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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incanada
이 사이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카나다에 유학와 귀와 입이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알버타 주립 대학에 들어가 기계공학 학사를 마치고 워터루 공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토론토 인근 원자력 발전소 연방정부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그의 신조를 바탕으로 이룩해 놓은 그의 발자취를 실어본다. 현재까지 그의 삶의 발자취는 에드몬톤->워터루->미시사가->대전->밴쿠버->오타와->리치몬드 힐이다. 현재 그는 다음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람쥐 체바퀴처럼 열심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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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문화
nhok

필자가 한국에서 온지 그 다음해부터 알버타주 에드몬톤소재 알버타 주립대학 공대 1년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어려운 입학조건을 만족시키고, 공대 학장 Dr. Kennedy 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키가 크고 젊잖게 생기는 분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배운 대학 2년과정을 어떻게 인정해야 할 지, 학장이 직접 평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준비한 성적 증명서를 가지고 갔더니, 학장이 한글로 쓰인 과목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어로 쓰인 과목만 이해하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한글로 된 과목에서 배운 내용을 한참 설명해 드렸더니, 믿기가 힘드신 지, 내일 배운 교과서를 다 가지고 와서 보여달라고 하셨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학점을 인정받고 싶어 그 다음날 배운 교과서를 큰 가방에 싸서 가져갔더니 그 학장님이 놀라시는 것이었다. 영어로 된 해적판 교과서를 배운 과목은 문제없이 학점을 인정하시는 것이었으나, 원본이 영어라도 한국어로 번역된 교과서로 배운 과목은 책속의 그림과 도표를 보여주어도 책 내용이 그분이 이해하기가 힘든 표정이었다. 본인이 직접 영어로된 내용ㅇ르 보아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20여 과목중 5가지정도 과목만 영어 해적판 책으로 배웠어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돌아오면서 억울한 마음에 가득찼으나, 어디다가 호소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홍콩에서 온 학생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택한 과목들을 100% 학점을 인정받는 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교육시스템이 개방되지 않아서 알버타 대학의 경우 알아주는 대학은 그당시 서울대와 고려대라고 설명하셨다. 그렇다치더라고 그 대학 학생이 알버타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결국 한국어 교과서로 배운 과목은 나처럼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은 뻔했다. 나는 영어판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쳐 주지않은 내 교수님들을 순간 원망했으나, 70년대의 한국은 세상과 개방되지 않은 것에는 어쩔수없는 사실이었다. 또한 교수들중에는 일본, 유럽권에서 온 교수들도 많으니 내가 당한 손실은 나만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 북미주 대학교수들이 한국의 어느 대학을 어떻게 알 것이며, 유명한 영문 서적을 교과서로 배운 한국 학생만이 그 학점을 인정해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한 나의 대학 1년생활은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왜이리 숙제가 많은 지 매주 과목마다 숙제가 나갔고, 과목도 5-6 과목을 택해야 했다. 아무리 토플 600점이 넘었어도 귀는 100% 뚫리지도 않았고, 그룹으로 숙제를 해서 보고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홀로서기 였다가 한국 2세 학생이있는 어떤 그룹에 간신히 끼게 되었다. 그들은 고교를 갓 졸업한 청소년이었고 나는 그들보다 7살 정도 많은 가정이 있는 늙은 학생이었다. 나에게 안도감을 주는 과목은 수학으로 한국에서 정석을 훑은 실력으로 반에서 1등을 할수 있었다. 다행히 카나다 정부와 주정부에서 빌려주는 학자금 제도가 있어 나는 되도록 많이 신청하고, 첫번은 오디오 세트를 사고 다음에는 스키세트를 샀다. 학자금의 용도를 모르고 쓰는 나였다. 생활은 집사람은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나는 저녁에 파트타임 일도 하였다. 그러니 밤 11시에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가장 힘든 과목은 컴퓨터 프로그램밍 코스로 프로그램을 짜서 실행을 시켜야하는 데 에러가 계속나와 꼭두 새벽에 들어오기가 일쑤였고, 그때는 버스가 거의 끊어지는 시간대였다. 