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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드골 국제공항에서 온 편지-옮긴글
lakepurity

사진은 프랑스 드골대통령과 그의 무덤- 두메산골에 일반 시민들과 같이 묻혀 있다. 파리 드골 국제공항에서 온 편지 [손충무 칼럼] ‘김대중은 光州 5.18 묘역에 안장되어야 DJ 다운 것이다!’.. [김대중x-파일] 행동하는 양심이 돈 좋아하는 욕심쟁이 양심으로 변해 ▲ 프랑스 드골대통령과 그의 무덤- 두메산골에 일반 시민들과 같이 묻혀 있다. (손충무 칼럼) 오늘(25일) 새벽 프랑스 파리 드골 국제공항에서 귀한 E-mail 하나가 칼럼자에게 도착했다. 이메일을 보내주신 분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은퇴한 예비역 영관장교 출신 유흥주(한미자유연맹 총재) 선배이다. 70 이 훨씬 넘은 선배가 유럽에 출장을 가면서 드골 국제공항에서 잠시 쉬는 사이 노트북을 폈다가 한국 소식과 함께 ‘김대중-죽어서도 편안하게 눈 감지 못할 것 같다’(손충무 칼럼- 2009, 5.22일)는 칼럼과 ‘김대중 국장, 현충원 안장 결정취소 가처분 신청’ 기사(2009.8.25일)를 보고 느낀바 있어 보내온 글이었다. ‘손충무 발행인에게-’ 병원에서 퇴원하여 아직도 완쾌하지 못한 몸인데도 밤을 새우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左派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뜨거운 심장으로 쓰는 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태어 드리기 위해 이곳 파리 드골공항에서 mail을 보냅니다. 드골 국제공항에는 여기 저기 프랑스의 영웅, 드골 전 대통령의 모습들이 많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드골 대통령이 남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지막 유언은 가슴과 머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저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하는 편지를 그림과 함께 보내 왔다. (별도 기사 참조)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 서거와 유언 제2차 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드골 대통령의 逝去(서거)가 생각 납니다. 그는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 과 함께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參禮 (참예) 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그러나 “2차 대전 전쟁터를 누비며 프랑스 해방을 위하여 함께 싸웠던 戰友(전우)들의 참예는 하도록 하라”고 허용했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 성당에서 영결식을 가졌으나 대통령과 장관들은 영결식장에 가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묵념을 올리고 기도했다. 드골 전 대통령은 자신이 사랑했던 장애자였던 “딸의 무덤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뿐 아니라 “내가 죽은 후 묘비를 간단하게 하라.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만 쓰라”고 했다. 그래서 드골 전 대통령의 묘비에는 -Charies de Gaulle-1890-1970-만 적혀 있다. 그리고 드골은 태통령 퇴임 후 정부가 지급하는 퇴임 대통령과 그 가족들에게 지급하는 연금도 받지 않았다. 드골은 “그 돈은 불쌍한 국민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했다. 그에 따라 정부는 드골 퇴임 후 본인은 물론 서거 후 미망인, 가족들에게 나가는 연금도 무의탁 노인들과 고아원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신탁기금에 보내 사용하고 있다. 드골 대통령의 가족들은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드골 대통령이 출생하고 은퇴 후 살던 生家(생가)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 그 저택을 팔았다. 그 저택은 어느 재벌이 구입, 정부에 헌납하여 지방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해 드골 기념관으로 관리하고 있다. 세계 유명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 알아 본즉 드골 같은 분들도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파리 드골 국제공항에서-유흥주) ‘나라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모습이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과 장.