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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박정희 혈서(血書) - [중앙일보]
lakepurity
2009-11-15
[김진의 시시각각] 박정희 혈서(血書) [중앙일보] 2009.11.15 20:33 입력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사전엔 4389명이 들어 있다. 비판자들은 의도가 불순하다고 공격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해방 후 기득권 세력의 친일행위를 부각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의도가 있다 해도 사전의 가치를 부정해선 안 된다. 사전의 하자(瑕疵)는 본질적인 존재가치와는 다른 문제다. 일부 허위가 있으면 사법적 책임을 물으면 된다. 좌파 인물이 빠졌다면 스스로 권위를 해친 것이다. 사전을 만든 이들의 성향이 어떻고, 친북파는 놔두고 왜 친일파만 때리느냐는 얘기도 부차적인 것이다. 존재가치로 볼 때 이런 식의 기록은 필요하다. 물론 많은 경우 친일의 동기는 이해할 만하다. 일제 35년은 긴 세월이었다. 합병 초만 해도 국민적 저항이 있었으나 20년, 30년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일제는 저항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살려면 순응해야 했다. 그래서 판사도 되고 국방헌금도 내고 일제를 칭송하기도 했다. 비판자는 프랑스를 말할 것이다. 프랑스는 나치 부역 혐의자 12만여 명을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두 나라는 다르다. 나치는 4년2개월, 일제는 35년이었다. 나치 점령이 20년, 30년으로 이어졌으면 프랑스도 단죄(斷罪)의 양태가 달랐을 것이다. 일제 35년은 그렇게 불가피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기록하는 건 다르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 않는 것과 같다. 35년 동안 모든 이가 순종했다면 친일사전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적잖은 이가 가족을 위험과 가난 속에 버려두고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상하이로 떠났다.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친일사전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정의란 없다. 대표적으로 박정희를 사전에 넣어야 한다. 최근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보냈던 사실이 드러났다. 23세의 초등학교 선생 박정희는 입학 자격이 19세 이하라는 걸 알고 특혜를 구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이라고 적었다. 박정희는 일본육사까지 나오고 만주국 소위가 된다. 만주가 어떤 곳인가. 항일투사의 피와 안중근의 혼백이 담긴 곳이다. 그런 땅에 박정희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일본 괴뢰국의 장교로 갔다. 그것도 혈서를 쓰고…. 혈서가 있는데도 그가 사전에서 빠진다면 사람들은 정신적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와 기록이 다른 것처럼, 기록과 평가도 달라야 한다. 역사적 평가는 인생 전체로 이뤄지는 것이다. 한 부분에 친일행위가 있다 해서 인생 전체가 친일은 아니다. 친일행위와 친일인생은 다르다. 친일행위가 있어도 해방 후 건국·반공(反共)수호·근대화, 그리고 언론창달에 기여했다면 그는 애국자다. 친일행위가 있다 해서 안익태의 애국가와 서정주의 시가 상처를 받는 건 아니다. 나폴레옹의 조국 코르시카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식민모국(母國) 프랑스의 심장부로 들어가 장교가 되고 황제가 되었다. 리콴유의 조국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리콴유는 식민모국의 심장부에 가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런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살렸다. 박정희도 식민모국 일본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그가 이룩한 근대화 조국이 많은 부문에서 일본을 따라잡았다. 하면 박정희는 친일파인가 극일(克日)파인가. 살아 있다면 박정희는 친일사전에 대해 뭐라고 할까. “내 이름을 빼선 안 된다”고 하지 않을까. 박정희는 일본과 연결된 과거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1961년 대한민국 최고권력자란 신분이 되었는데도 드러내놓고 일본육사의 은사(恩師)를 만나려 했다. 대통령이 돼서는 만주군관학교 동창생을 중용했다. 그런 박정희가 친일사전을 피했을까. 거목은 가만히 있는데 바람만 분다.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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