't you visit my personal blog:
www.lifemeansgo.blogspot.com

Many thanks.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2 전체: 226,082 )
광화문 현판의 의미....
lakepurity

새로 복원된 광화문 현판을 또 바꾸어 매달았다고 한다. 박통께서 친필로, 그것도 우리의 한글로 썼던 현판을 없애고, 고증을 통해서 재현된 한문현판을 걸었단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눈에 익었던 현판을 다시 걸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데..... http://mail2.daum.net/hanmail/Index.daum?dummy=-64225891 http://mail2.daum.net/hanmail/Index.daum?dummy=-64225891 朴 대통령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펌글] 관련편지검색 - "엘살바도르에서 사업을 하면서 느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하면 이렇게 망하는 수가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오늘 喪家에서 만난 70代 인사는 은퇴한 기업인이다. 그는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한 紡績회사에 들어가 수출부서에서 근무하였다. "직원을 모집하는 광고지를 전봇대에 붙여 놓으면 30명 모집에 400명 정도 몰려왔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먹여주기만 해도 일을 하겠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일을 시켜놓으면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었어요." 그때 문제는 物流였다고 한다. 수출품을 納期에 맞춰 부산항까지 실어보내야 하는데 서울역에서 貨車 잡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트럭에 물건을 실어 國道로 부산까지 가는 데는 2~3일 걸렸다고 한다. "비포장 도로에다가 차는 고장이 잦았습니다. 도중에 세워놓고 자는 사이에 물건을 도둑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朴正熙 대통령이 京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애를 태우던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반대자는 왜 그렇게 많은지? 고속도로를 짓는 대신에 그 돈으로 공장을 지으라, 國道를 포장하라고 하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그 반대자들이 그 뒤 무엇을 했습니까?" 이 人士는 1980년대엔 中美의 엘살바도르에 진출, 섬유공장을 세웠다. 약1000명을 고용하였다. "엘살바도르에서 공장을 운영해보니 朴正熙가 더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그 가난한 나라가 공산게릴라들과 內戰을 벌이는데, 노동법은 미국식이더군요. 노동자들은 토, 일요일 休務인데, 금요일부터 일을 안 해요. 생산성이 금요일엔 60%로 떨어져요. 화장실에 가서 30분씩이나 있다가 나오질 않나, 화가 난 한국인 관리자가 손찌검을 했다가 경찰에 잡혀 가고, 내가 화가 나서 철수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그때 느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하면 이렇게 망하는 수가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만약 1960년대에 朴 대통령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한국에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한국은 南美 수준에 와 있겠죠. 朴 대통령을 생각하면 왜 그런지 눈물이 납니다. 우리 세대가 죽기 전에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할 것 같아요." [출처]추억의 편린들 6.25사변 10대 미스테리 - 이형근 장군 증언 6.25사변 10대 미스테리 - 이형근 장군 증언 1920년 충남 공주 출생, 일본 육사(56기) 졸 '46. 5. 제1대 육사 교장, '46. 9. 국방 경비대 총사령관 겸 육사 교장 '48. 2. 통위부 참모총장, '49. 6. 제8사단장 '50. 6. 제2사단장, '50. 10. 제3군단장 '51. 8. 교육총장 '51. 9. 휴전회담 대표, '52. 1. 제1군단장 '54. 2. 합참의장, '56. 6. 참모총장 '59. 8. 대장 예편 ※ 국군 군번 '1'번 : 당시 군번은 '조선경비대 입소 선착순 1번'을 의미했음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5월께는 내가 지휘한 8사단뿐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이다. 8사단의 경우 1950년 3월-5월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이호재 부대의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던 중 생포한 포로들이 심문결과 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 남침을 거듭 예고했기 때문에 이 정보를 육본에 수차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둘째,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이동이다.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이다.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친 전후방 부대 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적정이나 지형은커녕 부하들의 신상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넷째,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6월 10일 이른바 <조국통일투사 체포사건>에 대해 평양 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행사 위협을 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6월 23일 김일성이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 자정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점이다. 좀더 부연 설명하자면 북한측은 남북협상을 위해 특사 3명을 파견할 것이니 남측에서 메시지를 받으라 했다. 남한측은 이들을 그날 38선 남방 1Km지점에서 맞아 메시지를 인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감시위원단에게도 수교할 문서가 있다면서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다. 우리 경찰들이 이들을 체포했는데 북측은 즉각 석방하지 않으면 강력한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남북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는데도 육본은 6월 24일 자정부터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한 것이다. 다섯째, 이런 위기상황에서 육본은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 열렸다. 육군 장교클럽 낙성파티를 연다고 전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참석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나도 초청장을 받았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엉뚱한 것이어서 불참했다. 일곱째, 적의 남침이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군사적 기초상식을 깬 작전지도였다. 여덟째,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6월 25일-27일 우리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중이던 국군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했다면 육본은 그들을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케 해 다음 작전에 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홉째, 우리측의 한강교 조기폭파다. 전술의 원칙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우리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에 국군만 믿고 있는 많은 시민, 그리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폭파했다. 더구나 대통령, 정부 고관, 육군 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이남으로 도피한 뒤,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하책이며 반역행위였다. 열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한강교를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그때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는데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미리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6·25초전의 패배 책임을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미국의 오판이 가장 컸다. 미국은 애초부터 싸우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다. 특히 1950년 1월 21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공표한 것은 적에 대한 초대장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국군 수뇌부의 잘못이 간과될 수는 없다. http://www.aspire7.net/reference/62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