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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와 모니카의 케나다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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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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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2부 수기는 현제 집필중에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2부 케나다 생활 수기는 현재 집필중에 있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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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음력설과 한해의 설계
설과 한해의 설계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15분 정도를 달려 다운 타운에 도착하면 중국 마켓이 있다. 우리의 음력설도 이들과 같기 때문에 축제 분위기에 젖어 든다. 한인 사회에서의 각종 행사도 뒤질세라 이곳 저곳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집에도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구입하여 민족 최대의 명절인 구정의 음식을 마련한다. 그리고 모두 둘러 앉아 추도 예배를 보고 남편이 아이들에게 덕담을 해 주기도 한다. 나와 남편은 한식 방에서 구수한 녹차를 마셔 가면서 올해의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이미 정해진 일 들에 대해서는 확인을 한다. 그리고 우리집 텃밭에는 올해는 작년에 작황이 잘못 되었던 것을 보충하고 거름도 더 많이 하면서 들깨, 파,오이,상치,시금치,열무,쑥갓 등을 심고 꽃밭에는 어떤 색의 일년초들을 선택하여 어떻게 심을 것인가를 기대감을 갖고 설계를 한다. 이런 글을 쓰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작년 겨울 초기에 파종해서 심어둔 각양 각색의 300여 튜우립의 구근이 어떻게 우리집 봄을 장식 해 줄것인가 꿈에 젖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새해를 맞고 또 이 글을 정리 하면서 한국에서 어렵게 이민을 결정해서 오는 이민자 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첫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삶의 무기가 이곳에서 적절한지를 파악한 후 결정해야 한다. 이는 한국에서 하고 있는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 하고는 이곳에서는 거의 무용지물 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격을 요하는 문제는 더욱 그렇다. 둘째는 이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가 아니다. 꿈과 환상에 젖어서 이민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실망이 크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사업 및 인생 실패의 맛을 경험하게 된다. 셋째는 이민이 결정 됐다면 주위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고 가능하면 케네디언 들이 집중하여 살고 있는 곳을 선택하라. 다소의 어려움은 있지만 이들이 훨씬 이해 타산을 따지지 않고 잘 도와 주며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 아이들이나 현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넷째는 케네디언과 어우러져 살려면 그 들을 각종 질문으로 괴롭혀라. 알아도 모른체 하고 배우는 자세로 대하라 그러면 그들과 훨씬 가까워 질 수 있고 그들은 남을 가르쳐 주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다섯째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 나는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내가 매일 기도를 하는 요목들을 적고 져 한다 하느님! 우리 식구를 위해 염려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우리 식구 모두에게 건강과 사랑, 믿음과 화목을 주시옵소서. 우리 식구를 유혹으로 부터의 고난과 위험을 막아 주시옵고, 우리 식구 모두에게 하나님이 귀히 쓰실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우리 집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주시옵고,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살려 원하는 진로로 순항하게 해 주시 옵소서. 저와 남편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주셔서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게 하여 주시옵고, 이곳에 살면서 어려운 시험에 들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최종 수정 시각 : 2003.03.31 23:52:51 추천 반대 미석 :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아멘 (04/04 17:38) 주운향 : 운향 ; 주 께서 보살펴 주실거라 믿씁니다 ~아멘 (04/04 22:59) 프랭크 : 다들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축복이 댁님들의 가정에도 함께 하시길 기원 합니다. (06/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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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크리스마스에 집에 초대한 사람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위해 초대한 사람들 케나다의 12월은 가장 바쁜 달이다. 케나다의 경제는12월이 좌우한다 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만큼 소비가 많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대비해서 각종 친,인척들을 위한 선물 준비에 바쁘고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하는데 온갖 정열을 쏟아 붙고 있다. 작년에는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른 것 같다. 남편은 집의 온 처마 끝 둘레를 리본 꼬마 전구로 장식을 하고 앞 정원에는 전구 타워를 만들었다. 지나가는 어떤 사람들은 전구타워 앞에서 사진도 찍으며 원더풀 말을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의 집은 마치 성 같았다. 우리는 실내 외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맨 먼저 우리가 다니고있는 교회의 목사님 온 가족을 초대했다.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셨고 아이들 공부하는데 힘을 주셨다. 또 그 사모님은 내가 성가대에서 성가 연습을 하는 동안 나에게 항상 발음을 교정하여 주셨고 때로는 집으로 와서 개인 교섭까지 해주실 정도로 열성적 이셨다. 자신들도 중국에 1년을 연수차 살면서 Second language의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셔서 항상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셨고 우리가 이 동네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제일 먼저 점등식을 그분들과 같이 하였다. 다음은 우리 아이들의 차례다. 나는 항상 내 마음속에 갖고 있는 미안한 마음 이라면 나의 두 딸아이에 있다. 열심히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고있고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손에 쥐고 오면 엄마로서 그 고마움을 마음속에 간직 하고 있지만 함께 거하는 식구가 조카를 비롯해서 남편 친구의 딸들 한국에 사랑하고 보고픈 가족을 등지고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와 있기 때문에 나는 실지 내 두 딸아이 보다 이들에게 관심과 정에 대한 비중을 더 많이 쏟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해를 정리하는 이 달에 나는 이 모든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가호와 축복이 있고 또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 앞에서 나는 기도했다. 