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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陽川) 허씨 집안의 다섯 천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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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호 칼럼

 
(909호에 이어)

‘그가 우리 편인가? 아닌가?를 우선시하면 상식은 종종 무시되고 판단은 흐려진다. 이것은 21세기에도 자주 보는 행태인데, 그러면 빛나는 이성이나 심오한 학식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중신입네 학자입네 하던 김성일이 임란 전 일본을 탐색하고 와서 거짓(?) 보고를 하다니! 그래서 무방비상태의 조선이 방화, 약탈, 살상, 납치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게 하다니! 

그가 당파심에서 그랬다면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을 받을 죄인은 바로 그였지 허균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 잘못을 덮으려고, 아니면 시기심에서 그의 패거리는 허 씨네의 문장을 싸잡아 “표절 작품”, “과격한 언사”라며 줄기차게 헐뜯은 건지도 모르겠다.

허 씨네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그들은 적서차별(嫡庶差別), 남존여비 등 불합리한 관습을 철폐하자는 인본주의자(人本主義者)였다. 양반 계급에 의한 독재체제가 굳어진 지 2백 년이 된 조선에서 그들이 품은 평등사상은 기득권자인 선비사회의 미움만 샀다.

그런데 허 씨네는 신념을 주장하면서 받는 손해쯤은 두렵지 않은 선각자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18세기 후반 천주교 전래 때 이벽, 이승훈, 황사영, 정약종, 남종삼, 강완숙 등이 새롭게 눈뜬 진리의 전파에 생명을 초개 같이 내던지던 모습과 닮았다.

초희(楚姬, 1563, 명종 18~1589, 선조22)는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부부 금실이 좋지 않았다. 분단장하고 화관(花冠)을 쓴 채 신선놀음하는 며느리를 못마땅해한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할 수는 없었다. 난설헌은 1579년에 딸을 잃고 1580년(18세) 부친이 객사했다. 1582년 아들을 잃었다. 1588년(26세) 귀양에서 풀려난 후 방랑하던 오빠(허봉)가 객사하였고 1589년(27세) 본인이 죽었다. 

1590년 균이 <난설헌집>을 출간했으며, 1606년 명의 주지번이 중국에서 <난설헌집>을 발간해 호평을 받았다. 여덟 살 때 그녀 자신이 하늘나라의 궁전 상량식에 초대받은 신선이라고 상상하여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과 몇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음미한다. 
 

보배로운 일산(日傘)이 드리워져 구름수레가 색상의 경계를 넘고/은빛 누각이 해에 비치니, 노을 난간이 미혹된 티끌세상을 벗어났다/신선의 나팔이 기틀을 움직여서 구슬기와 궁전을 짓고/푸른 이무기가 안개를 불어서 구슬나무 궁전을 지었다/… 엎드려 비나이다/이 대들보를 올린 뒤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게 하시고/아름다운 풀도 사철 꽃다워지이다/해가 퍼져 달이 빛을 잃어도 난새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을 누리시고/땅과 바다의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더욱더욱 오래 사시옵소서/은빛 창문이 노을을 누르면 아래로 구만 리 미미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시고/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 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 웃으면서 바라보소서/손으로 세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시고/몸은 구천세계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니소서.

채련곡(采蓮曲); 가을의 맑고 긴 호수에 벽옥 같은 물 흐르고/연꽃 무성한 곳에 목련배를 매었다네/임을 만난 반가움에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누가 보았을세라 반 나절이나 부끄러웠네 

추천(?韆); 이웃 동무들과 그네 뛰기 시합했었네/허리띠 질끈 매고 수건을 머리에 두르니 선녀가 된 것 같았네/바람 차며 오색 그네줄 하늘로 오른다/노리개 소리는 댕그랑 울리고 푸른 버들가지엔 아지랑이 피어났었네.

빈녀음(貧女吟); 얼굴 맵시야 어찌 남에게 떨어지랴만/바느질 길삼 솜씨도 모두 좋은데/가난한 집에서 자란 탓에/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오/가위 쥐고 옷감을 마르노라면/밤도 차가와 열 손가락 곱아오네/남의 시집갈 옷 짓는다지만/ 해가 바뀌어도 나는 독수공방이네.

곡자(哭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스러운 아들마저 여의었네/ 슬프고도 슬프다 광릉(廣陵) 땅이여/ 두 아이의 무덤이 마주보고 섰구나/백양나무에 소슬바람이 일고/소나무 숲엔 도깨비불이 번쩍인다/지전(紙錢을 불살라서 너희의 혼을 부르고/무덤에 술을 부어 제사를 지낸다/너희의 넋이야 서로가 오뉘임을 응당 알테니/밤마다 어울려 노닐겠지/내 뱃속에 또 한 아이가 있지만/어찌 그게 장성하길 바라랴/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고/피눈물을 뿌리며 흐느끼다 목이 메인다.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 남존여비라는 시대적 제약에 괴로워하던 난설헌은 그녀의 천재를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일찍 떠났다. 조선 여류시인들의 시가 음풍농월이거나, 꽃과 남녀 간의 사랑을 읊은 노래가 대부분이지만, 그녀의 시는 모든 인간이 공정한 처우를 받는 이상사회를 열망한 작품들이 많았다. 


시, 서, 화에 두루 능했던 초희는 죽기 전에 그녀의 많은 작품을 불사르게 했다. 이때 동생 균이 애를 써서 건져낸 작품이 213수였다. 430년 전의 조선에서 사회적 이익을 오롯이 향유하던 규중부인이 어찌하여 오늘날의 평등 개념에 필적할 개혁 사상을 품었을까? 놀랍기만 하다. 


 소중한 존재를 모두 여읜 초희는 <夢遊廣桑山(꿈속에 광상산에서 노닐다)>이란 시를 끝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芙蓉三九朶 紅墜月霜寒”(부용 꽃 스물일곱 떨기 늘어져/달밤 찬 서리에 붉게 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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