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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 시신 본 의사, 낡은 혁대에 "설마…"[조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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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 시신 본 의사, 낡은 혁대에 "설마…"[조인스] 기사입력: 10.26.09 08:34 박정희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특히 모내기 때 농부와 막걸리를 들이켜는 사진은 인간 박정희의 대표적인 초상화다. 냉혹한 혁명가 박정희는 총 쏘는 걸 좋아했다. 1971년 청와대 지하사격장에서 박 대통령이 권총을 쏘고 있다. 냉혈적인 권력 의지가 읽혀지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박정희 몸속에는 이란성(二卵性)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총을 좋아한 냉혹한 혁명가다. 다른 하나는 서민의 가난 탈출을 꿈꾸고 서민과 어울렸던 막걸리형 인간이다. 박정희는 한국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수단으로 총과 개발독재·장기집권을 택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위해(危害) 요인을 냉혹하게 제거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와 독재는 자신의 영화(榮華)를 위한 게 아니라 근대화 혁명이라는 게 많은 학자의 평가다. 1960~70년대는 국민 대다수가 서민이었으며 박정희 혁명의 성공으로 많은 서민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독재였지만 박정희·육영수는 필리핀의 마르코스·이멜다와 달랐다. 청와대엔 ‘3000켤레 구두’ 대신 파리채와 벽돌이 있었다. 박정희는 전기를 아끼느라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았고 파리채로 파리를 잡았다. 욕실 변기 물통엔 벽돌이 들어 있었다. ◆냉혹한 혁명가=박정희는 권력에 대한 위협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대표적인 게 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이다.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은 그의 심복이자 육사 8기 핵심이고 군내 하나회의 대부였다. 그가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박 대통령 ‘노쇠’ ‘후계’ ” 운운했다. 박정희는 이런 누수(漏水)를 방치하면 권력 체제가 흔들린다고 판단했다. 윤 장군을 비롯한 군인·민간인 수십 명이 보안사에 끌려가 혼이 나고 감옥에 가거나 옷을 벗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3공 최대의 권력 사건은 6년 후 부메랑이 되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되찾으려 4개월 후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했다. 일본에서 이를 목격한 친북 재일동포 문세광은 74년 8월 박 대통령과 육 여사를 쏘았다. 육 여사가 죽었다. 박종규가 물러나고 차지철이 새 경호실장이 됐다. 유신체제 말년 아내가 없는 박정희는 지치고 힘들었고 이 공백을 차지철이 장악했다. 차지철의 권력이 유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고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쏘았다. 이에 앞서 71년 가을 공화당에는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을 주축으로 하는 4인 체제가 있었다. 이들은 박 대통령이 임명한 오치성 내무장관을 국회에서 해임해버렸다. 정보부는 의원 20여 명을 끌고가 모진 수모를 주었다. 김성곤은 의원직을 잃었고 평생 박정희에 대한 두려움에 떨다 생을 마감했다. 독재의 집행기관은 정보부·보안사·검찰·경찰이었다. 이들은 독재체제를 위해, 어떤 때는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인권을 탄압했다. 남미독재만큼은 아니지만 적잖은 이가 사법살인과 고문·수배·투옥을 당했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인혁당 재건위 8명이다. 이후락에 앞서 정보부장을 했던 김형욱은 박정희의 심복이었다가 그를 배반했다. 79년 김재규의 정보부는 그를 파리로 유인해 청부업자를 시켜 살해하고 시신을 낙엽더미에 묻었다. 박정희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독재자 박정희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안보를 지키는 데 냉혹했다. 예술이나 학문활동도 안보라는 공동체 윤리 속에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67년 독일과 프랑스에 있는 예술가·유학생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었다. 작곡가 윤이상 등이었다. 박정희는 정보부를 시켜 이들을 한국으로 납치했고 정보부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서민에게 다가간 사람=“구미 보통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추석 전날이라고 학교에서 오전수업만 하고 집에 보내줬어. 20리 길을 걸어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떡 치고 전 부치는 냄새가 마을 전체에 진동하는 거야. 구수한 냄새에 정신이 없더군. 그런데 정작 우리 집에 들어섰는데 아무 냄새도 없고 썰렁하더군. 시무룩한 얼굴로 부엌을 기웃거리는데 형수가 앞마당의 홍시 하나를 쥐여줬어. 나는 눈물을 참았어. 그날의 슬픔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 박정희는 생전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가난과 서민은 혁명의식의 출발점이었고 가난 구제는 독재를 위한 중요한 명분이었다. 북한은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야당지도자(김대중)는 향토예비군을 없애자고 하고, 자원은 없고, 교육은 부족한 그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면 독재가 불가피하다고 그는 믿었다. 박정희는 말년에 궁정동 안가에서 양주 시바스 리갈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가 사랑한 술은 막걸리였다.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는 “농촌에서 자란 박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어서 의미가 각별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거의 모든 물품에 국산을 애용했다. 양복·와이셔츠·혁대·구두·담배 등이었다. 외제는 만년필·넥타이·전기면도기 3개뿐이었다. 만년필은 국산회사를 자극하려 파커를 썼고, 넥타이는 당시만 해도 국산의 매듭이 자주 풀어져 할 수 없이 외제를 맸으며 전기면도기는 변변한 국산이 없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시신을 본 국군서울지구병원 의사는 넥타이핀 도금이 벗겨지고 혁대가 해져 있어 처음엔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러닝셔츠가 낡아 목 부분이 해진 걸 보았다는 전속 이발사의 증언도 있다. 박 대통령은 공고생·여공·버스안내양·농민 등과 어울리는 걸 즐겼다. 68년 어느 날 박 대통령은 마산의 한일합섬 공장에 들렀다. 박 대통령은 한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물었다. “공부 못한 게 한입니다. 영어를 모르니 감독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공은 눈물을 글썽였다. 대통령은 야간학교를 개설하도록 지시했고 수많은 여공이 졸업장을 땄다. 박정희라는 개인은 서민과 노동자를 아꼈지만 개발독재 체제 하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인권은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