첫째는 간호학을 둘째는 TV 멀티미디어 셋째는 대학에서의 인티어리어 디자인을 위해 11학년에 넷째는 교수님이 되겠다고 11학년에 다섯째 와 여섯째는 이제 사립에서 ESL코스를 마치고 공립으로 옮겨 정식 과목을 수강하여 듣고 있는 6 공주가 있다. 이들 모두에게 솔로몬에게 주셨던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다음은 형님 네 집인데 실지 본명이 Gilles Paulin & Ginette인데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부른다. 어려운 일 마다 않고 아무리 밤이 늦어도 우리집에 시설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시고 가는 해결사 이시다. 요즈음은 남편에게 이곳 생활을 하려면 남자가 음식 요리 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조리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신다. 가끔씩 우리집에 와서 아이들이 맛있어 하는 스파게티며 파스타도 직접 오셔서 만들어 주신다. Ginette은 전직 교사였던 관계로 우리 아이들의 숙제를 가끔 도와 주시곤 하는데 한국 말로 표현 하자면 미구라 부를 수 있다. 집을 방문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집에는 항상 먼지 하나 없이 모든 게 다 정렬이 잘 되어있고 다재 다능하며 활동적이다. 집에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의 소유자 이다. 한해 우리 가정을 돌보아 주신데 대해 감사 드리는 마음에서 이들을 초대했다. 다음은 옆집 마음씨 착한 James라는 분인데 남편의 선생이요. 말 동무다. 항상 새벽 5-6시 사이면 둘이서 Timhortons coffee shop으로 줄행랑을 친다. 남편은 이곳에도 새벽에 많은 친구가 있다. 평소 당신이 갖고 있는 지견이 잠자는 것 보다 이곳 사람 한사람 더 익히는 게 나에게는 더욱 낫다고 말을 하곤 했다. 여름철 잔디 깍 는 철이 되면 남편이 바쁘면 옆집에서 깎아주고 옆집이 바쁘면 남편이 깎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아 아이들도 이제는 영어 못한다고 겁내고 하는 일이 없다.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12월에 다 초대를 하면 쓰기가 곤란 하겠지만 내 주위에서 특히 우리가 은혜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12월의 점등식을 기점으로 모여 저녁을 나누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게 바로 우리의 순수한 정이라 할 수 있고 예의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12월 31일 정말 다사 다난했던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나는 이때 쯤에는 미시사가에 살고 있는 조 선생님 댁과 또 박선생님 댁의 온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서 Pot Luck Party를 가진다. 그리고 새해 맞이를 우리 집에서 보내곤 한다. 시끌 벅적한 도심지로 나가서 혼을 빼고 오느니 온 가족이 앉아 미래를 설계하며 지나온 일년사를 더듬어 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학생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학교에서 일어났던 한해 동안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어른 들은 어른들 데로 한해의 이야기를 하는데 재야의 종소리가 울릴 때 까지 오랜만에 끝도 없이 해보는 세종대왕님의 위대하신 한글을 바탕으로 소리 나는 메아리가 각방마다 메아리 칠 때 내가 한국인 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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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열자의 물속과 사람의 마음
열자의 물 깊이는 알아도 한자의 인간의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그로부터 1개월 후에 한국에서 부탁 받았던 오누이가 그들의 엄마와 함께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갑자기 식구가 3명이나 늘었다. 여자들의 가정 사에서 식단을 짜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는 이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가정 주부들은 이를 잘 알 것이다. 나 역시 힘이 들었다. 여기에다가 우리 아이들과 유학 온 학생들이 서로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그 힘은 배가 들었다. 늘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주 집에서 무역 업무를 처리 할 수 있어 내가 바쁠 때는 나를 도와 훨씬 일을 덜어 주었기 때문에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학교에 다녀오면 아이들로부터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해 항상 이야기 해주고 그리고 나는 남편과 의논하여 상담을 해주곤 했다. 오누이의 엄마는 이곳에서 3주 동안을 같이 기거 하면서 우리 집과 주위의 공부하는 환경과 학교 방문을 통하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상당 부문을 이해하고 한국으로 자기 아이들을 잘 부탁 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남편 역시 열흘정도의 기간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타이트한 스케줄을 가지고 한국에 갔고 목적이 모회사의 물품을 한국으로 수입하는데 있어 독점권 계약 때문에 가게 되었다. 원예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께서 아이 유학에 대해 문의를 하기에 전화를 한다고 나에게 물어 왔다. 우리집에 같이 거주하고 있는 남편의 친구 딸 중의 한 아이 아버지가 이민 신청을 해두고 있기 때문에 곧 나가기 때문에 자리가 빈다고 혹시 만날 수 있으면 만나보고 아이의 유학에 관한 심중이 어떤가를 물어 보고 아울러 성적 증명서가 있으면 한번 보고 다시 전화 해줄 것을 요망했다. 다음날 전화상으로 성적은 상위 그룹에 속하고 자신이 유학을 가려고 엄마와 투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그녀의 아버지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어서 나는 가능하다고 확답을 주었고 서류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혹시 시간이 있으면 오누이의 집에 잠시 들러 보라고 주문을 했다. 남편의 말을 들은 나는 좀 찜찜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누이 중에 누이가 남자 관계가 좀 복잡해서 그 아이들과 헤어지게 하기 위해서 카나다로 보냈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 조차도 멀어 진다는 생각을 갖고 믿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이러한 전화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누나가 우리집에 처음 와서 침대와 책상을 정리하면서 책상과 침대 머리맡에 남자 아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려 놓아서 내가 부모님 사진을 올려 놓아야지. 널 누가 키우고 이곳까지 유학을 보냈는지 넌 그걸 아느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농담조로 준적이 있어 이 아이와 관련이 있구나 하고 짐작을 했다. 그 아이들 중에 누나는 새로운 각오로 공부에 임하는 것 같았으나 동생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을 아는 동시와 함께 그 집안도 간접적으로 다 파악이 가능하다. 아이들의 오가는 대화에서 그런 것 들을 감지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우리집에 여자만 있다가 새로운 식구의 남자가 왔기 때문에 그와 장난도 쳐주고 농구도 하며 근래 보기 드문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남편의 이야기로는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잊고 이곳의 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나에게 설명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자신이 한국에 있을 때 몸에 베어 온 행동들이 서서히 들어 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잠이 많다. 그리고 공부는 뒷전이다. 