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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군시절 - 옮겨온글 3
lakepurity
2009-01-25
44185
[월간조선-나의 훈련소 시절6] 86kg의 체중이 68kg으로
임웅균(任雄均)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성악가
1955년 서울 출생. 명지고·연세대 음대 성악과 졸업. 이탈리아 로마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수학, 이탈리아 오시모아카데미 오페라과 졸업. 오페라 및 콘서트 공연 1880회.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역임.
나에게 군대 이야기는 가장 힘들고 아팠던 때의 기억이자, 내 인생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곳의 추억이다. 오일쇼크 여파로 견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으로 치면 100억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당시 대학 3학년이었는데 학교 다니랴, 아르바이트하랴, 재산을 압류하러 온 집행관들과 싸우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장티푸스에도 두 번이나 걸렸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던 나는 군대를 선택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면 빨리 입대해서 밥이라도 공짜로 먹자는 생각이었다. 마침 작은형도 나와 같은 날 영장을 받아 한 날 한시에 입대를 했다.
1978년 5월 23일로 기억된다. 졸업연주회를 막 마치고 어머니 기일(忌日)도 못 지킨 채 손 흔들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논산훈련소행 기차에 올랐다. 그나마 형이 함께 있어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형도 훈련소에서 다른 곳에 배치되어 만날 수는 없었다. 훈련소에 들어가 입고 왔던 옷과 소지품을 집으로 보낼 때 마땅히 보낼 곳이 없어 아무 주소나 적어 내며 또 얼마나 막막하고 서러웠던지….
하지만 눈물로 시작한 훈련소와 군 생활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훈련소를 거치며 내가 누린 최대의 감격은 환상적인 몸매와 건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동을 유난히 싫어했던 나는 성악을 하려면 체격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위로 삼아 하숙집 아줌마가 눈치를 줄 정도로 먹는 걸 탐했다. 입대할 때 이 작은 키에 몸무게가 86kg이었다.
그런데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오랜만에 가 본 목욕탕에서 몸무게를 재 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살이 빠진 줄은 알았지만 몸무게가 무려 18kg이나 줄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장티푸스를 두 번이나 앓았던 탓에 허약체질이었으나 규칙적인 생활과 훈련으로 건강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심했던 고등어 알레르기도 훈련소에서 싹 치유됐다. 나는 대한민국 군대 훈련소가 이 땅의 청년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체중조절을 해주는 곳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유학시절을 버티게 한 원동력
훈련소 시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못 먹는 것이었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늘 배가 고팠다. 모든 군인들의 로망처럼 나 역시 한 그릇의 자장면이 너무나 그리웠다. 평소 군것질을 즐기지 않았는데도 훈련소에서는 과자나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집에선 손도 대지 않던 동태튀김이 반찬으로 나오는 날에는 모든 걸 얻은 기분이었다. 군대에서 처음 본 콩고기, 몰래 남겨둔 밥에 마가린을 비벼 간장 몇 방울 떨어뜨려 먹던 밤참, 맨밥에 고추장만 넣고 비빈 밥이 그렇게 맛있는 줄은 군대가 아니었으면 정말 몰랐을 것이다.
광주 보병학교로 자대(自隊) 배치를 받은 후 숟가락 두 개와 반합을 이용해 즉석 전기 숟가락 포트를 만들어 끓여 먹던 라면은 특등급 한우 요리와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샤워장이었다. 땀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빨랫비누처럼 단단한 비누로 초고속 단체 샤워를 해도 군대에서의 피부가 가장 좋았다.
나는 군대가 최고의 과학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도 알았다. 5월 23일 입대해 곧 더위가 시작되자 훈련병들에게 작은 소금 결정체가 지급되었는데 땀을 몹시 흘린 뒤 그것을 먹으면 큰 도움이 됐다. 훈련 중 식사를 하지 못할 때 먹었던 별사탕도 금세 피로를 잊게 했다.
힘든 훈련소에도 오락거리는 풍부했다. 대표적인 것이 통닭내기 축구 경기였다. 운 좋게 한양대 축구선수가 소속되어 있던 우리 팀은 늘 1등을 했다. 보기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단거리의 귀재였던 나는 순발력을 인정받아 센터포드를 맡았다. 오프사이드를 많이 했던 것 같지만 규칙을 그다지 따지지 않았던 탓에 득점을 꽤 올렸다. 내 노래는 어딜 가나 인기였다.
군가(軍歌)대회에 출전, 율동을 곁들인 새로운 스타일의 군가를 선보여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훈련소 교회에서 내가 불렀던 찬송가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친구도 있다. 크고 작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훈련은 언제나 고되었다. 그런데 철조망 통과하기, 기관총사격, 총검술 등 지치도록 훈련을 받은 후 꼭 통과하는 ‘오리고개’가 있었다. 철모 위로 M1총을 뻗쳐 들고 오리걸음을 하게 하는 곳이었는데, 일명 눈물고개라고도 불렀다.
기합을 주던 조교들이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하면 영락없이 어느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고, 결국 모든 사람이 울어버렸다. 대한민국 사나이 중의 사나이들이었지만 어머니 생각엔 금세 어린아이가 되었다. 나는 군대 예찬론자다. 훈련소를 비롯한 군대 3년을 통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의 진정한 가치는 군대에서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종종 한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이순신 장군이다. 숨이 꼴딱 넘어갈 만큼 힘든 훈련을 통과하고 정보, 작전, 교육, 정훈, 보안, 상황병 등 6개의 보직을 거치며 행정 능력을 두루 익힌 덕분에, 제대 후 점퍼 하나로 3년을 버틸 만큼 가난했던 유학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고 성악가, 교수,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 대표,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역할까지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죽고만 싶었던 청년 임웅균에게 자신감과 패기, 그리고 희망을 주었던 곳. 훈련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나의 입가엔 빙긋 웃음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