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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sarang_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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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忠報國 滅私奉公 -- 박정희가 썼다는 혈서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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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忠報國 滅私奉公 -- 박정희가 썼다는 혈서의 진실은? (저 밑에 안도라님이 조갑제가 쓴 박정희 전기를 읽고 잇다는 말을 했는데 박정희에 관한 많은 기록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이고 상세한기록은 조갑제의 기록입니다 조갑제가 박정희를 미화했고 영웅화했다고 알고있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조갑제의 기록을 읽어보면 조갑제가 그 많은 분량의 전기를 쓰면서 자기의 감정을 실어서 기록한 부분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록의 전부다가 박정희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지요 최근 여러군데에서 논란이 되고있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때 썼다는 혈서의 진위에 관해서도 조갑제의 기록이 가장 맞다고 보여집니다 아래는 그 혈서에 관한 조갑제의 기록입니다) 조갑제 이 연재기사를 쓰는 동안 독자들의 제보와 충고가 하루에도 수십 건 씩 들어오고 있다. 기자는 이 박정희 전기는 그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았 던 독자들과 함께 쓰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7일 오전에도 한 독자분이 "박정희 선생과 함께 문경보통학교에서 근무했던 유증선 선생께서 생존해 계신다"고 알려왔다. 서울 강남구에 살고있는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그 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 의 증언을 요약해본다. '내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은 1938년 4월초로서 박정희 선 생이 근무중일 때였다. 나의 아내는 임신중이라 친정으로 보내고 하숙 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학교 숙직실은 박정희 선생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생의 양해를 얻어서 한 방에서 동숙했다. 당시 나는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쌀 반 가마에 불과한 월급이었다. 생활비 를 줄이려고 시작한 숙직실 생활은 아리마 교장이 개입하면서 중단되었 다. 그는 점잖게 '숙직실은 숙직교사들을 위한 것인데 두 분이 여기서 잠을 자면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짐을 싸들고 하숙 집을 구해서 내려갔다. 박 선생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숙직실에서 가까이 지낼 때 박정희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강직한 성품에서 나는 '이 사 람은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바로 대쪽 이었다. 남이 싫어하고 피하는 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일 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해치우는 것이었다.나 는 어떻게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신기했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나 를 옆에 세워놓고 기계체조를 해보였다. 그는 가볍게 철봉을 잡더니 '대차륜'을 하는 것이었다. 철봉에 매달려몸을 쉬지 않고 휘휘 돌리는 것이었다. 꼭 철봉에 붙어있는 것 같이 자유자재였다. 공부벌레들만 있 다고 하는 대구사범에서 저런 운동을 언제 배웠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 도 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들이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권 위를 지키는 것이 교육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선생은 반대였다.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 과 어울려 웃고 노래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유증선 할아버지는 안동교육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뒤 은퇴하였 다. 그는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느냐에 대해서 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증언을 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기질인데 문 제는 일본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 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 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 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 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에 있는 박선생의 기록과 호적이 서로 틀려 말썽이 생길 것 같았다. 나와 박 선 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 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 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 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 에 있던 학생 시험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 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 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 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주어서 그 혈서건이 신문 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가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 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등 몇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 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 에 없지"라고 했다. 그 직후에 우리는 교장의 지시로 숙직실을 떠나 하 숙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박 선생은 아마도 교장한테 다시 양해를 얻어 숙직실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숙직실에도 나폴레 옹 초상화를 걸어놓은 박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었다. 내 아들 유호문(66·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 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 이해 가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박 선생이 일 본인 교장과 싸우고 만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싸운 일이 없다. 내가 1939년 여름에 한 3주간 일본시찰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런 일이 있었다면 몰라도. 나는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로 떠날 때쯤, 즉 1940년 봄에 영주로 전근을 갔다.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에 긴 칼을 차고 문경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 가야 할 길을 갔 구나'하고 생각했다. 5·16혁명 직전에 그가 대구에서 2군 부사령관으 로 있을 때 만났더니 그는 영어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될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을 뿐이 다. 마지막으로 박 선생을 만난 것은 그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 내 아 들과 제자들도 함께 청와대로 초청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 통령은 "어? 대머리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여 좌중이 폭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