손으로 만지 작 거리는 오락기로 시간을 다 보낸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지하실에 만들어 놓은 공부방에서 내 자식 뿐 아니라 미리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불평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얘기에 의하자면 책상에 5분을 못 앉아 있고 소리를 내고 질문도 되지 않는 것을 돌아 다니면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물어와서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1층 남편의 서재에 조그마한 책상을 그를 위해 만들었다. 그리곤 항상 감시 감독하에서 우선 공부를 하던 안하던 책상에 앉아 있는 법부터 가르쳐 갔다. 남편 이야기로는 공부를 가르쳐도 소 귀에 경읽기 이고 공부를 가르쳐도 듣는지 안 듣는지도 모르겠고 주위가 산만해서 나도 두 손을 들까 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였다. 나는 그러는 남편을 달래면서 최선의 노력은 해 보자고 다시 부탁을 했다.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가정 환경은 너무나 중요하다. 내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은 한국 있을 때 했던 일들을 자랑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했다. 부모님들의 사업이 바빴기 때문에 허구한 날 새벽5시 정도가 되어서야 귀가를 하곤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천국 이였다고 했다. 귀한 자식이 해 달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고 돈으로 해결을 다해 주었다고 말을 하면서 집에 오면 공부라는 것은 생각도 아니하고 컴퓨터와 거의 붙어 살다 시 피 하였다고 했다. 컴퓨터를 할 때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했는데 집에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걸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다. 단 5분이면 채팅으로 여자를 20명은 꼬실 수 있다느니…. 이런 것들을 자랑 삼아 말하곤 했다. 우리집 교육 방법은 방과 후 저녁 식사를 하면 모두 책상으로 가야 한다. 그만큼 공부 하는 아이들은 시간이 아깝다고 스스로들 그렇게 한다. 영어로 공부하자니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날마다 들고 오는 숙제량은 엄청스레 많다. 그래서 보통 12시까지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 시간에는 자신의 침실로 올라 갈수 없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숙제와 관련된 문제라면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하지만 단 한국에 있는 친구나 집에 전자 메일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2 시간씩을 주고 있고 전자 메일 수신 여부에 대해서는 매일 가능하도록 규율을 정해 놓고 있고 컴퓨터를 통해 게임이나 체팅은 엄두고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토요일은 일주간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자유 시간으로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형 몰이나 극장 등 아이들과 논의 한 후 선정하여 단체 생활로서 즐기고 돌아온다. 마찬 가지로 일요일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 참석을 하거나 숙제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이니 이 남자 아이는 사실 우리집이 지옥 같았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 아이 아버지가 컴퓨터를 개별적으로 사 주려고 하길래 남편은 반대 했었다. 그러기 전에 남편께서 아이에게 컴퓨터를 산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동 사무실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야기가 자신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고 자신의 방에 설치를 해 달라는 것이 였다. 한마디로 남편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남편이 한국에서 돌아왔고 며칠 후 이민 신청을 해둔 남편 친구가 오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공항 픽업을 나갔고 그는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업할 때 만난 사람이라고 자기 친구와 함께 왔다. 며칠을 우리 집에서 지낸 12월 1일 이였다. 우리 집에서 거의 10개월 정도를 같이 생활해온 아이 하나가 학교 곁으로 아버지가 이민 신청 중에 있기 때문에 곧 들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를 가는 날이다. 그들의 경비를 줄여 주기 위해서 남편이 회사 직원에게 부탁을 해서 트레일러가 달린 차와 우리 집 벤으로 이삿짐을 실었다. 이날 따라 유난히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 보라가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를 했다. 이삿짐이 오후 10시경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이사 짐을 다 옮기고 난 뒤 냉장고, 화장실,스토브 등을 깨끗이 훔쳐 주고는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 날 이사를 했으니 아마 부자가 될 것이라고 농담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아파트 관리 사무실로 가서 우리가 미시사가에 왔을 때의 그 어려웠던 일이 생각나서 그들이 이 아파트에서 살수 있도록 사회 보장 카드를 복사하고 은행 카드를 제출하여 이들에 대한 보증서류에 싸인 을 해 주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전화가 없었다. 짐이 도착하면 해주기로 한 전화를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어서 남편은 차를 몰고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이삿짐이 도착을 해도 이삿짐을 아파트 관리인이 받아 주질 않는다고 해서 이삿짐이 새로 되돌아 가고 있는 중 이였다. 남편은 그들이 이불 하나 없이 그곳에서 자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다음날 남편은 하루종일 그 집에서 이삿짐 정리를 해 주었고 나는 집의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그곳엘 가질 못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남편은 그 집엘 자주 갔다. 왜냐면 아직까지 그들은 운송 수단이 없었고 아직 이곳 생활에 미숙하기 때문에 도와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하고 또 잘못되면 가서 바꿔 오기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집에 와서 나에게 별로 듣기 좋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남편도 잘 알고 있는 다른 친구의 딸과 자신의 적은 딸이 이곳으로 유학을 오게 되어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고 12월 20일경에 공항에 픽업을 나가야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유학 수속을 하는데 하루 이틀 소요만 되는가 거의 한달 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들이 오기 며칠 전에 이야기 하는 저의를 몰랐다. 남편은 그래도 친구라고 표현을 안 했지만 나에게는 심히 기분 나쁜 일들이었다. 남편은 그들을 위해 공항 픽업에서부터 나이아가라 폭포 및 토론토의 유명지를 돌아 다니며 이들의 관광을 시켰고 뒤 늦게 온 아이의 책상과 가제 도구를 일일이 돌아 다니며 값싼 집을 찾아 구입하여 집으로 실어다 주고 정리를 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집에 막내둥이의 아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류 수속은 다 끝이 났고 비행기 티켓을 구입 하려니 없어서 여행자 티켓을 구입하여 벤쿠버를 거쳐 관광 후 이곳에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은 금번에 오는 아이는 현재 있는 남자 아이와는 나이 나 학년이 같지만 공부는 무척 잘 하는 아이 이니까 남자 아이와 많은 비교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 아이 앞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사실을 흘려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긴장하는 것이 밖으로 표출 되었다. 