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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하루전 "인생은 한번왔다 한번 가는....." -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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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아파트 한번 더 점검해야 월동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박정희의 서신 리더십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거대한 인생'을 잘 농축하고 있는 것이 그가 남긴 편지들이다. 정조 서찰 299통이 무더기로 발견된 뒤 최고 권력자들의 서신 정치가 관심을 끄는 가운데, 중앙 SUNDAY가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서신들을 분석했다. 이하 기사 전문. 포철(현 포스코) 성공 신화의 버팀목이 됐던 빛바랜 종이 한 장이 남아 있다. 여기엔 이런 구절이 있다. “㉮포항종합제철이 기계 제작 및 공급업자를 수의(隨意)대로 선정 가능하도록 한다. ㉯…간편계약을 시행했을 시 정부에서 이를 보증해 준다” 등이다. (편지1) 1970년 2월 2일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박 전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적은 메모지 왼편 위쪽에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임금에게 받은 둥근 마패를 내밀며 탐관오리를 제압했듯 ‘종이 마패’는 갓 태어난 포철이 보수적인 경제관료에게 구애받지 않고 소신껏 설비를 구매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박 회장은 “60년대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도 수차례 친필 서신을 보내 ‘공부 잘해서 조국 근대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격려하시곤 했다”고 회고했다. 1970년 2월 2일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적은 마패 편지. 왼편 위쪽에는 바로 다음 날짜의 박 전 대통령 친필 서명이 있다. 박 사장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박 전 대통령의 배려가 엿보인다. 포스코 신화 뒷받침한 ‘마패 편지’ 박 전 대통령은 서찰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가 남긴 편지가 모두 몇 통이나 되는지 파악할 길은 없지만 측근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당한 분량의 친필 서한이 각계각층에 전달됐다. 기자가 유족의 협조를 받아 살펴본 민관식 전 장관의 유품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편지 다섯 통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 부속실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은 구체적인 업무 지시는 물론 그때그때 떠오른 정책 아이디어들을 메모지에 적은 뒤 관료들에게 보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고초를 겪었거나 권력 변방으로 밀려난 음지의 인사들에게도 자주 편지를 보내 위로의 말을 전한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다. 각지게 뚜벅뚜벅 써 나간 글씨체에서는 풍운아 같은 힘이 느껴진다. 대구사범학교 시절 배운 글씨에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의 지도를 받은 그는 독특한 서법을 구사했다. 주변에서는 “글씨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殺氣)마저 비친다”며 ‘사령관체’라 부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있어 친필 서신은 절대 권력자의 의지와 관심을 대내외에 천명하며 파워 엘리트들을 장악하는 강력한 리더십의 수단이었다. 김용환 전 장관은 “박 전 대통령의 열정은 20%가 계획 수립에 쓰였다면 나머지 80%는 실천하는 데 사용됐으며, 편지는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78년 4월 28일 박기석 당시 도로공사 사장에게 보낸 편지는 박정희식 치밀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 관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10주년이 되는 1980년 7월 7일에 발간을 목표로 지금부터 그 자료를 수집 정리하도록 하시오.…그렇게 하자면 지금부터 편집기획을 수립하여 준비를 시작하고 1979년 말까지는 일반 원고가 대략 완료되어야 할 줄 생각합니다.” 70년 9월 19일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보낸 편지(2)에서는 서민들의 겨울나기를 걱정하는 세심함이 묻어 나온다. 71년 2월 25일 최명헌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3)에는 “귀하가 보내주신 금액은 금번 3·1절을 기하여 선열유가족 중 극빈자를 조사한 결과 기(其) 중에 7세대가 판자집 또는 남의 문간방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 이 분들을 위하여 집을 하나씩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보람있게 사용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원호처장에게 전달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조국은 ‘방가(邦家·국가의 다른 표현)’다. 8·31 사채 동결조치를 잘 마무리하라는 밀명을 받고 72년 3월 상공부 차관에 임명된 김용환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에게도 “방가를 위하여 더욱 큰 성공을 빌며”라고 쓰인 편지(4)가 건네졌다. 겉봉투에는 ‘친피(親披)’라는 단어를 써 넣어 개인적인 서신임을 강조했다. 편지(5)는 76년 쓴 ‘신행정수도 위치 선정 고려사항’. ‘부산 수영공항 관리 지극히 불량’ 양택식 전 서울시장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에도 그의 강력한 실천 의지와 세밀함이 녹아 있다. 70년 9월 그는 “서민아파트의 점검이 일단 끝난 듯하오나 장마가 지나고 월동에 앞서서 다시 한번 전반적인 점검이 있어야만 월동에 념여(염려)가 없을 듯합니다”라고 적어 보냈다.