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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진보여, 정조 관념을 버려라 -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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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진보여, 정조 관념을 버려라 [중앙일보]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줄줄이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는 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 이전 김대중 정부 때도 정권 핵심들이 적잖이 비리를 저지르긴 했다. 그러나 30년 이상 지속되던 지역 차별을 극복하고 등장한 정권이었기에 진보·보수 구도로만 보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많았다. 대놓고 말해 ‘진보의 부패’라기보다 ‘오죽 굶었으면’이라는 해석이 앞섰다는 얘기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얘기가 다르다. 정권 말년에 ‘무능 진보’로 조롱당하더니 이제는 ‘부패 진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생겼다. 누군가 말했다. “군중의 맨 앞에 서서 ‘저기에 적이 있다’고 외치는 그자야말로 바로 적이다”라고. 요즘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이다. 공직 사정을 담당하던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이 상품권을 두둑이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민주노총 간부는 성폭행 미수에 그치지 않고 전교조와 합작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도대체 무엇이 민주이고 참교육인가. 그들에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막연하나마 소금 역할은 해줄 것으로 여겼던 다수 국민이 ‘진보’에 회의를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마침 어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과 좋은정책포럼 공동 주최로 ‘진보를 말한다’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지난 10년 정권의 공과, 한국 진보 세력의 나아갈 길 등을 두루 논의했다. 진지한 비판과 반성도 제기됐다. “진보 경제학계는 구체적인 대안적 경제발전 전략을 제시하는 학문적 역량이 미흡했다”(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진보 정치는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옳은 정책’만이 있을 뿐 ‘좋은 정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동아대 홍성민 교수) 특히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의 지적은 가차 없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이제 진보 진영의 계륵(鷄肋)이 돼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손님이 없어 파리를 날리고 있는 자영업자들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연봉이 6000만~7000만원 된다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참을 수 없게 된다. 당장 쌍욕을 한다”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이제 별로 호소력이 없다. 그런데도 민족민주운동을 한 사람들은 아직도 청춘에 미련이 남아 있고, 좋았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 추억을 먹고 산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진보는 이제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를 해야만 국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위’를 중시한다. 사회의 기성 세력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고, 기존의 검증된 관습과 철학을 고수하려 한다.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따진다. 그러나 진보는 기층계급, 사회적 약자 같은 ‘아래’가 지지 기반이다. 앞으로의 성장보다 당장의 분배가 우선이다. 그래서 “위만 보면 아래가 안 보이고, 아래만 보면 앞이 안 보인다”는 경구는 진보·보수 모두에 유효하다. 성(性)적인 비유가 용납된다면, 한국의 진보는 그동안 “나만 순결하다”는 착각에 빠져 지냈다고 본다. 자기는 순결하다며 남들에게도 정조 관념을 강요하다 어느 순간부터 자가당착을 일으킨 꼴이다. 민족주의·민주주의·환경근본주의부터 교조적 김일성 주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순결의 상징으로 차고 다니던 정조대의 종류는 다양했다. ‘아래’를 잘 살피면서 ‘앞’을 모색하기에도 바쁜 시간에 20년 전 순결했던 민주화 운동의 추억만 코에 걸고 다녔다. 정조 관념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정 실무와 맞닥뜨린 고뇌를 압축해 표현했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비웃기만 했지 고민을 진지하게 공유했을 턱이 없다. 더구나 요즘 같은 전 지구적 경제위기에 진보가 허둥대는 것은 사필귀정 아닐까. 진보는 자신의 발을 묶는 낡은 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