우리집의 막내둥이는 부모와 같이 집에 도착하여 하루 저녁을 부모와 같이 이곳에서 밤을 맞이 하고는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가셨다. 며칠을 지나 막내둥이는 학교에 입학을 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우리집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음을 피부로 느껴졌고, 우리집에서 학교 옆으로 이사를 나갔던 자매와 우리집에서 현재 살고 있는 오누이와의 석연찮은 예기가 흘러서 내 귀에 들어왔다. 우리 집에 있는 남학생은 공부를 더 힘들어 했고 또 다른 아이들까지 공부를 방해하여 남편이 주의까지 준 상태였다.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숙제 때문에 공부하러 모두 지하실로 내려갔고 나는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전화 벨이 울려서 전화를 받아보니 오누이의 엄마였다. 음력 설 경에 아이들 아버지가 캐나다에서 사업에 관한 전시회가 있어 방문 오는 김에 아이들을 보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전화가 너무나 반가웠다. 왜냐면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기 때문 이였다. 아들이 이곳에서 적응을 못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와서 많은 도움을 주고 갈 것을 부탁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자기 딸 아이에게로 돌려 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은 공부하는 시간이라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기에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샤워를 한다고 엄마와 통화를 못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이곳에서는 전화 요금이 비싸니까 엄마가 전화해 주기로 되어 있어 그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은 전부 공부한다고 여념이 없는데 넌 한국에 전화를 공부 시간에 하느냐고 묻고 간단히 통화하고 공부하라고 부탁을 하고 거실에 있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러고 10분 후에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였다. 전화기 수화기를 내 귀에 갖다 대는 순간 나는 심장은 멎을 것 같고 온 몸의 피는 꺼꾸로 쏟아 질것만 같았다. 남학생이 숨이 끊어 질려는 목소리로 나를 살려 달라고 호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게 무엇이 잘못 되도 크게 잘못 되었구나 싶어 그 다음 내용을 숨죽여 가며 듣고 있었다 그 다음 내용을 들었을 때 나는 이 문제가 우리집 내용인 것을 파악하게 되어 더욱 까무러 칠번 하여 손으로 입을 막고 계속 듣고만 있었다. 갈수록 우리집에 대한 험악한 소리가 나왔다. 14세 된 소년의 입에서 이러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기들은 우리집에 속고 왔으며, 악마들이 살고 있는 곳이여 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이러다가 내 머리 뚜껑이 열리면 이 집을 폭파 할지도 모르니 빨리 자기를 구하러 캐나다로 오라는 것이 였다. 나는 그 내용을 듣고 수화기도 제대로 놓지 못한 체 앙금 앙금 기어서 남편을 불렀다. 그리고는 까무러쳐 버렸다. 내가 눈을 뜻을 땐 우리 두 딸아이가 나의 온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 남학생은 통화를 끝내고 지하 우리 딸아이의 방에는 없었다. 나는 전화 통화 내용이 영화에서나 나오는 주먹 세계에서나 쓰는 그런 말이 14살 짜리 의 소년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꾸중을 하고 또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함을 지르면서 한국에 있는 부모와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나는 그들과 통화를 하면서 하루 빨리 캐나다로 와서 문제 해결을 할 것을 요청했고 한시라도 이들과는 무서워서 같이 못 있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모두들 남에 자식 잘 키워야 본전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이제는 내가 계획하고 있던 대로 아이들을 키울 용기도 나지 않고 자신도 없었다. 앞에서 약간 언급을 했듯이 우리 집에서 나가 학교 옆에서 살고 있는 남편 친구의 아빠와 그 딸이 이들에게 접근해 이들의 뒤를 봐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미 한국에서 이들 부모들이 만나서 모정의 계획을 갖고 있었던 걸로 들어 났다. 이 오누이들의 속 사정은 이러했다. 정말 열 자 깊은 물 속 깊이는 알아도 단 한자 안 되는 인간의 속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한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오누이들은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같은 가족 이지만 그 집의 아빠는 아들 편이고 엄마는 딸 편이였다. 가족을 편으로 가른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실지가 그랬고 엄마는 딸 아이의 비리나 나쁜 행동을 감추는데 연연했고 이를 잘 아는 동생은 항시 시한 폭탄과 마찬 가지 였다 한다. 어느날 교정에서 중국 학생으로 부 터 담배를 빌려서 피우는 것을 우리집에 있는 한 아이가 목격을 했다고 한다. 담배 한번 피우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학생이 담배를 피울 정도가 되면 벌써 같은 또래나 주위에서 우선 그를 바로 보지 않는 말이 된다. 그런데 동생이 누나의 그런 행동을 보고 참지 못해 교정에서 누나에 대한 과거사를 떠벌리고 다녔던 것이다. 우리 누나는 중학교 때부터 이곳에 올 때까지 담배를 피웠던 골초이고, 일지매라는 단체원으로 행동해 우리가 살고 있었던 지역에 가서 물어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또 캐나다에 오기 전에 사귀던 남학생과 언약식을 했다는 등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이런 말들을 교정에서 동생이 하고 다니니 그 소문이 꼬리를 물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았고 또 우리 부부가 이러한 상황을 알까 봐서 하루 빨리 우리집을 나가야 했다. 누나는 동생 말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는 아빠가 그렇게 미웠고 이 아빠는 딸 아이의 삐 뚫어진 행동이 못 마땅해서 닥치는 대로 폭행을 하였다고 했다. 학교에서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니 누나는 동생에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다그치니 동생은 우리집을 악마에 집에다 비유하며 자신들의 탈출구를 위해 동생을 이용한 아주 무섭고 대담한 자작극을 벌렸든 것이 였다. 사실 나중에 안 일이였지만 이 오누이의 아빠는 딸아이의 비행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단지 남학생 2명 정도를 사귀는 그 정도 였다. 그러나 그녀의 엄마는 이 딸아이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이 벌였든 이런 일들이 누나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또 하나의 구세주 였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30여분에 이를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자그마한 아파트에 오누이 둘 만이 자취를 하며 좋아하는 컴퓨터로 밤을 세우며, 사귀고 싶은 남자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게 가끔씩 들려오는 뉴스 일뿐이다. 이 아이들과 관련된 더욱 경악 할 만한 일은 이민 신청 중에 있는 남편 친구였다. 자신의 아이를 우리집에 부탁했을 때 정말 사업에 실패하여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여겨 그 아이는 생활비도 다른 아이에 비해 삼분에 일 정도 밖에 받지안했고 행여 마음에 상처를 주는가 싶어 다른 아이들 보다 신경을 더 많이 썼고, 우리 집에서 나가 안정될 때까지 남편이 진정으로 도와 주었던 남편 친구가 캐나다에서 평이 좋지 않는 이민 브로커와 결탁을 해서 이 아이들의 책임도 지지 못할 정보와 행위를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남편은 이와 영원한 결별을 해야 했다.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설명을 했다. 