한국대학에서 배운 프로그래밍은 키펀치 용지를 사용했으나 여기서는 포트란 언어를 각 콤퓨터에서 실행하여, 시스템이 영 익숙치 않았다. 처음에는 내 아내가 꼬박꼬박 싸준 샌드위치가 씁쓸하고 안에 넣은 상추를 이놈들은 무슨 맛으로 먹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점심, 저녁을 샌드위치로 먹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샌드위치의 장점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건 한국의 도시각과는 달리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김밥처럼 냄새도 안나고, 서서도 금새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1개 먹는 시간은 1분에서 3분정도 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이때 먹으면서 백인들이 이룩한 북미문화가 바로 이 햄버거를 먹으면서 이룩한 문화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음식과 비교해 보라. 밥을 익혀야하고, 국을 끓여야 하고 김치등 다른 밑반찬이 있어여 한다. 점심먹는 데 적어도 30분 이상이 걸리게 된다. 또하나 한국의 학생들과 다른 점은 여기 아이들은 다음 보고서를 배끼는 것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는 수치로 삼는다. 이들은 한 보고서를 만드는 데 서로 토론을 하여 자기 의견이 보고서에 일부분 담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리더가 각각의 의견을 취합하여 그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한국의 대학생은 누가 보고서나 숙제를 쓰면 나머지는 아무 수치심없이 그대로 아침에 학교에 등교해 수업 시간전에 베끼지 않는가.여기에 한국의 카피 문화가 쉽게 발생한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의 대학생활은 한국의 고등학교 생활만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 숙제, 시험, 학점유지 등에다가 이성과의 관계까지 합치면 위기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자살하고 싶다는 학생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당시 알버타 대학에는 한국에서 교육학 전공을 위해 오신 나이 40이 넘으신 유학생 가족 서너 가족이 같은 학생아파트에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경쟁 대상이었으나, 우리 젊은 부부를 귀여워하고 다들 친구가 되었다. 차에 문제가 있거나 이곳 교육, 생활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에게 물어보곤하였다. 4년을 하니 학사 졸업장을 건네주었고, 나는 정해진 시간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 학점을 많이 인정 못받았지만, 제로에서 시작하여 나는 이제 카나다 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 엔지니어 교육을 마친 것이다. 하지만 졸업당시는 1985년으로 알버타주가 경기가 안좋아 오일 회사가 취직문이 좁았다. 알다시피 알버타주는 땅에 묻힌오일을 팔아 헤리테지 펀드를 만들 정도로 오일관련 기업이 많았고, 경기도 이 분야에 좌우되었다. 나는 여기저기 오일회사 엔지니어 job을 찾다가 단념하고 대학원 석, 박사공부를 하라는 아내의 의견을 따라 온테리오 주 워터루 공대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였다. 사실 아내는 내가 위기에 처했을 떄 방향을 제시해준 나의 훌륭한 카운셀러이다. 대학입학때 토플성적이 안나와 낙심하여 2년제 치공을 배울려고 하던 나를 인도해 4년제 대학에 입학시킨 사람이다. 나는 당연히 내 아내의 뜻을 따라야 했다. 나는 에드몬톤에서 워터루로 이사하기 위해 짐을 싣고 대륙횡단을 할 허스룩한 작은 트레일러를 사서 비가 맞지 않도록 벽과 지붕을 널판지로 덮었다. 그리곤 비를 맞지않기 위해 소파는 안에, 차위는 비를 맞아도 되는 식탁을 지붕위에 매고 광활한 사스카툰을 지나 미국으로 내려가 약 10일을 거쳐 카나다 워터루에 도착했다. 작은 타운 워터루는 트레일러를 끌고 오고 아이가 둘인 우리 가족을 받아들일 아파트가 없었다. 렌트비를 못내 도망가는 게 일수인 믿지 못하는 학생신분을 보증할 보증인을 요구했다. 우린 생각지도 않은 문제에 봉착해 일단은 토론토 언니네 집 지하로 입주했다. 그러나 이 지하는 습하고 아이들이 밤에 자다 울고 해서 형부가 아침 6시 일찍출근해야 하는 데 여긴 신경이 쓰인게 아니었다. 결국은 한달을 거기서 기거하고 나는 워터루로 차를 몰고 학교를 다니다보니 결국 코피가 터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린 언니가 지불한 6개월치 렌트비로 아파트를 키치너에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학교앞 학생 아파트가 차례가 되서 입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우리또래 한국 유학생 부부 또는 영주권자 부부가 5-6가구 있어서 우리 그들과 4년이상을 그곳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유학생으로 온 우리보다 신세대는 한국에서 잘 사는 가정에서 와서 오자마자 보지도 못한 스포츠 카를 사서 돌아다니고, 애견을 키우며 살았다. 우리는 쉰세대로 그들과는 동화를 못하고, 55년생부터 60년생사이와 사귀었다. 이들은 대부분 우리 뒤를 이어 한국에 갔다가 아이들 대학 교육을 위해 다시 카나다로 돌아와 토론토 지역에 사는 이들은 우리의 영원한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