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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그 어린 나이에.. 옮겨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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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균·정치부 차장 [김창균 칼럼] 열여덟 그 어린 나이에… 통찰과 의지로 中東개척 70년대 오일쇼크 극복하고 고도성장 바탕 마련했던 관료와 젊은 기술자 그립다 ▲ 김창균·정치부 차장 대통령은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만년필로 보고자료를 탁탁 치기만 했다. 뭔가 마땅치 않다는 뜻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면 열여덟인데 너무 어리지 않은가. 가족과 떨어져 그 먼 곳에 가서…." 1976년 3월, 청와대 서재에서 오원철 경제 2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해외진출 기능사 양성계획'을 보고했다. 공업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선발해 기능훈련을 받게 한 후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하는 방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너무 어리다"며 반대했다. 군(軍) 제대 예정자들을 대안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오 수석은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앞으로 중동에서 필요한 인력은 전문 기능인입니다. 기술적인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류에 사인했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앞에서 우리 경제는 훅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웠다. 원유 값이 두세 달 사이에 네 배로 올랐다. 에너지 비용 증대에 따라 공산품, 수입품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1974년 경상수지 적자 20억 달러는 당시 정부 예산의 절반 규모였다. 칠흑 같은 어둠, 거센 파도를 헤치며 대한민국호(號)를 이끌던 사람들은 수평선 너머 한 점 빛을 발견했다. 오일 머니를 블랙 홀처럼 빨아들이던 중동, 그 호랑이 굴 속으로 쳐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기술 인력이 부족했다. 도로를 닦는 단순 토목공사만 한국 몫으로 돌아올 뿐, 부가가치가 높은 플랜트 수출은 미국, 유럽, 일본 차지였다. 중동 진출 업체들은 "기계조립, 판금용접, 배관, 전기 등 전문기능 인력을 1500명만 확보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1976년 3월, 정부는 전국 11개 공고를 지목해 3학년 우수학생 2140명을 선발했다. 중동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2급 기능사 인력 1500명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30% 정도 탈락을 예상하고 640명을 추가로 뽑은 것이다. 이들에게 800시간 실습교육을 시켜야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2년이 필요했지만, 6개월로 기간을 단축했다. 중동 건설 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시간과 싸워야 했다. 정규 이론교육과는 별도로 주당 40시간, 하루 7시간씩 실습이 진행됐다.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이들의 6개월 실습에 쓴 용접용 산소가 8000병, 아세틸렌가스가 1만 병, 용접봉이 9만㎏이었다. 6개월 후 국가기술 자격검정 시험이 치러졌다. 70%를 기대했던 합격률이 100%로 나타났다. 2140명 전원이 현대, 대림, 대우, 동아 등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1977년 1월, 이들이 중동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용산공고를 갓 졸업한 청년이 사우디 현장에서 보내 왔던 편지 한 통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족, 모교, 그리고 조국의 명예를 걸머지고 있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원철 전 수석은 저서에서 "임진왜란 때 10대 의병, 한국 전쟁 때 학도병이 있었다면, 70년대 석유 위기 때는 18세 기능사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고 썼다. 마침내 중동 건설시장의 판도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한국은 프랑스(7.2%), 영국(5.8%), 일본(4.9%)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20.9%의 점유율로 미국(36.1%)에 이어 2위에 올라섰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제자리 또는 뒷걸음질을 했던 70년대 석유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만이 10% 내외의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라 경제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내년엔 더 지독한 한파가 몰아칠 것이라는 소식이다. "청년들이 궂은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소통(疏通) 없이 허공에 흩어진다. 30년 전, 위기 속에서 기회의 창(窓)을 발견했던 경제팀의 통찰력, 나라 운명을 어린 어깨 위에 걸머졌던 열여덟 살 산업전사(戰士)들의 장한 결의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