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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엔지니어의 세상 사는 이야기
부제: [캐나다 국경도시 윈저에 살며 미국에서 일하는 자동차 엔지니어의 세상 사는 이야기]
현대자동차 제품개발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22년째 오로지 한 길을 걷고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입니다.
1995년 봄, 큰 뜻을 품고 캐나다로 독립이민, Toronto에 정착하여 약 1년 동안 살다가, 1996년 봄에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도시 Windsor로 옮겨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장로교회 소속 윈저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직분: 시무장로), 현재 미국 Michigan주 Metro Detroit 지역에 소재한 닛산자동차 북미연구소에서 Senior Project Engineer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캐나다의 일반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캐나다나 미국의 자동차 분야에 취업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나 현직에 계신 분들과 함께, 캐나다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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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바로 읽고 해석하기
winsamo
2004-12-06
성경 바로 읽고 해석하기
고국의 정치권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보완해야 하느냐 철폐해야 하느냐?" 를 놓고 여야 간에 심각한 견해 차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계에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위 자유주의 (진보주의) 신앙노선을 추구하는 교단과 보수주의 신앙노선을 추구하는 교단 사이의 견해차도 만만치 않다.
교단 간의 견해차는 아니지만, 상지대학교의 김정란 교수가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라는 주장을 하여 보안법 철폐 여부 관련 논쟁을 부채질하고 나섰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김정란 교수의 주장이 성서적으로 바른 주장인가?" 의문을 자아내게 된다.
인터넷 상에 공개된 상지대학교 김정란 교수의 주장과 서울신학대학교 윤철원 교수의 반론을 다음에 게시한다.
*****************************************************************
>김정란 교수,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대형교회 복음주의 기독교, 당신들은 '불온한 반항자'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
>
>출처: 뉴스앤조이
>
>나는 예수쟁이다. 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
>복음주의 울타리?넘은 기독교
>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갖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
>그러나 나는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뒤,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의 전 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 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울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천이라니, 수많은 죄 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천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천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
>예수는 누구인가
>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됐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 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1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
>예수, 혁명적 사상을 소유한 사상범
>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딸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천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렌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
>"그것은 네 말이다."
>
>김정란 교수 / 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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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보는 세상―윤철원] 예수님이 보안법 희생자라니요?
출처: 국민일보
기사입력 : 2004.12.05, 17:52
“예수님은 국가보안법 희생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결정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인가,아니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목적인가? 물론 성서는 해석되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그 해석이 무엇인가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 성서는 적어도 정치적 목적에서 기록됐거나 상업적 관심에서 쓰인 문서가 아니라 진리 즉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교회를 향해’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서가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해석될 때 그 정당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성서 읽기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만약 그런 인식이 출발점이 되지 못하고 하나의 논리를 세우기 위한 수단의 필요성에서 출발한다면 그 읽기는 경도되고 왜곡된 읽기로서 그 누구에게도 정당성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결국 분열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정란 상지대 교수의 성서 읽기는 출발부터 문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김 교수의 성서 읽기의 목적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국가보안법 철폐를 반대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고 결국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서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 교수는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문서인 성서를 해석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비판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예수와 상관 없는 종교로 전락시킨 전범이자 전체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일반화하는 논리의 모순에 빠지고 있다.
성서는 구원자 예수를 선포한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한다. 이것이 성서의 핵심 메시지다. 그 외의 종교적 갈등,정치적인 사건들은 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든 로마의 체제 유지자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성서의 사건들을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함으로써 성서가 갖는 핵심 메시지를 놓치고 말았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가로막는 율법주의에 대항했던 예수를 율법에 대항하는 ‘빨갱이,기존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로 묘사했다. 그의 부활과 오순절 사건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낸 사회적 의미로 해석,예수를 정치적 인물 내지는 꽤 괜찮은 사상가로 만들어 버렸다. 만약 예수가 당시 부패한 정권에 대항하다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죽었다면 오늘날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데 동원하기 위해 안성맞춤이겠지만 그는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 없는 정치적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결과에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성서를 인용하는 김 교수의 목적은 국보법 철폐를 주장하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서학자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김 교수에게 묻고 싶다. 누가 감히 국보법과 관련된 국민의 정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이처럼 격동기를 거쳐왔던 우리에게 국보법에 대한 반응은 어쩌면 상처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사실 극우든 극좌든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상처에 대한 반응이요 신음일 뿐이다.그러한 민족적인 상처를 정당의 유익 혹은 권력의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민족과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 발언의 정당성을 위해 성서를 수단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성서는 정치적인 문제들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성서의 관심은 어느 한 민족 내지는 국가 정당의 손을 들어주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는 한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구원을 베푸는 예수에게로 초청한다. 김 교수의 성서 읽기가 갖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는 바로 이러한 성서적 관심을 배제하고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만약 김 교수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해석의 책임은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선포하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돌려야 할 터이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성서학자로서 본인은 김정란 교수의 비판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그것은 네 말이다.”
□약력 △서울신학대학교(B.A)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Th.M) 영국 셰필드대학교(Ph.D) 졸업 △현재 서울신대 신약학 교수 △저서 ‘신약성서의 그레꼬-로마적 읽기’ ‘누가복음서 다시 읽기’ 등
윤철원 교수 <서울신학대 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