지나온 과거사를 생각해 보니 항상 그는 나를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제물로만 생각했는 것 같고 진정한 친구의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내가 평 직원으로 있을 때 소식 하나 주지 않다가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땐 언제나 중간 다리 역할만 나에게 부탁 했을 뿐 이였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과거사와 나의 현재사를 비교 해볼 때 한국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는가 . 자기에게 필요성을 느낄 때만 웃음 지으며 친구라고 부르짖는 이는 분명 친구다운 친구가 아니라고 남편은 열변을 토하면서 그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하기로 선언했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자주 한국으로 부 터 유학에 대해 전에 근무했던 직장 동료들이나 동창, 동기 등의 사람들로부터 유학에 대한 상담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보고 느낀 유학생활에 대한 진상과 영어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설명 하면서 다음의 말들을 덧붙여 주곤 한다. 한국에서도 공부를 수준급으로 했다면 적응에 별 어려움이 없이 이곳에서도 공부를 잘하고 자기가 목표하는 목표치 까지 도달하여 성공하게 된다. l 유학은 공부하러 오는 곳이지 여행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 l부모의 강요에 의해 오는 유학은 100% 실패로 가는 지름 길이다. l 가능하면 부모가 알고 있는 지인과 함께 있든지 아니면 부모와 동반하여 유학을 하라. l 유학생들이 쓰고 있는 용돈에 대해 그 지출 경위를 확인하라. 이러한 모든 말들은 실지 내가 이곳에서 경험하고 보고 있는 상황을 토대로 적은 것이다. 나는 요즈음 정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보면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살아질 때 까지 그들을 응시하여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우리 집에 있는 남편을 포함하여 자식, 남편 친구의 딸 또 조카 등과 같이 시간만 있으면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이러한 대화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미연에 방지도 해 줄 뿐 더러 화목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보약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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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남편이 드디어 직장을 잡다
경험과 기술을 중시하는 남편의 캐나다 에서의 직업 남편은 한국에 근무할 당시에 암센타의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그 당시 업무에 성실함이나 진취도에 대한 평가에서 직장의 귀감이 될 정도로 자신의 일에 대해선 무척 애착을 갖고 성실히 일을 해 왔다. 하지만 캐나다에서의 제 2의 출발선을 무역업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케네디언 교회에서 만난 사업자와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의 원인도 있지만 그 업무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운임비용, 창고 세, 상품 대금 등의 일부를 회사 직원으로서 부담해야 된다는 사칙을 반대하여 그 업을 그만 두었다. 그는 평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피드백 될 문제를 잘 짚고 결정 했을 것으로 나는 믿었다. 나 역시 그만 두는데 동조를 했지만 아직 까지 우리는 장사라는 단어를 써서 사업을 해본 유능한 사업자가 아닐 뿐 더러 그런 경험도 없고 그곳에 투자할 만한 그런 여유 돈도 충분치 않다. 그래서 남편은 안정된 직장 찾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 무료로 훈련 시키는 Job Finding Club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한달 여에 걸친 직업의 정보나 이력서 작성법, 목표 직업에 대한 접근 등등에 대해 배우고 그리고 우수하게 이수를 했다. 이수를 하고 난 이후부터 매일 신문을 사들 고 들어와서 자신이 원하고 져 하는 직업 분야에 이력서를 작성하여 Fax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전자우편을 이용하여 보냈다. 아마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답이 오는 곳은 없었다. 나중에 다시 자신이 이수했던 담당자와 상의를 했다. 남편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난 뒤에 이력서에 나타난 학력이나 내용 등은 카나다에서 별로 회사에 채용 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이라고 답해주고 수정 할 것을 제시해 주었다. 그랬다. 이나라는 학부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채용할 사람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술로 인한 경험도 는 몇 년이 되었고, 일에 대한 성취도 또 경험에 유사한 발전된 모델들을 배우려는 자세가 포함 되어 있느냐는 게 제일 Top Issue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안 사실 이였지만 한국에서의 모든 것은 다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은 많은 고민을 했다. 평소에 당신은 자연을 너무나 사랑했고 자연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무었이든지 하곤 했다. 자신의 취미로서 분재나, 야생화 가꾸기, 난 재배, 공간이 없는 아파트에서 정원 가꾸기 등 한국에서 실지 프로 이상의 실력을 갖고 많은 집에 혜택을 주곤 했다. 내가 생각 할 때는 천부적으로 그는 창조성 이나 미적 감각 등이 뛰어나 그 계통으로 공부하면 훌륭한 우리나라의 예술인의 한사람 으로 지금쯤 자리 할 수 있었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력서 수정을 한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다. 이력서를 새로 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수정 하는 거면 몰라도 어떻게 통째로 모두 변경이 가능할까 하고 의심을 했다. 그러나 남편의 설명으로는 내가 배운 모든 것 들을 이 나라에 적용해서 직업을 구하려면 평생 못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이 좋아 하든 정원 가꾸기 및 디자인 설계 등은 어떤 문제라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 방면을 중심으로 이력서를 쓰는데 대학 졸업 및 경험을 조경 혹은 정원학과로 하고 자신이 취미로 했던 분재나, 좁은 공간에서의 정원 창출이라는 이런 창조성을 겸해서 이력서를 작성 한다면 좋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일을 밀어 부쳤다. 3-4군데 이력서를 제출을 했을 때 당장 전화가 와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사실 여러 곳이 있었지만 제일 이 곳이 마음에 들어 했고 분야도 다양히 갖춰져 있고 규모도 아주 큰 회사였으며 집에서 고속도로로 약 10여분이면 가능하고 해서 남편은 인터뷰에 응시 하겠다는 의사를 비추고 그날을 기다려 왔다. 하지만 남편은 다소 걱정하는 눈빛 이였다. 그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영어 지식이 짧다는게 문제 였다. 일반 의사 소통은 문제 없지만 그 분야는 전문 분야이기 때문에 질의 내용에 답변을 하기가 문제라는 것이다. 남편은 인터뷰 날짜가 결정되자 마자 다운 타운에 있는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조경과 정원에 관한 전문 서적을 사왔다. 그리고는 밤늦게 까지 그곳에 있는 전문 용어를 외우는 것이 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서도… 중얼 중얼. 드디어 인터뷰 날이 였다. 나는 속으로 제발 당신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를 희망하는 기도를 올렸다. 아침에 나의 성의를 다하여 아침을 마련하여 상을 차렸다. 우리 모든 아이들에게 오늘은 이 집의 대들보 이신 아버지와 아저씨가 인터뷰를 하러 가는 날이라고 너희 모두들 마음속 으로 빌어 드려라고 아이들에게 주문을 했다. 남편의 인터뷰만 마치고 오는 시간만 기다려 졌다. 2시간 후에 남편은 돌아왔다. 그리고 지원자가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케네디언과 같은 완벽한 영어 구사력도 못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고용한다는 것은 좀 무리지 않겠나. 