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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사의 고뇌(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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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우리 모두가 마음에서 부터 읽어야할 가슴아픈, 감동받는 이야기여서.... 이글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가 양보하고, 화합하는 좋은 한해가 되기를 기원해 보면서, 같이 보고져 옮겨 보았읍니다. 기사 분야 : 사회 등록 일자 : 2005/01/06(목) 14:28 우리는 왜 그렇게 누구를 미워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자 바로 뒤따라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얼마 전 훈련을 받다 순직한 남편 오길영 상사의 뒤를 따라 자살한 김모씨의 유서가 공개돼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를 ‘시골의사’라고 밝힌 한 외과의사가 ‘갓난아기를 병으로 잃고 뒤따라 자살한 엄마’의 얘기를 그녀의 유서와 함께 인터넷에 올려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는 아이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진료과정을 상세히 회상한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사랑과 그리움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유서들은 그저 그런 한 장의 종이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것'을 권한다. 그의 글을 요약해 아래에 소개한다. 시간이 있는 독자라면 다소 길지만 첨부한 원문을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 편집자주 - 유서 어제날짜 신문에 오길영 상사 부인의 유서가 실렸다. 그 유서에는 먼저 떠난 남편과의 애틋한 사랑과 애통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유서의 마지막 구절인 "마음에 담고만 있자니 터져 버릴 것 같아서… 함께 있는 것 말고는 욕심 내본 게 없어요. 돈 따위는 다 필요 없어요. 오늘을 행복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세요. 내일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오늘만 죽을힘을 다해 행복해지세요. 오늘만…"이라는 말은 남은 자들에 대한 충고라기보다는, 얼마나 그 시절이 그립고 사랑이 깊었으면 저런 말을 다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거의 8, 9년 전 레지던트 4년차 치프 시절이었다. 새벽 2~3시경 야간 응급수술을 마치고 당직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방금 산부인과에서 산모가 아이를 출산했는데 복벽 결손증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얼른 와주세요.” 나는 신생아실 인큐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에 물먹은 하얀색 거즈가 몇 겹으로 덮여있는 한 어린 생명을 만나게 됐다. 처음 보는 순간 아이의 넓은 이마와 붉은색의 입술이 마음을 빼앗아갔다. 조심스럽게 배를 가린 거즈를 들추자 그야말로 엄청난 상황이 펼쳐졌다. 아이는 배꼽에서 명치까지의 복벽이 커다란 타원형으로 결손돼 있었다. 마치 그림판에서 커다란 윤형자로 명치에서 배꼽사이의 공간을 선택한 다음, ‘잘라내기’ 작업을 한 것처럼 어린아이의 고운 피부로 덮여 있어야 할 상복부가 텅 비어 있었고, 배속의 위장, 소장, 대장들이 그곳을 통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난감했다. 결손부위가 작으면 바로 수술을 해서 장을 배안으로 도로 집어넣고 봉합을 하면 되지만, 이 아기의 경우에는 양쪽 피부를 당겨 봉합하면 복강의 공간이 좁아져서 장이 썩어버린다. 아니 아예 그렇게 봉합을 할 수가 없었고 장도 제 자리에 들어 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도리 없이 머리 속으로는 적정시점에 결손된 자리에 타원형의 고어텍스 패취를 대서, 복벽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다가, 나중에 성장하는 동안 복벽을 계속 늘려서 당겨 꿰매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문제는 수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동안 밖으로 나와 있는 장을 통해 증발할 수분이었다. 일단 ‘사일로’를 만들어서 중력의 힘으로 장이 배속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우선은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장을 배의 중간으로 모아 바셀린을 바른 거즈로 장을 둘러싼 다음 아이스크림의 콘 모양으로 만들면, 중력으로 아래쪽 장부터 배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을 사일로라고 한다.) 소아과 의사와 상의해서 사일로를 만들었다. 아이는 하루, 이틀을 넘어가면서 의외로 잘 버텼다. 간의 일부를 포함한 배속의 장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아이가 우유를 빨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배변까지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우리는 아이의 변을 관찰하면서 밖으로 나와 있는 장이 하루빨리 배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를 기도했다. 의사도 사람이다. 아무리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희망이 없는 환자보다는 아무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는 환자에게 더 집착하게 된다. 처음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던 아기의 상황이 조금씩 개선되면서 외과, 소아과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아이에게 매달렸다. 아기가 조금씩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사일로의 높이가 조금씩 내려가자, 우리뿐 아니라 아기의 부모들도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감염 예방을 명분으로 아기의 부모들이 아기를 면회하는 것을 강력히 통제했었다. 