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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카나다에 유학와 귀와 입이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알버타 주립 대학에 들어가 기계공학 학사를 마치고 워터루 공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토론토 인근 원자력 발전소 연방정부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그의 신조를 바탕으로 이룩해 놓은 그의 발자취를 실어본다. 현재까지 그의 삶의 발자취는 에드몬톤->워터루->미시사가->대전->밴쿠버->오타와->리치몬드 힐이다. 현재 그는 다음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람쥐 체바퀴처럼 열심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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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첫번째 보람있는 일
nhok
2005-01-11
우리 부부는 2004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단둘이 선물받은 아이스와인을 마시며 뉴욕시 카운트 다운을 보고 2005년 새해가 되자마자 남에게 좋은 일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우선 우리 주위에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더니, 가장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운 사람은 K씨 부부였다. 왜냐하면 2년여 동안이나 남편이 한국 직장에서 빠져 나오질 못하고 아이들과 이곳 토론토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명 기러기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카나다 시민권이 있고 여기서 같이 공부했으나, 일자리를 못얻어 한국에서 들어가 살다가 아이들이 커져서 IMF후에 같이 나올려고 했으나, 이 집 아빠는 이곳 직장이 안되어 올 수 없는 처지였다. 아이들은 그후 무럭무럭 커서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버렸지만, 아빠는 고작 휴가로 1년에 한, 두번 1주일 휴가를 보내고 가는 형편이라 참 안타까웠다. 다행히 아이들은 자기 앞길을 잘 헤쳐 나갔다.
가끔 보는 K씨의 아내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차고, 전에 명랑하던 모습이 다 살아지고, 한때 금슬이 가장 좋은 부부였으나, 이젠 얼굴에 어두운 구름만 가득찬 모습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간다면 두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이나 하숙을 할 때까지 앞으로 적어도 3년이상은 떨어져 살아야 할 것이 뻔했다. 그 아내는 그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살아왔으나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막막했다. 가족이 같이 살 수 있는 뚜렷한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자식들이 독립했고, 학비, 생활비만 대주면 자기네들이 알아 앞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 나는 직장은 꾸준히 나가고 있으니, 노후도 특별히 준비할 것이 없고 2004년은 아내도 열심히 뛰어 키재기를 하니 우린 항상 감사히 생각한다.
나는 내 작전을 짜기 시작했고, 그 시나리오에 맞추어 이메일로 멀리 한국에 있는 K 씨를 카나다로 불러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K씨는 세상에 이럴수가 하면서 내가 하라는 대로 이력서와 커버 레터를 준비하였고 나는 뽑을려는 회사의 광고와 그동안 내 분야에서 쌓은 한인 및 고위직 카나다인과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내가 한국에서 5년간 한전 부장직으로 일하면서 그당시 내가 같은 카나다인인 관계로 내가 자기네들 사업에 개인적으로 많은 배려를 해 주었으며, 대전에 나와 살 때 부부가 서로 알고 지내던 그 옛날 사람들이었다. 내가 K씨의 사정을 얘기하니,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력서도 자기들이 판단해 필요 부서 매니저들에게 건네주었고, 내가 이력서를 건낸지 일 주일만에 인터뷰 요청을 받을 수 있었고 카나다에서의 여행 비용은 커버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한도의 한숨을 쉬고, K씨에게 한국에서 오기위한 비행기삯이 문제가 아니고, 이런 기회를 일생에 다시오기 힘든 것이니, 무슨일을 제치고라도 와야한다고 했고, 그는 성수기인지라 비행기값 200만원을 쓰고 연말에 가족곁으로 날아왔다.
시골 연구소 촌구석까지 부부가 다녀온 뒤 인터뷰 결과를 물으니, 분야는 자기가 지금 연구하는 분야의 연장이라 아주 좋으나, 당장 일하는 것 같지는 않고, 9.11사태 이후로 security 문제로 사내에서도 매일 출근한 후에 다른 직원이 에스코트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첫번째 인터뷰에 성공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두번째 인터뷰를 또 셋업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회사는 K씨의 분야와 다른 점이 있어 약간 걱정이 되었으나, 나는 단기에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역시 내가 아는 인맥을 사용해 이력서를 뿌리니 곧바로 두번째 인터뷰가 잡혔고, K씨는 전날 밤까지 내가 뽑는 부서에서 원하는 사항들을 전화를 통해 지도해 주었다.
이때의 내 심정은 어린아이를 잘 교육시켜 큰 대회에서 발표시키는 부모의 심정과 똑같았다. 혹시 연습시킨 것을 많은 사람앞에서 제대로 잘 해낼지 하는 걱정에 내 속은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물론 당사자는 당사자 나름대로 다른 초조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날 9시부터 시작해 3시간을 인터뷰한다는 데 전화 연락도 없어 나는 무척 초조하였다. 점심시간이 지나 나는 직접 전화를 걸어 아는 사람에게 K씨의 인터뷰 결과를 물어보니, 매니저가 당장 채용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 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다 감탄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90% 이상 다들 채용을 확정하였고, 한국에 가서 security서류를 해와야 하기 떄문에 시간이 걸리니, 이달 말에 출근을 목표로 그 서류를 해오라고 매니저가 요청하였다고 하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데, 전화 벨이 울리더니 그 메니저가 내게 전화한 것이었다. 나에게 K씨에 대한 추천서를 써 라는 것이었다. K씨에 대해 알고있는 성격, 재능, 팀웍에 대한 것을 써달라는 이었다. 나는 당장에 두말 할 것없이 줄줄히 써서 보내주었다.
그리고 K씨 부부는 K씨가 떠나기 전날 우리 부부를 만나 고맙다고 커피를 샀다. 이제 그들은 2주후면 다시 만나 이젠 영원히 카나다 토론토에서 식구가 같이 살 수 있을 것을 확신하니까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되돌아 왔다. 나는 이들 부부가 다시 웃음을 되찾고 잉꼬부부가 될 것을 생각하니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부부는 어려운 상황의 남을 도와주는 것이 이렇게 보람을 느끼는 지를 새삼 느꼈다. 능력이 있을 때 남을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누가 말했던가. 우리 부부는 이런 일을 시간이 되는 대로 계속 하기로 했다. 그래야 엔돌핀이 더 돌아 우리 자신도 젊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