그리고 나이도 이제 그들 보다 한참 많은데 하고 말 꼬리를 흐렸다. 그렇지만 어떤 질문을 했고 진행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졸랐다.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인터뷰 시에 이력서를 참작하고 이미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문에 형광 펜으로 줄을 그어 놓았었고 학교 졸업과 경력에 대한 질문에 이어 디자인 부문에서는 실지 모의 실험인 모레와 바위 및 나무를 내어주고 동서남북의 방향을 위주로 정원의 디자인과 더불어 나무와 꽃과 정원석을 놓아야 할 위치 등을 실행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이 였다고 했다. 위치 선정을 다 끝내고 난 뒤에 당신은 부언의 설명으로 이제는 캐나다도 유럽 스타일의 정원에 대해서 서서히 실증을 낼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아시아 즉 일본식 스타일의 아기자기한 정원과 유럽 스타일의 화려함을 겸해서 창작이 되어져야 한다고 설명을 했더니 사장이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내로 가부 결정을 드릴 테니 수고했다고 다음날 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지금 당신이 헤어질 때 사장이 뭐 라고 했다고요 하고 다시 물었다. See you next another day라고 영어로 또박또박 나에게 말을 했다. 그렇다 나는 기뻤다. 이는 희망적인 말이다. 만일 남편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왜 다음에 보자고 했을까? 이곳의 평범한 인사란 말인가? 너무나 헷갈리는 말 같았다. 그 이후에 남편과 나는 집에서 꼼작 을 아니했다. 시장도 나 혼자 보러 다녔고 오직 전화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오전 9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 수화기를 들었는데 영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든 일을 모두 멈추고 바싹 다가 갔다. 회사에서 당신을 채용하기로 결정했고 정확한 업무 시작일은 4월 1일 부 터이고 계약을 위해 며칠 후에 나와야 하며 끝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당신에게 듣는 순간 나는 당신이 얼마나 위대해 보였는지 몰랐다. 당신은 이 먼 외국 땅 까지 와서 이 나라 사람도 구인,구직이 힘이 드는데 영주권을 손에 잡은 지 1년도 채 안되어서 직장을 그것도 케네디언이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이건 하나님이 당신을 이끌어 주셨고 복과 행운을 전부 주셨기에 가능 한 것이라고 나는 설명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더욱 존경스러워 보였다. 우리 집은 남편의 케네디언 회사 취직으로 인해서 더욱 활기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다소의 변화가 일게 되었다. 우선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을 혼자 해야 하고 집안의 잡다한 세금정리,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상담을 혼자 다 해야 하는 다소의 일에 대한 로딩이 걸리게 되었지만 그건 기쁨으로 충당해 낼 수 있는 문제 였기에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기쁨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제일 먼저 전했고 그들은 연일 축하를 해 주었다. 그리고 미시사가에 있는 조선생님댁과 토론 토에 사는 아빠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들로부터 축하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너무나 행복 했었다. 남편은 4월부터 직장 엘 나갔는데 한달 정도는 업무를 익히기 위해서 회사가 관리하여 계약을 맺고 있는 모든 곳을 선임자와 함께 일을 배웠다.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남편을 반겨 주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남편보고 당신은 Lucky Guy라고 얘기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제일 처음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 하기를 올해 채용당시 남편이 지원한 자리는 무려 150매의 이력서가 경쟁한 자리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우리는 한국인의 피를 가졌지만 너무나 자랑 서러움이 전에 보다 더한 뿌듯한 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편의 직장에서는 알게 모르게 남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 보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직장을 구할 때 반드시 References라고 하여 이 사람을 보증할 참고인을 제출을 해야 한다. 우리와 같이 한국인으로서 이민을 와서 이곳에서 보증인을 세우려면 정말 힘이 든다. 또 가능하면 케네디언으로 보증인을 세우라고 한다. 남편은 우리가 사는 동네 주위에서는 이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참고인을 설명하자면 우리가 지금 사는 이 동네로 이사를 온 한달 후 즘에 남편은 우편물을 가지러 동네 어귀로 가게 되었는데 그 길을 지나치다가 잔디를 깎고 계신 한 케네디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편은 그분에게 다가가서 얼마 전에 이사를 온 저기 사는 누군데 라며 인사를 올렸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취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다고 한다. 이분도 너무나 부지런 하신 분이다. 하루도 일 없이는 못 산다고 했고 남편과 모든 것이 꼭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편을 지나치면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해 보기는 처음이라 이야기 하면서 당신에 대해서 참 호감이 간다고 전하셨다. 그리고 자신도 집에서 나무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만들기를 좋아 한다고 하면서 자기집 창고에 가보자고 하여서 그곳에 갔다. 그곳에는 공구에 천국일 정도로 많이 수집을 해두시고 계셨다. 옆에 있는 테이블이나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혹시 이런 공구가 있느냐고 묻고는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전기 톱을 박스 채로 그냥 주시는 것이 였다. 이를 계기로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내가 어려울 때는 우리 집의 무슨 일이든지 도와 주시고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래서 만만 할 때 잘 부르는 한국적인 정감 나는 소리가 바로 “ 형” 이 아닌가 그래서 그분을 남편은 형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출발에서 그분은 기꺼이 남편의 참고인이 되어 주셨고 다른 한분 은 전에 무역업을 같이했던 직원인데 그분 역시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현직의 헤밀턴 시장님의 공직 차를 몰고 있는 공무원이 되었다. 이 분이 남편의 두 번째 참고인이 되어 주셨고 이분들에게 남편의 회사에서 남편에 대한 주위에 평 등을 수집했던 것이 였다. 한달 정도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면서 실제의 일들을 현지에서 주고 실행하는 것을 몇 차례 했고 한번은 회사와 계약이 채결이 되어 있는 지역 최고 부호의 집의 정원을 돌보기 위해 몇몇 직원들과 가게 되었는데 그 집 주인이 정원사를 찾는 것이 였다. 주위의 직원들이 나를 추천 해 주어 주인의 말과 생각을 토대로 작은 정원을 꾸며 주게 되었다. 그분은 대단히 만족하다는 말을 했고 매주 와 달라는 것이 였다. 자신이 직접 사장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나를 채용한 사장님은 그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미 나에게 맡길 장소를 선정을 해 두었다는 것이 였다. 그런 일 등을 해서 남편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달 부 터는 암센타와 병원이 함께 운영되는 종합병원의 주임 정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이곳에서 남편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꽃을 심고 가꾸고 전지를 하며 주변 환경을 많이 개선하여 병원의 직원들로부터 아주 호평을 받게 되었고 남편이 관리하여 가꾸고 있던 꽃밭과 나무와 연관 지어 회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 선정 되었고 온타리오주에서 심사하는 Landscaping & Gardening 부문에서 Best Place로 선정되기도 했다. 