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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동무가 꿰뚫고 있는 대한민국(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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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지도자 동무가 꿰뚫고 있는 대한민국 ▲ 강천석·주필 첫 번째 이야기다. 최고 권력자는 그를 믿었고, 그도 최고 권력자를 숭배했다. 믿지 않고서야 오가는 문서와 주고받는 편지까지 반드시 그의 손을 거치도록 했을 리 없다. 은밀한 개인적 사생활의 일정까지 챙기게 할 정도였다. 숭배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하루 24시간을 몽땅 최고 권력자에게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에는 그게 다 최고 권력자의 인간적 흡인력(吸引力)의 증거로만 비쳤다. 출생의 사연부터 시작해 민주화 투쟁과 긴 망명, 최고 권력을 향한 거듭된 도전과 잇따른 좌절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권력 쟁취에 이르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엮어내는 그의 인생 자체가 그만큼 극적이었다. 불 꺼진 마음에도 단번에 다시 불꽃을 튕기게 만들 수 있는 휘황한 연설솜씨, 권력을 쥐자마자 냉전과 분단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민족 화해로 나아간 실천력도 그랬다. 노벨평화상은 이 당대 정치 드라마의 명우(名優)에 합당한 대접이랄 만했다. 이 최고 권력자의 그림자인 수행비서가 1974년 4월 24일 돌연 체포됐다. 간첩죄였다. 그가 긴 세월 진짜로 봉사한 대상은 그가 모시던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그 권력자가 민족 화해란 이름으로 보듬었던 공산체제였다. 두 번째 이야기다. 72년 4월 27일 국회의장은 총리 불신임 결의안 부결을 선포했다. 2표 차이였다. 백중한 여야(與野) 의석 분포에서 집권당 내부마저 반기(反旗)를 들고 일어났던 때다. 기적의 주역은 집권당 원내총무였다. 돈이 기적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국회조사위원회는 ‘증거 없음’이란 결론을 내렸다. 20년 후 그는 재판정에 서서 2년 6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간첩죄였다. 붕괴 후 드러난 공산정권 국가안전부 기록에는 30년 넘게 이어진 접선의 역사와 함께 20년 전 동방정책의 지속을 위해 불신임 결의를 막아달라며 전했던 공작금 건(件)도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이야기다. 야당 당수도 안전지대에 있지 못했다. 야당 당수와 그의 정치자금줄인 재벌을 잇는 연락책이 간첩이었다. 그것도 30년 동안 1200건의 정보를 올렸던 정예 요원이었다. 야당이 집권하자 그의 가치는 단박에 특(特)A로 뛰어올랐다. 그가 간첩죄로 재판정에 선 건 1995년이었다. 징역 2년, 거기에 집행유예가 따라붙었던 것은 통일 이후 간첩죄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진 덕분이었다. 네 번째는 80년대 미국의 핵 미사일 배치 계획을 두고 맹렬하게 펼쳐졌던 반핵운동 이야기다. 소련은 몇 년 전 이미 이 지역에 SS-20 핵미사일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81년 어느 반핵집회의 청중석에서 강연자인 한 목사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국 미사일 배치 계획을 규탄한다면서 왜 이미 배치된 소련 미사일에 대해선 말이 없는가” 이 목사님은 “소련 전략가들은 무신론자(無神論者)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되받았다. 공산정권 국가안전부와 그 목사와의 최초 접촉 기록은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다섯 번째는 우리 귀에도 익숙한 ‘내재적(內在的) 접근법’의 이야기다. ‘내재적 접근법’은 공산체제는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체제 내부의 논리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의 창시자는 자유민주적 잣대를 공산체제에 들이대는 것은 불공정·부정확·불합리한 처사라고 했다. 이 방식으로 연구하려면 공산정권이 제공한 홍보성 자료가 필수품이 될 수밖에 없다. 내재적 접근법의 희극적 성과의 대표 케이스는 몇 년 안 돼 붕괴될 이 공산국가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고 주장한 논문이다. 국가안전부 문서에는 77년에 자살한 이 내재적 접근법 창시자 및 그의 연구소와 접촉했던 시간이 촘촘히 기록돼 있었다. 이제 이야기 주인공들을 밝힐 차례다. 순서대로 하면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수행비서 귄터 기욤’ ‘사민당 원내총무 칼 뷔난트’ ‘기민당 당수 헬무트 콜과 아돌프 간터’ ‘고백교회 목사 헤르베르트 모갈스키’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 교수 크리스티안 루츠’다. 70년 서독판(版) 햇볕정책인 동방정책의 출발에서 89년 동독 붕괴에 이르는 독일현대사를 다시 뒤적이면 등골이 서늘해온다. 유럽 최강의 방첩망(防諜網)을 자랑하던 서독에 그 시절 2만명에서 3만명 정도의 동독 첩자가 들끓었다면 우리의 지금은 어떨까. 북(北)의 지도자 동무 역시 진즉부터 자신들의 핵실험 이후 갈팡질팡하는 우리 정부의 얼굴을 손금 들여다 보듯 꿰뚫고 있었으리라. 강천석·주필(2006년 10월14일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