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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ced Retreat-강요된 휴식(3)
gigo

 

노삼열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석좌교수(은퇴))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캐나다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사이 한반도는 휴전의 긴장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재정치체제를 유지하고 굳혀가는데 좋은 토양이 되어 주었다.

 한편 정부의 단계적 경제계획은 보란 듯이 성공을 거듭했고, 서서히 서민과 중산층 국민들은 한강의 기적이 가져다 주는 경제적 열매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탄압과 언론과 표현의 자유 및 국민의 기본권을 많은 부분 포기해야 하는 불편함을 누르고 체제에 맞부딪치지 않으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쏟아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은 수천 년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기회의 땅으로 거듭나는 시작이었다 라는 평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내전의 피폐가 워낙 컸고 남북한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았고, 국가가 강요하는 많은 제약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중산층 한국인들은 더 밝고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과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지로 이민을 꿈꾸게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 비춰지는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행동의 장면들, 그리고 서울의 거리마다 가득 메운 팝송들이 서울과 전역의 젊은이들의 마음에 미국과 서양문화에 대한 동경을 깊게 심었다.

또한 한국이 기회의 땅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그 기회마저도 여전히 제도적 차별로 굳어져 가는 듯 했고, 서민들의 수입성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뛰어오르는 부동산값과 인플레이션의 행진을 앞지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남보다 여러 배 노력하고 희생을 해야만 했다. 그런 중에도 여기저기에서 기적과 같은 성공의 스토리들을 통해 국민들을 격려하는, 한국은 그야말로 패러독스의 땅이 되었다.

 이런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깔려있던 혼란과 불안감 외에도 당시 많은 중산층 한국인들에게 탈 한국이 가장 좋은 옵션이라고 믿었다. 기회가 있으면 나가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사이 1960년부터 캐나다 역시 영어나 불어를 사용하지 않는 비유럽계 국가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교육수준이 높고 근면하고 섬세한 작업에 손길이 빠르고, 가정중심적이며 비폭력적 문화적 특징을 지닌 동양인들에게 대한 환영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캐나다 정부가 전자제품의 폭발적 시장 수요를 담당하는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던 인력부족의 해결책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정책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신규 이민자들에 제공되던 서비스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언어(영어)교육 수강이었다. 오전 9시경부터 오후 3시경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6개의 등급 중 적절한 클래스에 배치되어 6개월간 훈련을 받게 된다.

교육이라기보다는 산업현장에서 쓰임받을 수 있는 정도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영어를 시험을 치르기 위해 책으로만 배워온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호흡이 살아있는 현실적 표현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종 "이렇게 쉽게 말하면 되는데 뭘 그렇게 좋은 문장을 만들려고 고민했을까?"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언어 훈련 기간에는 기초생활비가 주어졌다. 2인 가족에 주 $30가 조금 넘는 액수였다고 기억한다.

 우리가 부엌과 욕실을 나누어 사용하는 단칸방을 임대하고 전연 부족하지 않은 화려한(?) 식탁을 마련하고, 필요한 교통비와 주일 헌금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때때로 서울에 있는 가족과 집안 어른들의 생일을 기억하여 작은 액수의 카드도 전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수준의 생활이 풍요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저 받기에는 넘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좁은 공간을 타인들과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불편함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목욕탕에 가지 않고 집에서 언제나 온수가 제공되고, 좌변기를 사용한다는 점이 매우 좋았다. 이런 편의시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게다가 몇 백 달러만 주면 중고이기는 하지만 거대한 세단으로 자가용도 마련할 수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처음 보는 지하철 역시 인상적이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니 도시를 가득 가리운 각종 나무들이 어울려 도시 전체가 마치 오일 페인트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이 같은 환경의 변화는 이미 신분상승을 이룬듯한 착각에 빠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변화와 성장의 폭은 한국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계속하여 제도적 억압과 전쟁의 불안이 여전히 엉켜서 풀리지 않고 있었지만 경제개혁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8년 만에 이민 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8년 전과 비교하여 서울의 겉모습은 많이 커지고 분주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친구들과 지인들의 놀라운 성공 케이스들이었다.

대다수 나의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업했고 더러는 개인기업을 키웠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가까운 친구 L은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조그마한 상점 하나를 임대하고 몇몇 판매원들과 남성용 셔츠를 월부 판매를 했다.

불과 8년 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자기가 운영하는 회사 임원들에게 제공하는 자가용이 60여대에 달한다고 자랑스런 애기를 들려줬다. 물론 고가의 한정식으로 저녁까지 제공하면서.

또한 나는 어머니가 20여년간 운영하시던 아동복 제조공장에서 일했던 소위 ‘여공’들을 여럿 만나 보았다. 전쟁 중 25세에 남편을 잃고, 4살 아들과 생후 3개월짜리 딸을 안은 어머니는 8남매(그중 5 동생들은 학생)의 장녀로서 힘든 여생을 시작했다.

 외로웠을 어머니는 직원들을 성심으로 사랑하고 정직한 관계를 지키셨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작은 농어촌 출신의 국민(초등)학교 졸업 내지는 미필이 전부였다.  혹은 가족을 시골에 남겨두고 동네 언니를 따라 홀로 서울로 온 이들도 있고, 또는 부모의 결정에 따라서 온 가족이 함께 이사해 온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삶은 전태일의 글 속에서 상세히 읽을 수 있는 피복산업 분야의 여공들 삶의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공장 내부가 천정이 높고 창문을 많게 하여 실내에 먼지가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했다.

그들은 때로 10시간이 넘는 작업 후에 1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설날이나 추석 연말연시와 입학식이나 어린이 날과 같은 대목 절기에는 며칠씩 퇴근없이 작업했다. 돌아가면서 쪽잠을 잤다.

공장은 우리 집 한옥 대청과 대문 옆 현관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건축되어 있어서, 어머니는 직원들과 함께 밤새 일하셨다. 타고난 건강이 무기였다. 나도 공장에서 다리미질도 하고 무거운 원단도 옮기고 청소도 하면서 도왔다. 낮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원단 구매를 위해 공장과 도매상에 동행할 때도 있었다.

 직원 중 몇몇은 어머니와 이런 동고동락(?)을 10년이 넘도록 계속했다. 어머니는 그들의 형편을 소상히 알고 계셨고 그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예를 들면 가을이면 우리 3식구 가족의 김장은 언제나 300포기를 넘겼다. 직원들이 점심으로 밥을 담을 공간을 조금이라도 늘려 김장김치를 반찬으로 조금이라도 더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나는 때로는 라면을 한 솥 가득 끓여 삼립표 빵과 함께 내놓곤 했다. 직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늘 즐거웠다.

 놀라웠던 것은 내가 만난 직원들이 모두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셨는데 오랫동안 같은 직원들과 사업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들이 전도된 것이다.

 알고 보니 내가 한국을 떠난 1년 뒤 어머니가 캐나다로 이민하셨는데, 떠나기 전에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게 디자인 패턴 봉제 판매 등 모든 노하우를 전수했다고 한다.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몇몇은 도매상까지 소유한 알부자들이 되어 있었다.

나는 첫 한국 방문 중 잠시 동안 이민에 대한 비교적 평가를 할 수 있었다. 쉽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캐나다에 조금은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휴식 잃은 이민여정은 이어졌다. (다음 호에 계속)

 

*지난주 필자의 글 중 ‘꼭꼭 눌러두지 않을 수 없었다. 김태열의 분신이 있었고…’는 전태일의 오기였기에 바로잡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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