남편은 이를 계기로 입사한지 채 1년도 안되어 2번의 봉급 인상 이라는 선물을 받았고 날로 회사로부터 코리언 Frank Kim에 대한 인정을 확실히 받고 있었다. 남편의 일은 보통 3월 중순경에 시작이 되어 12월 초순이면 일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는 겨울 방학이다. 카나다는 복지 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해 3월 중순까지 방학 기간 동안에 정부에서 관장하는 Employee Insurance로 부터 현재 받고 있는 봉급의 70%를 집으로 우송을 해준다. 나머지는 회사의 제량에 따라 다르다. 이는 평상시 봉급 수령 시에 이를 대비하여 회사에서 일정의 금액을 납부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이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너무 좋아한다. 이 방학 기간동안에 남편은 자신의 취미 생활을 소화 한다. 실지 업무를 하는 기간은 본인의 취미 활동을 하기에는 부족하고 여름 나름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Golf를 치기 때문에 겨울 동안의 이 기간을 무척 좋아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지하에 마련된 자신만의 취미실에서 올 중순에 있을 수석(인상석) 전시에 쓰일 좌대를 만든다고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나의 귓전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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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한국 체류시 이별과 인연들
한국 체류 10일 동안에 일어났던 영원한 이별과 인연들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입원하여 계시는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내가 도착 했다는 것을 알리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벌써 나의 볼기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환자는 주무시고 계셨지만 얼굴은 벌써 황달에서 흑달로 변해 있었고, 복수는 만삭이 된 임산부 같이 가득 차 있었다. 피부는 탈수를 경험한지 오래되어 뼈와 가죽은 따로 움직이고 있을 정도 였다.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나와 숙모는 밖으로 나와 손을 꼭 잡고 한참을 울고 난 뒤, 환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간암 환자 인지를 모르고 내가 도착하면 의사선생님과 논의하여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기를 희망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갑자기 8년 전의 악몽의 순간들이 나의 뇌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셨고 또 우리 현재 아이들 까지 나의 직장 생활을 위해서 돌보아 주시던 나의 어머님이 똑같은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 하셨었다. 그 당시 내가 병원에 근무 한다는 호 조건 하에서도 온갖 의학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단지 얼마간의 생명의 연장만 가져 올뿐 올바른 치료법이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정된 그 죽음 앞에는 의사 아니 그 보다 더한 사람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감히 환자에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산 사람의 도리일 수밖에 없질 않는가. 나는 금방 비행기에서 내려 시차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밤새 환자 옆에서 숙모와 간호를 하며 함께 했었다. 때는 3일 후면 추석 이었다. 환자는 추석을 지난 다음 다시 입원 하겠다는 의지를 비쳤기 때문에 그 바람대로 환자를 퇴원 시켜 드리고 내일 댁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는 다른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저 시어머님과 친정에 나의 10일간의 일정에 대해 계획을 알려 드렸다. 그리고 저녁에 약속이 있어 눈에 잠이 쏟아 지는데도 불구하고 약속 장소를 향했다. 약속 장소에는 남자 두 분과 여자 한분 이 나와 있었다. 여자분은 내가 알고 있는 남자분과 부부 사이였고 다른 한분은 직장의 직원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남자분과의 만남은 내가 병원에 재직 할 당시 이분의 어머님께서 위암 선고를 타 병원에서 진단 받고 수술을 위해 병원을 알아 보고 있던 중 나의 후배의 소개로 나를 알게 되어 수술도 하게 되고 입원 당시 많은 배려를 해준 덕에 그의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신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이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이분들을 만나려고 약속을 했는가는 우리가 이사를 하고 그곳의 문화생활이나 이웃을 알고 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집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케네디언 장로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에디라는 무역업을 하는 분을 만났었다. 그래서 남편과 에디라는 분이 무역업을 하게 되어 내가 한국에 갈 때 몇 관심 있는 품목에 대한 정보를 구해 달라기에 나는 남편 업무를 대신해서 이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사업 규모가 전에 보다 많이 크지게 되었고 상품에 대해서도 생산할 계획을 직원과 합세하여 나에게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 자기 집에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있는데 캐나다로 유학할 길이 없겠느냐고 부인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사실 현재 조카를 비롯해 남편 친구 딸 둘을 캐나다에서 거두고 있다고 말을 하고 유학에 대한 현실과 적절한 연령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 분은 부인의 말을 가로질러 유학을 보내면 적은 아이를 보내야지 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나의 직감으론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신이 아닌 이상 이 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에 대해선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는 자매가 있다는 것 이였다. 동생은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 이라는 것이 였다. 그리고 만약 유학을 가게 된다면 누나가 동생을 잘 거둘 수 있어 아무래도 적응도 빠를 것이고 등의 좋은 말을 해 줬다. 나는 그런 깊이 있는 의향이 있고 남매를 보내고 져 하신다면 내가 다소 힘은 들겠지만 내일 아이들을 한번 보고 난 뒤에 결정을 하자고 말을 끝내고 이야기를 돌려 무역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리고는 헤어졌다. 다음날 나는 없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가 거둬야 하는 아이들이 될 것 같아 그 집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약 한시간 동안에 대화를 거치는 동안 말도 없는 수수한 아이들로만 나의 인상에는 비쳐졌다. 그래서 없는 시간에 얼른 그 댁에 그렇게 하겠다고 알리고 준비할 서류랑 접촉할 에이전트 등 해서 정보를 남기고 나는 나의 바쁜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나는 병원으로 가서 안동에 퇴원해 계시는 시숙님을 위해 각종 영양제 및 약을 챙겨 당지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밤새 간호를 하면서 의식을 갖고 계시는 시숙님에게 이날까지 우리를 보살펴 주신 은혜랑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하루 밤을 꼬빡 세웠다. 나에게는 이게 시숙님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추석 준비를 위해서 나는 시댁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핸드 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나의 귓전을 노크했다. 