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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그림, 사진등 아름다움이 머무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위한 작은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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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오귀스트 르네 로댕 2
jogaksarang

1877년 1월 브뤼셀 미술가 동인전에 출품된 <청동시대>는 그 작품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으로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등의 근거없는 비난과 악평을 들었다. 그러나 로댕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세례요한>을 제작, 1880년 프랑스 살롱에 <청동시대>와 함께 출품하여 <세례요한>이 삼등상을 받음으로써 프랑스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세례요한>의 세속적 성공은 <코가 깨진 남자>로부터 실로 16년만에 로댕의 작품이 살롱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침내 그해 <지옥의 문> 을 주문받아 제작에 착수한다. 로댕은 생애 처음으로 정부소유의 작업실과 8000프랑의 돈을 받았다. 1880년에 시작한 <지옥의 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진행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주제를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술적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으로 디자인하였다. 그 후 <칼레의 시민>(1884) 그리고 에밀 졸라가 회장으로 있던 문필가협회로부터 발자크의 초상제작을 의뢰받았으며, 1886년에는 그 전 해에 죽은 빅토르 위고의 초상조각을 주문받아 다채롭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로댕의 예술세계가 농축된 <발자크상>은 그러나 문인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이름도 없고 조잡한 덩어리"란 이유로 거부당했지만 오로지 에밀 졸라만이 그를 지지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화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로댕은 자신의 작품을 파리의 비롱관에 전시하고 이곳을 로댕박물관으로 정하며 자신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였다. 1917년 1월 29일 로즈 뵈레와 결혼식을 올렸고 뵈레는 2월 16일, 로댕은 11월 10일 눈을 감았다.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코가 깨진 사나이>이후 <청동시대>, <세례 요한>, <칼레의 시민>, <영원한 봄>, <키스>, <생각하는 사람> 등과 위대한 걸작인 <지옥의 문(로댕의 사후에 완성됨)> 등 무수한 걸작을 남겼으며, 토르소 작품은 <빅토르 위고>, <르그로>, <발자크> 등의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리한 사실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 안에서 치솟아 오르는 생명의 약동과 아울러 육체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영혼(靈魂)의 움직임까지 극명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은 단순한 리얼리티(Reality)의 차원을 초월, 근대 조각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인상주의(印象主義)의 새 경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