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사슴에 얽힌 이야기
사냥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에 사는 짐승'
사슴이라 하면 한국인들은 고기보다는 사슴뿔인 녹용(鹿茸)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녹용은 인삼과 더불어 한방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보혈 강장제(補血 强壯劑)이다. 녹용은 겨우네 떨어져 나간 뿔이 봄에 새로 나기 시작해서 딱딱하기 전에 자른 것으로, 혈관이 많고 솜털이 많이 나 있어 매우 부드럽다. 녹용뿐 아니라 사슴의 피와 고기도 매우 좋은 강장제로 취급된다.
고대인들은 사슴 중에서도 백록(白鹿), 곧 흰사슴을 신성시하여 신록(神鹿)이라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동명왕은 흰 사슴을 잡아 거꾸로 매달고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하자 사슴의 울음소리를 듣고 천제(天帝)가 비를 내렸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왕이 흰 사슴을 진상받아 잔치를 베풀고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한라산의 백록담(白鹿潭) 전설이나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 등 설화에도 사슴이 자주 등장한다.
사슴고기는 고기잡이와 사냥을 중요한 식품 획득의 수단으로 삼았던 구석기 시대부터 식용되었고, 또 희생용으로도 쓰였다. 고대 중국의 《주례》에는 궁중의 식용으로 쓰는 육수(六獸)에 사슴과 노루가 들어 있고, 《예기》에는 사슴고기로 포(?를 만들고 팔진요리(八珍料理)에도 사슴고기를 쓴다고 나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시대의 무용총 벽화 등에 사슴을 사냥하는 말을 탄 무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사슴고기를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사냥'은 「산행(山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지난 시절 사냥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에 사는 짐승었던 '사슴' 의 '사' 역시 「산(山)」에서 나왔고, '슴'은 「중생(衆生)」에서 비롯된 우리말 '짐승'의 「승」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된다[산(짐)승⇒사슴].
영웅들이 즐겨 먹던 사슴고기
사슴고기는 기름기가 적어서 거의 모두 붉은 살코기로 되어 있고 맛이 담백하다. 또 콜레스테롤이 별로 없고 육질이 매우 부드러워 암소고기의 맛과 비슷하다. 들짐승 고기는 대개 노린내가 많이 나지만 사슴고기는 이런 냄새도 없어서 옛부터 야생 조수인 꿩고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어 왔다.
《본초강목》에는 사슴고기가 혈(血)을 기르고 얼굴 빛을 좋게 하다고 나와 있고, 《동의보감》에는 사슴고기가 심장과 위 등 오장을 강화시키고 혈액순환을 도우며 골수·콩팥·근육을 튼튼하게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기력을 돋우는 고기라고 불린다. 또 신에게 제사할 때 사슴고기를 쓰는 것은 그 성(性)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며, 사슴은 전체가 모두 사람에가 유익하고 야생짐승 중에서 가장 일품인데 포(脯)로 하거나 고거나 끓여 먹는다고 했다. 이밖에 사슴은 해독초(解篤草) 를 먹어서 약의 효능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약을 먹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당부도 하고 있다.
사슴고기는 옛부터 중국 사람들이 맛 좋고 몸에 좋은 고급 음식으로 여겨서 즐겨 먹었다. 고대 한(漢)나라의 고조 유방(劉邦)이 사슴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강력한 라이벌 이었던 초(楚)나라의 패왕 항우(項羽)와의 치열한 사움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유방은 특히 사슴고기의 위(胃)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여러 적들과 싸우기 위해 출전할 때에는 꼭 사슴고기를 먹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싸움터에서 반드시 승리했다고 한다.
특히 한나라의 7대 황제였던 무제(武帝0는 선조인 유방보다 더 사슴고기를 좋아했다. 그는 녹용과 녹혈(鹿血)은 물론 사슴의 생식기인 녹편(鹿鞭)도 자주 먹었고, 특히 어린 수사슴에 인삼·약초·유황가루를 먹여 길러서 3년쯤 되면 목책에 가두어 놓고 암사슴이 목책 밖을 빙빙 돌게 하여 줄줄 흘러내리는 정액을 모아 벌꿀과 녹용가루를 섞어 만든 환약을 즐겨 먹었다.
