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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친척에 송금되는 돈은?(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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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FNK방송 북에 송금되는 돈은? 북한에서 외화를 손에 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외국에 친척이 있거나 재일 동포들과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들, 외국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그 선박에 탑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달러가 어떻게 생겼는지 공짜로 주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외화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김정일 지시로 각 도에 외화상점이 생기고 달러를 가지고 바꿈돈(북한에서 쓸수 있도록 달러와 바꿔주는 돈)과 교환하면 구하기 힘든 상품도 마음대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돈(엔)도 마찬가지다. 1994년에 있은 일이다. 그때까지 사망하신 줄 알았던 전쟁 때 헤어진 형님께서 캐나다에 살아 계시며 동생(필자)을 찾기 위해 많은 힘을 쓰셨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잘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인 것 만큼 편지를 담당 보위지도원에게 가져갔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미 그 편지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예측은 했지만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러는 중에 편지는 오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오는 편지는 한 달이면 오는데 가는 편지는 5개월 또는 6개월이 걸리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보니 군 보위부에서 편지를 검토하고 보내고 그것을 다시 국가 보위부에서 내용을 분석하는데, 문제가 없으면 보내주고 조금이라도 내용이 자기네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안 보내주는 것은 물론 본인에게 돌려주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1년 동안에 3장~4장을 보내야 겨우 2장 정도가 형님한테 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보위지도원이 찾아서 가니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잘 쓰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교통이 불편하여 잘 다니지 못한다는 내용 같은 것을 절대로 편지에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언제인가 형님에게서 온 편지에 ‘어째서 네가 쓴 편지가 너무 오래 걸린다’는 글에 회답을 쓰면서 교통이 불편하여 그럴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외국에 보내는 편지라고 몇 번씩 수정을 해가며 보내는데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 1998년 봄이었다. 생활이 너무나도 곤란해 졌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편지에 쓰지도 못하고 그냥 애만 태우는데 형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1천 달러를 송금해 주신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중앙은행에서 외국돈을 취급하지 못한다. 재일 동포들과 유럽, 남, 북, 미에서 친척들이 보내주는 송금은 편의를 보장해 준다는 미명으로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평양에 합영중앙은행이 생기고 각도마다 합영은행지점이 생겨 거기서 처리하게 되었다. 하여 그때 나는 돈을 찾으려면 사리원에 있는 합영은행 사리원 지점에 가야만 돈을 찾을 수가 있었다. 송금통지서에는 98년 6월21일 오전 9시까지 합영은행 사리원지점에 도착하라고 했는데 나는 그 통지서를 6월 16일 오후에 받았으니 제 날짜에 도착하기가 여간 힘들 것 같지 않았다. 여행증을 신청하려고 해도 하루가 걸리고 거기에 당비서, 지배인 결재를 받고, 담당 보안원의 승인을 받아 증명서 발급실에 넘기자면 얼마나 걸리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반드시 통행증이 나온다는 법도 없다. 또 나온다고 하여도 그 다음 절차도 복잡하다. 그것도 순순히 해주지 않기 때문에 담배와 술을 들고 담당 엄무를 취급하는 사람의 집에 찾아가 사정을 해서야 겨우 통행증을 손에 넣게 되었다. 결국 3일만에 여행증을 발급받고 6월 18일 오후에야 떠나게 된 것이다. 차가 없기에 걸어서 길을 떠났다. 그렇게 떠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1천 달러를 받으면 외화상점에 들러 사탕도 살수 있을 것이고 시집 갈 딸아이의 첫날 옷감도 사리라 생각을 하였다. 일부를 북한 돈과 바꾸면 당장 급한 식량문제도 해결될 것이기에 부푼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고 걸었다. 가다가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한 손에는 술을 들고 다른 손에는 담배를 들고 달리는 차를 따라가면서 세워달라고 소리를 쳤다. 어떤 화물차는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면 사리원까지는 안 간다고 하며 그냥 지나가지만 어떤 차는 두말없이 태워주고는 5~6십리 가서는 술과 담배만 챙기고 더 안 간다고 내려놓기도 하였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다시 걷는다.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 새벽 4시에 사리원에 도착하였다. 역전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고 대합실 안에 들어서니 의자에는 앉은 사람이 없고 바닥에 비닐을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만 가득하였다. 하도 이상해서 나는 의자에 앉았는데 10분도 못되어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전등불도 없고 라이터 불을 켰더니 의자와 온몸에 빈대가 우글우글 하였다. 질겁을 하여 일어났는데 그때에야 사람들이 의자를 놓고도 바닥에 앉아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합영은행 사리원지점이라는 곳에 찾아가니 조그마한 단칸방에 책임자인 듯한 중년의 남자와 30대 초반의 여자 직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공민증(주민등록증)과 도장, 분주소 확인증, 송금통지서를 제출하니 150달러는 달러 그대로 주고 850달러는 대신 북한 돈으로 환산하여 1870원을 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위대한 장군님의 지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달러로 15%를 주고 나머지 금액은 북한돈으로 계산하여 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북한 돈 1870원이면 겨우 강냉이 몇 십 킬로그램 밖에 사지 못하는 돈이다. 그래서 사정도 하고 항의도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작 해준다는 소리가 장군님께 제의서를 올려보라는 것이었다. 우리 같은 성분불량자가 그 위대한 태양이라는 아무개에게 제의서를 올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외국에 친척 있는 사람은 대체로 북에서 8.15후에 떠났거나 6.25후에 떠난 사람이 절대 다수니 응당 성분불량자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더라도 어디에다 감히 제의서를 올린다는 말인가. 할 수 없이 그 돈만 가지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달러를 가지고 외화상점 앞에 가면 달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100달러에 북한 돈 20,000~23,000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850달러 대신 북한 돈 1870원이니 너무나 억울했다. 이런 것을 강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상소할 데도 없고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자신이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그 후에 나는 평안남도 소재지 평성과 함남도 소재지 함흥의 합영 은행에도 알아보았으나 그곳 역시 장군님의 지시로 15%만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 150달러마저도 합리적으로 쓸 수는 없었다. 외화상점에서 물품을 사려면 바꿈돈과 달러를 교환해야 하는데 그 비율이 일본 도쿄 외환시장을 기준으로 교환하는데 시간대로 바뀌는 것을 우리 같은 평민이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바꾸어 주는 대로 받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겨우 달러를 손에 쥐었으나 이 금액이 더 나를 고달프게 하였다. 군당위원회에서는 군당위원회대로 장군님의 연구실을 꾸리는데 달러가 필요하다 하고 보위부는 또 보위부대로 연구실을 꾸리는데 필요하다고 계속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안 된다고 하면 충실성이 부족한 것으로 되고 실로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동에서는 또 동대로 또 충성의 외화벌이를 한다고 하면서 돈을 내라고 했다. 그 돈을 내지 못하면 그렇지 않아도 쥐꼬리 만큼씩 주는 배급을 주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있은 후로는 결심하고 형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형님에게 장군님의 배려로 잘살고 있으니 절대로 그리고 다시는 송금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 하였다. 2003년 3월 김종화(평안남도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