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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그림, 사진등 아름다움이 머무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위한 작은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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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오귀스트 르네 로댕 1
jogaksarang

프랑스와 오귀스트 르네 로댕은 184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917년 죽기까지 전 생애를 조각에만 쏟아 넣은 의지와 정열의 예술가였다. 로댕은 허약하고 갈색머리의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는 주일마다 엄마와 누나를 따라 생 메다르 성당의 미사에 참석했으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프레르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아들에 실망한 아버지는 로댕을 삼촌이 운영하는 보배에 있는 사립학교 기숙사로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날 로댕은 미켈란젤로 작품을 우연히 보고 그림에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854년 부터 로댕은 앙페리알 드 데생(쁘띠뜨 에콜(작은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로댕은 기초소묘, 해부학 등의 교육을 받았으며, 점토를 처음 접하게된다. 그리고 로댕은 조가가로서의 길을 운명적으로 걷게된다. 조각작업에 열중한 로댕은 쁘띠뜨 에콜의 수업에 만족하지 않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조각 작품을 데생도 하였다. 조각에 전념하던 로댕은 고대 작품을 모사한 데생으로 일등상을 받은 자신감으로 에콜 데 보자르에 세 번 응시했으나 세 번 모두 낙방하였다. 1862년 로댕은 정신적 지주였던 누나 마리아의 죽음에 따른 충격으로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갔으나 조각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1863년 그곳을 떠나 고블랭 극장과 파노라마 데 샹젤리제의 장식부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1863년 로댕은 르브렁 가의 허름한 마구간을 빌려 아틀리에를 꾸몄다. 여기에서 로댕은 <코가 깨진 남자>를 제작하여 1864년의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추악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로댕은 "이 흉상이 이후에 나올 내 작업을 결정했다"고 훗날 실토했을 만큼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었다. <코가 깨진 남자>를 제작하던 시기에 로댕은 로즈 뵈레란 헌신적인 여자 친구를 만난다. 로즈 뵈레는 샹파뉴 출신의 재단사로 평생을 로댕과 함께하였으나 결혼은 로댕 자신이 죽기 직전에 했다. 1866년 1월 18일 아들 오귀스트 외젠느 뵈레가 태어났다. 로즈를 모델로 <미뇽>을 제작하여 1865년 살롱에 출품하였지만 결과는 역시 낙선이었다. 1866년 장식조각가로 이름이 알려졌던 카리에벨루즈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나,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면서 로댕은 ''국민군''으로 입대하여 잠시 복무하고, 전역하였는데 궁핍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브뤼셀의 신축 증권거래소를 장식하는 일을 하러가는 카리에벨루즈를 따라 벨기에로 갔다. 그리고 1875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미켈란젤로 작품과의 만남은 로댕의 예술적 발전에 큰 영향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