하루에 한두번만 그것도 신생아실 격리 창을 넘어서 잠깐 살피는 것만 허락했을 뿐,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아직도 회복기에 있던 아기 엄마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것은 어차피 구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모성본능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배려였다. 그런데 의외로 아기의 상태가 좋았다. 대개 장이 바깥에 나와 있으면 장 표면을 통해 수분이 증발한다. 때문에 미끄러운 점액으로 코팅되어 있어야 할 장이 마르기가 쉽고, 그렇게 되면 연동운동을 해야 하는 장의 기본적인 운동이 떨어지면서 장기능이 사라진다. 아울러 장의 표면을 통해 증발하는 수분과 전해질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성인의 경우라면 하루 몇 리터의 물이 열린 복강과 장을 통해 증발해버린다. 그런데 아기는 증발량과 우리가 투입해야 할 양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너무 많은 수분과 전해질을 주어도 독이 되고 적게 공급해도 독이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기의 전해질과 수분 대사조절이 원활했다. 우리도 행여 1cc의 물이라도 덜 증발시키기 위해 장을 감싼 거즈 위로 바셀린을 바르고, 그것도 불안해서 실바딘이라는 화상처치용 연고를 몇 겹으로 발라서 수분이 증발할 통로를 막았다. 아울러 장기간 복강이 노출됨으로서 생기는 감염을 막기 위해 장 주변을 하루에 몇 번씩 드레싱을 했다. 아기는 처음에 이름이 없었다. 출산 후 어차피 생명의 연속성을 유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들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기가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사일로의 높이가 낮아져 가면서 모두가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2주째 되던 날 아기에게 ‘용희’라는 이름이 생겼다. 용희의 부모님은 그야말로 모성과 부성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용희 아빠는 매일 밤을 소아과 신생아실 앞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서 잠을 잤다. 아기 엄마는 강력하게 만류했음에도, 어린 용희의 손에 묵주를 쥐어 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거의 애원을 했다. 우리는 아무도 그것이 아기를 위해 작은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용희 엄마의 그 강한 믿음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결국 용희 엄마가 가져온 나무 십자가가 달린 작은 목주가 병원의 소독기에 돌려서 멸균이 된 다음 용희의 가느다란 손에 쥐어졌다. 3주가 지나면서 사일로의 높이가 1/3로 낮아졌다. 태아시절부터 복강의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용희의 장기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이의 대사가 증가하면서, 인위적으로 아기의 필요량을 공급하는데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아무리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무균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벌려진 복강내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오염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제 결단을 내릴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일단 장이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판단 하에, 아직도 배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은 장을 중간으로 모은 다음 벌려진 복강을 패취로 덮어씌우기로 했다. 고어텍스로 된 패취를 벌어진 복벽위에 대고 꿰매면 덜 들어간 장 부분은 아직 불룩하게 남더라도 그 위로 고어텍스가 덮이면 이제 정상적인 복강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일단 그렇게 하고 한두달 뒤 아이가 성장하면서 복벽도 좀 늘어나고, 나머지 덜 들어간 장도 배안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 패취를 제거하고, 복벽을 서로 연결해주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출생 한 달 째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다. 아직 배위에 밀려나와 있는 나머지 장을 중간으로 모으고, 그 위를 보자기처럼 고어텍스 패취로 감싼 다음, 벌어진 복벽에 타원처럼 고어텍스를 꿰맸다. 이제 남은 건 장이 그 압력을 견뎌내는 것과 감염을 막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아이는 수술 첫날을 비교적 무사히 잘 견뎌냈다. 소변양도 원활하고 심장이나 폐기능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장운동이 돌아오지 않았다. 첫날, 둘째날이 지나도 청진기를 통해 장의 연동운동이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운동양이 없이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는 어린 아기의 몸에서 장이 자기의 리듬을 찾는다는 것이 무리인지도 몰랐다. 수술 5일째 장운동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용희의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용희의 어린 몸은 다시 수술실로 옮겨졌고 우리는 벌어진 복벽을 덮고 있던 고어텍스 패취를 제거했다. 패취를 제거하자 지난 5일간 연동운동을 못해서 개스가 가득 차 버린 장들이 마치 수소가스 충전기로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소장들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면서 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황급히 장을 옆으로 치우고, 장간막쪽을 살펴보자, 장간막에서 소장쪽으로 가는 혈류가 눌려있었고, 아이의 소장부위가 약 20센티정도 시커멓게 괴사가 일어나 있었다. 치명적이었다. 우리는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용희의 썩어 버린 장을 커다란 거즈로 감싸고 조심스럽게 절단했다. 