차관을 지낸 고급 공무원들, 軍 장성들, 국회의원들의 퇴임 후 모습을 상상해 보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한국 경제를 부흥 시킨 박정희,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을 제외한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국민들은 ‘도둑놈들’ 이라고 말한다. 두명의 ‘도둑놈들’ 가운데 그래도 노태우 씨는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털어 가며 법원에서 판결한 추징금을 국가에 내고 있다. 노태우 씨는 지금 병석에 누워있는데 그의 생명도 그리 길지는 못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눈을 감기 전에 추징금은 모두 내어 도둑놈 소리는 듣지 안으려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통장에 25만원 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배 째라’ 하고 버티고 있다. 검찰도 전두환 씨의 추징금 징수를 위해 열심히 추적하고 있으나 어디에다 감추었는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軍人 출신 대통령들 이후에 탄생된 민간인 출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떤가? YS에 대해서는 부정축재를 했다는 소문이 별로 없으며 ‘도둑놈’ 소리는 듣지 않는다. 본래 YS는 정치자금이 들어 오면 절대로 자신의 주머니에 넣지 않고 자금 담당에게 넘긴다. 그래서 YS 에게는 “정치자금은 오른쪽 손을 통해 받아 왼쪽 손으로 넘긴다”는 말이 있다. YS는 여자 문제는 말이 많지만 돈에 대해서는 별로 흠집이 없는 편이다. 아들 현철 씨의 부정스캔들 때문에 한때 국민들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으나 김대중 만큼 더러운 비난은 받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도둑놈-, 날강도 같은 치사한 놈” 소리를 듣는다. 김대중은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현찰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과 그 가족들은 돈을 밝히는데 천재적인 두뇌를 갖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아 다니고 있다. 그런 소문이 나도는 이유는 3명의 아들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부정부패 스캔들에 얽히어 감옥을 갔다 왔다. 큰 아들 김홍일은 대우 김우중 회장이 3대의 중형 트럭에 100만원 다발을 가득히 실어 전달했다. 그래서 53평 아파트 천정에 닿을 정도로 2개의 방에 가득히 채우고 그래도 남아 베란다에 쌓아두어 비에 젖기도 했다. 둘째아들 김홍업은 100만 원짜리 돈 다발이 든 사과박스를 아파트 베란다에 산더미 처럼 쌓아놓고 살다가 검찰에 압류당했다. 셋째아들 김홍걸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최고급 주택지에 거대한 호화주택을 구입 호의호식을 하여 매월 8,500만원의 호화판 생활을 하다가 이신범 전 국회의원의 폭로로 발각이 났다. 그래서 국내로 돌아갔으나 곧이어 발생한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어 감옥을 가야 했다. 김대중은 스위스와 미국에 3억 달러 이상을 빼돌려 놨다고 해외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데 북한 언론들은 김대중이 “미국과 스위스에 20억 달러를 빼돌려 놨다”고 보도했다. 김대중의 측근인 박지원, 권노갑, 김대중의 처조카 이형택, 박지원의 측근 김영완은 뉴욕에 수천만 달러짜리 아파트와 콘도를 몇 개씩 갖고 있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죽은 김대중이 가장 많은 현금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의 돈에 대한 욕심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래 전 부터의 이야기다. 김대중의 돈 욕심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전 KCIA 부장 김형욱에게 70년대에 3,000만원을 받았다. 당시의 3,000만원은 지금의 300억 원에 달한다. 또 80년대에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20억 원을 받아 당에 내고 선거하는데 사용했다”고 오리발을 내 밀었다. 김대중은 1968년 6.8 선거 때 부터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무더기 공작금을 받았으며 1971년 대통령 후보가 된 다음 일본 도쿄 신쥬쿠 프린스 호텔에서 당시 조총련 국제국장이며 훗날 북한 부주석이 된 김병식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 당시 20만 달러는 지금의 2,000만 달러에 해당한다. 김영삼과 대결하여 낙선했을 때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한밤중에 몇 개의 트렁크에 달러를 가득히 채워 전달했다. 그 돈으로 영국에 나가서 그때부터 노벨상 공작을 벌였다. 1982년 미국에 망명해 있을 때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보내주는 돈을 받았으며 김일성이 일본의 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을 통해 보낸 돈을 받았다. 