그 때문인지 중국인들이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한무제는 무려 54년 동안 황제 자리를 지키며 주변 국가들을 평정하는 등 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늙어서도 3천 명이 넘는 후궁들을 거느리고 왕성한 정력을 과시하면서 71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당(唐)나라 초기 소설인 《유선굴(遊仙窟)》에는 맛 좋은 음식 이름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중에는 녹설(鹿舌)과 녹미(鹿尾:사슴꼬리 부근의 살코기)도 들어있다. 중국에서는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녹설과 녹미가 호미(好味)로 알려지고 있다.
녹근(鹿筋)은 사슴의 가느다란 다리의 힘줄인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우려서 수프로 하거나 삶아 먹기도 하고,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는 약으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녹근을 특수한 요리재료로 귀하게 여기므로 값이 매우 비싸서 특수한 고급요리에만 쓴다.
사슴의 피 역시 정(精)과 혈(血)을 늘려주고, 성력과 스테미너를 증강시켜 주어서 정력부족·산후허약·신기부족 등에 좋다고 한다. 옛날에는 사슴이나 노루의 허파를 술안주용 고기 중에서 으뜸으로 치고, 그 다음으로 토끼나 양의 허파를 좋은 것으로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사슴고기의 영양가와 요리법
사슴고기는 고기 1백g 중 단백질 함량이 23g이나 되고, 지방질은 0.99g에 불과한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이며, 네 발 달린 짐승고기중 유일하게 1백% 알칼리성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야채를 곁들이지 않아도 되고, 동물성 콜레스테롤이 거의 없어 성인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등 이상적인 영양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유럽의 고급 음식점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사슴고기에 별 흥미를 느끼고 있지는 않지만 인구에 비해 노는 땅이 워낙 많아서 사슴을 방목하여 붉은 사슴고기를 유럽 등지로 대량 수출하고 있다. 북유럽과 러시아 및 알라스카 등 추운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순록(馴鹿)을 주식육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1%가 못되지만 세계 녹용시장의 80% 가량을 소비한다. 국내에서 수입되는 70-80%는 뉴질랜드산이며, 사슴고기도 대부분 뉴질랜드에서 수입한다. 보통 18-20개월 된 사슴을 잡자마자 바로 급냉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슴고기로 소고기처럼 탕·주물럭·전골·무침·육회와 간회·염통구이·통팥구이 등을 만들어 먹는다. 사슴탕은 사슴뼈를 고아 우러난 국물을 다른 그릇에 따로 떠내어 약간의 살코기와 인삼·대추·녹각·은행·표고버섯·팽이버섯 등을 넣고 센 불에 한 시간, 약한 불에 30분 정도 뜸을 들여 끓여낸다. 소고기국과 비슷하지만 기름기가 거의 없어 국물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풍긴다.
주물럭은 살코기를 갖은 양념에 재운 것을 참기름을 살짝 친 불판에 구워 먹는다. 고기가 워낙 연해서 센 불에 구우면 쉽게 타버리거나 퍼석퍼석해져서 맛이 떨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아주 약한 불에서 핏기만 가실 정도로 살짝 구워야 사슴고기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염소고기처럼 냄새도 나지 않고 질기지도 않으며 담백하지만 기름기가 너무 없어 퍽퍽한 느낌을 주는 것이 다소 흠이다.
사슴고기의 싱싱한 맛을 보려면 육회를 만들어 먹는다. 소고기 육회처럼 참기름에 무친 육회를 가늘게 썬 배와 섞어 접시에 담는다. 소고기 육회보다 훨씬 부드럽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이밖에 무침은 살코기를 살짝 익혀서 미나리·부추·파·팽이버섯 등을 넣어 버무려 만들고, 전골은 탕과 비슷하게 조리한다.
가축은 대개 도살하기 전에 하루쯤 절식(絶食)시키지만 사슴은 그럴 필요가 없다. 사슴을 도살하기 하루 전에 절식시키면 위(胃)의 내용물이 액화되어 내장을 바로 적출해야 하며, 그 후 육가공을 할 때 지장이 많고 사슴고기가 쓴 맛을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