양쪽을 절단하면서 혹시나 괴사된 장 내용물이 다른 곳을 오염시킬까봐 식은땀을 흘렸다, 괴사된 장내에서는 혐기성 세균이 자라있어서 이것이 복강을 오염시키면 성인도 구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겨우 새끼손가락 굵기 밖에 되지 않는 아기의 소장을 절단하고 다시 건강한 부분끼리 이어 붙였다. 용희의 장들은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다시 배위에 넓게 펼쳐진 채로 나와 있고, 우리는 그 위에 식염수를 묻힌 거즈를 덮고 계속 수증기 증발을 막아주면서 하루빨리 이어진 장이 붙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식음을 전폐한 용희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계속 이어졌다. 아기가 울음을 잃어버린 뒤 일주일이 흘렀다. 용희는 더 이상 울 기력도 없어보였고 상태는 조금씩 나빠졌다. 금식이 이어지고 경정맥을 통한 인공영양의 한계치는 점점 코앞으로 다가왔다. 혈액검사상 각종 수치가 현저히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삼일 후 용희가 고열에 시달렸다. 검사 결과는 백혈구의 급증과 혈소판의 감소. 전형적인 패혈증 초기 징후였다. 신선한 피(의사들의 피)로 서둘러 수혈을 시작했다. 용희는 수혈을 시작하기 전날부터 상태가 급격히 불안해졌다. 호흡은 가빠지고 맥박수는 무서울 정도로 증가했다. 피부가 거칠어지고, 작은 점상 출혈반들이 온몸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시간당 소변양이 감소하는 것이었다. 소변양의 감소는 온몸으로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용희는 그날 저녁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뒤로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아기의 손가락과 다리를 들어 올리며 배안미소를 짓던 그 맑은 얼굴과 가냘픈 숨결이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용희를 괴롭힌 복벽을 제대로 닫아 주고 싶었지만, 용희의 가냘픈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춘 이후로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 줄 수가 없었다. 어린 용희의 배는 감염으로 인해 농이 들어찼고 역겨운 냄새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배속을 다 씻어서 억지로 당겨서라도 봉합해주고 싶었지만, 죽은 아이를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패취를 배위에 대고 마치 이불을 덮듯 그 야속한 장들을 가려주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린 영혼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용희의 왼손에는 그동안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나무 십자가와 묵주가 다시 쥐어졌다. 우리는 자괴감에 사로잡혔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죽을 만큼 술을 마셨고 몇몇은 눈물을 보였다. 용희가 영안실로 내려가고 용희 아빠가 의국으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용희 때문에 애써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아내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같이 인사를 드리러 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달이 넘게 신생아실에서 밤을 새며 그렇게 간절히 아이의 회생을 기도하던 바로 그 손으로 내손을 잡고 머리를 숙였다. 너무 면목이 없어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일주일간 아침 회의 때마다 모두를 한숨짓게 만들었던 용희 이야기도 이제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의국으로 편지가 왔다. "선생님… 그동안 우리 아기를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기가 세상에 나서 엄마 젖 한번 못 빨아보고, 그렇게 끔찍한 병을 앓다가 죽었지만, 선생님들이 잘 보살펴 주셔서 아마 여한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서 엄마 품에 한번도 안겨보지 못한 아기가 너무 불쌍합니다. 저라도 옆에 있어 주지 않으면 우리 아기가 너무 외로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살펴주신 은혜 저 세상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용희 엄마가 전날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우리는 용희가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용희 엄마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아이 엄마가 죽고 나서야 모두들 ‘그때 용희 엄마가 정신적으로 많이 불안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두 명의 생명이 그렇게 허무하게 아쉽게 억울하게 떠나버린 것이다. 오상사 부인의 유서… 또 용희 엄마의 유서… 나는 그것을 쓰는 분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의 사랑과 그리움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유서는 그저 그런 한 장의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극한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피눈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남기고 떠나간 분들의 그 간절함이 세밑에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그럼에도 나는, 혹은 우리는, 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증오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이 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결국 돌아보면 온 세상은 사랑인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게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2004년의 마지막 날에… 시골의사 ▶시골의사가 쓴 '유서' 원문 전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