김대중은 돈에 대해서는 반대 당의 정적에게서도, 김일성에게서도, 일본 조총련에서도 주는 돈은 모두 허겁지겁 받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대중은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으로 부터 大海(큰 바다)보다 더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다. 김대중이 김일성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공작금을 평생토록 받아썼으면 김정일이 공개석상에서 연설을 통해 말했겠는가? “大海 보다 더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으니까 아마 태평양 바다 만큼의 돈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드골 대통령,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도 거절 사회복지 사업에, 고향땅 딸 무덤 옆에 묻혀 드골 전 대통령은 국가가 전직 대통령에게 지급하는 연금도 거절, 가난한 국민들에게 보내 주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살던 집을 관리할 능력이 없어 생가를 매각했다. 그러나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후 모두 대궐 같은 집을 지었다.(이승만, 박정희, 윤보선, 최규하 제외) 시초가 전두환이었으며 뒤이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까지 하나 같이 호화판 집을 지었다. 그들 가운데 김영삼 씨 집이 제일 규모가 적을 뿐 김대중, 노무현의 집은 궁궐이다. 김대중의 집에는 2층까지 다니는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했으며 노무현의 집은 ‘봉하궁전’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프랑스의 영웅, 2차 대전의 영웅ㅡ드골과 한국 대통령들의 차이 점이다. 드골은 자신의 장례식을 소박하게 ‘가족장’으로 하도록 유언하고 고향의 딸 무덤 옆에 묻혔다. 그러나 김대중 가족들과 추종자들은 법에도 없는 ‘국장’으로 해달라고 생떼를 썼다. 견디다 못한 이명박 대통령이 “통합 과 화해의 정신으로 국장”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했다. 그 바람에 DJ를 싫어 하고 반대하던 국민들이 분노하고 들고 일어섰다. 애국시민 단체 회원들은 ‘국장’ 반대, 현충원 안장 반대 시위를 장례기간 동안 계속 했다. 50여 개 시민단체 대표들은 연명으로 법정 대리인을 내세워 ‘국장’결정 취소, 현충원 안장 결정 취소 가처분 신청’ 법정 소송을 제기 했다. 전직대통령의 ‘국장’이 역사상 처음인데 ‘국장’ 결정, 현충원 안장 결정취소 가처분 행정소송도 처음이다. 살아 생전 나라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敵國의 두목인 김정일에게 8억 달러를 상납하여 핵과 미사일을 개발 하도록 만들고 ‘낮은 단계로의 연방제’에 찬성, 자유 대한민국을 김정일에게 넘겨 주려던 매국노, 利敵 행위자의 죽음을 ‘국장’으로 하고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에 안장함으로써 애국자와 반역자의 차별을 없애 버렸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분노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정부가 영결식 날 김대중의 죽음을 슬퍼해 弔旗를 달도록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모든 매스컴이 죽은 김대중을 영웅, 미화시키는데 총력을 쏟았으나 전라도를 제외한 지역의 국민들은 냉담했다. 강원도와 충청도는 관공서를 제외한 시민들의 집에 弔旗를 단 것은 2%도 안되고 대구, 부산, 경상도 지방에서도 2.5%도 안됐다고 한다. 90% 이상이 조기를 단 호남과 70% 정도 조기를 단 전북지방을 합쳐 전체 5% 미만 이라고 한다. ‘국장’을 해 달라고 생떼를 쓴 DJ의 가족들과 추종자들, ‘국장’을 허가한 이명박 정부는 분명 큰 실수를 했다. 그로 인해 DJ는 더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듣고 있으며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호국영령 가족들과 애국 시민단체들이 김대중 묘를 파 헤치려는 싸움 때문에 상당기간 동작동 국립묘지는 소란해 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국장’을 승낙하고 현충원 안장을 승낙한 이명박 대통령도 상당기간 비판과 비난을 받을 것이다. DJ의 장례는 가족장이나 국민장으로 조촐하게 치르고 광주 5.18 희생자 묘역에 안장 됐다면 영원히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평생토록 입에 달고 다니던 애국자, 민주화의 일꾼, 행동하는 양심의 대변자 소리를 들을 수 있을텐데… “이제는 죽어서도 욕심 많은 양심”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 것이다. ㅁ 손충무-국제저널리스트.www.usinsideworld.com- 편집인 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