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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혁명(역사속에서)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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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경기 수원 농촌진흥청에 모인 사람들이 쌀 3000만석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농촌진흥청 제공 녹색혁명… 수천년 굶주림에서 벗어나다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34] 통일벼와 식량 자급 유석재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 2008.07.22 02:48 / 수정 : 2008.07.22 06:08 '녹색혁명의 주역'인 김인환 농촌진흥청장을 인터뷰한 1978년 5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 '보릿고개'란 양력 5~6월쯤이면 가을에 걷었던 식량은 바닥이 나고 여름 곡식인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어려운 사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1970년대 들어 그 말이 과거의 유산으로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적극적인 식량 증산의 노력이 있었다.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겼던 대통령 박정희는 1960년대 중반 신품종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 농촌진흥청이 동남아 신품종을 개량해 내놓은 새로운 볍씨의 재배가 시작됐다. 정식 명칭 IR667-98-1-2인 이 벼를 사람들은 '통일벼'라 불렀다. 보통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가 보통이었고 200~300개가 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못자리 때 싹이 안 터서 울었지만 엄청나게 벼를 쏟아내는 걸 보고 웃었다"고 말했다.(제1회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당선자 이완주씨 증언) 통일벼는 점차 '한국 토양에 적합한 다수확 품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됐고, 1972년 16%였던 보급률은 1977년에 55%까지 늘어 쌀 증산의 견인차가 됐다. 쌀 생산량은 1974년 3000만석을 돌파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自給)이 달성됐다. 쌀 4000만석을 돌파한 1977년에는 전국 벼 평균수량이 1000㎡당 494㎏으로 '단군 이래 최고 수량'을 기록했다. 이 무렵 동남아 국가들이 신품종을 개발해 식량을 증산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대한민국도 이뤄내게 됐던 것이다. 통일벼는 그 후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급이 중단돼 후속 품종들에 임무를 넘겨 줬다. 1974년 경기 수원 농촌진흥청에 모인 사람들이 쌀 3000만석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농촌진흥청 제공 녹색혁명에는 새마을운동과 4대강 유역 종합개발을 통한 농업생산 기반 구축이 큰 역할을 했다. 1972년 수립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이었던 4대강 유역 종합개발은 소양강댐(1967~1973), 안동댐(1971~1976), 대청댐(1975~1980) 등을 건설해 홍수의 피해를 줄였고, 논의 대부분을 가뭄 피해가 없는 수리안전답으로 바꿨다. 녹색혁명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비로소 수천 년 동안의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쌀에 이어 고기마저 웬만큼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