(편지2) 가을 초입에 서민의 겨울나기까지 걱정하는 세심한 모습은 그가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절대 권력자였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든다. 한 달 뒤 양 전 시장은 다시 편지를 받는다. “서울시내 가로수 중에는 6·25 직후 당시 시당국에서 깊은 연구도 없이 임시로 심어 둔 포푸라(포플러) 등 미관상으로도 보기 흉하고 부적한 것이 많이 심어져 있는데…”라며 가로수 개선을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양 전 시장은 이보다 3년 전 경북지사 시절에도 친필 서신을 받았다. “월성군 입실역에서 울산으로 가는 기차로 약 1㎞쯤 가면 동측에 사방(砂防) 상태가 지극히 불량한 산이 보일 것입니다.…형편없던 산이 저처럼 훌륭하게 사방이 잘되었구나 하는 소리가 나오게끔 연내에라도 즉시 착수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을 희망합니다.” 형식적인 행정을 질타하는 경고성 서한도 보인다. 교통부 장관에게 보낸 서신은 신랄하다. “부산 수영공항 사무소 내부시설의 유지 관리 상태가 지극히 불량합니다.…책임자들이 전연 관심이 없거나 태만하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기(其)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일례를 든다면 화장실의 청소가 되어 있지 않거나….” 70년 1월 9일 농림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는 농산물 가격 안정을 강조하며 “매년 이 문제는 문제가 생기면 떠들다가 그 시기가 지나면 또 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금년은 연초부터 근본 대책이 세워져야 할 줄 압니다”라는 질타를 담았다. 국토 개발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관심과 전문적인 식견이 담겨 있는 서한도 적잖다. 73년 11월 24일 작성된 ‘유휴토지(산지) 개발 촉진’이란 메모는 미개발 상태에 있는 전국 야산의 관리 방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섯 장에 걸쳐 정리해 내려보낸 것이다. 마을 지형도까지 직접 그리며 개발의 방향을 구상하고 있다. 국토 재편 구상의 ‘결정판’ 격인 행정수도 이전 계획도 서한으로 구체화됐다. 행정수도 구상 공식화(77년 2월 10일)보다 8개월 전인 76년 6월 그는 새 수도 후보지에 관한 기준 10가지를 꼼꼼히 적어 보냈다. ‘1. 현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와 비등하거나 약간 거리가 먼 곳(남방으로) 8. 20∼30분 거리 내에 좋은 비행장이 위치한다면 이상적이다’ 등이 그것이다.(편지5) 안내양 방한복 만든 사장에 감사 편지 위로나 격려를 담은 사신(私信)은 주로 핍박받고 소외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37세에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으로 발탁할 만큼 박 전 대통령이 아꼈던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는 “잘나가는 사람보다는 주로 변방으로 밀려났던 사람을 많이 챙겼다”고 회고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김연준 한양대 창립자, 반혁명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에게도 위로서신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들의 고초가 자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음에도 서신을 통해 위로하는 ‘박정희식 정치 공학’은 김형욱·최홍희 등의 변심으로 충격을 받은 뒤 더욱 두드러졌다. “방호(訪濠) 여행 준비 관계로 면담의 시간을 내지 못하여 미안합니다”(68년 민관식 당시 대한체육회장에게 보낸 편지)라는 식의 겸손함도 곳곳에서 보인다. 69년 7월 18일에는 장택상 전 총리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에 위로 편지를 보냈다. 78년 2월 2일 편지의 수신자는 ‘권태흥 ㈜태흥 사장’으로 돼 있다.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복 제작을 맡은 회사 사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서한들은 상당수가 금일봉과 함께 전달됐다는 것이 당시 인사들의 증언이다. “여비 약소하오나 소납(笑納·기쁘게 받음) 앙망합니다” 같은 구절이 자주 나온다. 원호처장에게 쓴 서신에는 청룡부대 복무 중 숨진 병사의 모친 병원비를 전달하며 “여사 생계 문제에 대하여도 대책을 세우시면 나도 가능한 조력을 하겠습니다”고 썼다. 돈과 권력이 함께했던 정경유착의 그늘도 보여준다. 서한 곳곳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상당한 액수의 정치자금을 거뒀고, 이를 지지 기반 유지에 활용했음이 암시돼 있다. 79년에는 민관식 전 장관이 만든 아세아정책연구소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거금인 3000만원을 보내는 메모지도 남아 있다. 10·26 직후 신군부가 압수수색한 청와대 비서실장 금고에서 나온 돈은 알려진 것만 9억5000만원에 달한다. “우리 지만이 만세!” 대통령 이전에 그는 아버지였다. 막내 아들 생일을 축하한 75년 12월 15일 편지에는 1년 전 유명을 달리한 아내(육영수 여사)를 그리워하는 권력자의 고뇌 어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지만이에게! 우리 지만이의 17회 생일을 충심으로 축하한다. 명년은 고3에 진학하게 되고 또 대학입시 준비에 전력을 경주해야 할 해인 만큼 더욱 더 몸을 튼튼하게 하고…너의 어머니께서도 오늘 먼-나라에서 지만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아버지와 꼭 같은 당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다시 한번 지만이의 생일을 축하하면서우리 지만이 만세!” 10·26 하루 전 그는 운명을 예감하는 듯한 편지를 남겼다. 총무처 장관으로 재직 중 간암으로 별세한 심의환씨 부인 앞으로다. “인생은 원래 무상한 것이고, 회자정리라고 하였으니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것은 정한 이치인 줄 알면서도….” 윤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