나는 잠결에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숙께서 각혈을 해서 구급차로 후송을 하고 있는 중이니 급히 병원으로 나와 달라는 전갈 이었다. 갑자기 피곤함과 잠은 사라졌다. 결국 올 것은 왔구나 싶은 감이 나에게 와 닿았다. 밤 11시경의 밤 공기는 이제 겨울을 준비 하는 듯 차가워 지고 있었고 내가 응급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구급차는 도착 하였다. 숙모님의 다급해진 목소리는 그저 큰일났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진정을 시키고 평소 잘 알고 지내고 있던 시숙의 담당 주치의 댁으로 전화를 내었다. 위급 상황을 전하니 그는 레지던트에게 자기가 도착할 때 까지 응급 처치를 하고 곧 바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내 도착 하셨다. 초를 다투어 내시경으로 혈관이 터진 위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막고 있었지만 너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속수 무책 이었다. 담당 주치의의 인상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점점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 소생을 위해서 환자 위에 의사가 올라가 소생법을 시도 했지만 이미 환자는 숨을 거두고 있는 중이였다. 나는 기도했다. 시숙을 위해서 “ 하나님 이시여 생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몸바친 나의 시숙을 천국에서 받아 주소서” 나는 남편 대신 장례식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대표 인사를 할 정도로 책임이 막중하였기 때문에 나의 다른 일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고인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야 완공시킨 아름다운 시숙의 집을 뒤로 한 채 쉴 사이도 없이 다음 계획을 진행하기에 마음이 바빠 있었다. 너무나 바쁜 일정이다. 다음은 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도 만나야 하고 남편 사업을 위한 자료 때문에 부산까지 원예 공장도 둘러 봐야 하고 너무나 시간이 빨리 흐른다. 우선 부모들은 밤에 만나기로 하고 남편 사업에 관한 일부터 마무리를 지우기 위해 부산에 있는 원예공장에서 나는 남편이 수입할 사진이랑 또 각종 자료들을 수집했다. 내가 보기에는 젊은 사장님으로서 너무나 패기가 있고 자신이 만든 모든 제품에 대해 아주 자신 만만해 하시는 것이 였다. 그리고 광고시에 혹시 사용될지 모른다고 또 많은 셈풀도 주셨다. 밤에는 우리집에 기거하는 부모들을 만나 아이들에 대한 근황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 마다 부모들로부터 인성이 예민한 시기에 부모도 감당하기 어려운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는데 대한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그렇게 듣기도 좋았고 또 이들을 위해서 나의 더 나은 최선을 다해서 훌륭하게 키우리라는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지나가 버렸는지 모를 10일의 기간은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날들 이였다. 캐나다에 돌아와 보니 이제 내가 없어도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엄마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잘 있었고 학교 공부도 성실히 하고 있었다. 이제 내 마음이 좀 놓이는 듯 했다. 한국에서 겪어야 했든 시차와 피곤함 들이 겹쳐져서 이곳에서 두 배의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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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꿈의 둥지와 그 주변환경
우리의 집과 주변 환경 내가 이민을 택하게 된 제일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가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교육환경 제공이 그 첫째였고, 또 남편이나 나 또한 제2의 인생을 선진국의 잘 된 복지와 문화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데 있다고 이미 앞장에서 밝힌바 가 있었다. 물론 유학 온 아이들도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데 기여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영주권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리 아이들의 학교 문제였고 우리 집에서 약 걸어서 10분 거리에 유명한 공립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 입학을 위해서 학교의 소개 책자를 보고 교장과의 인터뷰 날짜를 잡았고, 9월 새 학기부터 정식적으로 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입학 허가를 받았다. 두 번째로는 건강의료보험 신청, 사회보장제도 카드, 나의 운전 면허증교환 등을 했다. 나는 여기서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왜 우리집이라는 말을 강조 하였는지에 대해 나는 잠시 언급하고 져 한다. 캐나다 법률상 주택을 매입할 때 등기는 반드시 기혼자 일 경우에는 부부 이름을 다 올려서 등기를 하도록 법률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했다. 부부라 할지라도 상호 동의가 없으면 집을 매매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은 유색인종이 거의 살지 않는다. 소득 수준도 상당히 높아서 도심지에서 그런대로 화이트 칼라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사는 것이 상당히 조심 서럽기 까지 하다. 그리고 교통편도 자신의 차량이 없으면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루에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기 때문이고 반대로 자신이 차를 소유하고 있으면 10분내에 도심지 진입이 가능한 고속도로와 고향을 연상할 정도로 산을 가로 질러 온타리오주 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다는 Wilson 이라는 지방도가 있기 때문에 도심에서 벗어난 전원 주거지라고 보는 것이 이해 하기가 더욱 빠를 것 같다. 그리고 5분 거리의 남쪽에는 각종 식료품을 파는 대형 몰 들과 편의 시설인 우체국 및 은행들 그리고 소방서 등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 5분 거리에는 주요 공산품을 파는 대형 몰들이 있어 주거의 편의성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우리집은 대문과 담장 조차도 없다. 모든 게 개방되어 있다. 집을 지은지가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이 나라는 먼지가 많이 발생되지 않아 집들은 새 집 처럼 보이고 깨끗하며 범죄 발생률도 최저 상태이다. 10여분 거리에 자전거 트레일러가 원시림 보호 공원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휴일이면 이곳을 찾아 놀러 오기도 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로는 이 지역사회를 위한 컴뮤니티 센터가 아이들 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최신예 설비를 갖춘 아이스 링크와 스포츠 게임을 실내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해 두었고 봄부터 가을 까지는 대형 축구 잔디 구장 2곳이 붙어 있다. 우리집을 기점으로 최소 15분 거리 내에 약 20개 정도의 골프장이 산재 되어 있어 언제나 부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골프를 좋아하는 남편과 나로서는 금상 첨화가 아닐 수 없다. 오래 이곳에 살진 않았지만 백인 우월 주의자 들이나 인종 차별하는 막되 먹은 인간들은 아직까지 만나 보지도 당해 보지도 못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 도와 주려는 사람들 밖에 아직 못 보았다. 어느날 우리집에는 비보가 날아 들었다. 유학 온 학생 중 남편 친구의 딸의 일이 였는데 한국에서 자기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순간 우리집 모두는 실지 울음 바다가 되었는데 짧은 몇 개월 동안에 그만큼 정이 들었기 때문 이였다.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 주셨으면 하는 양친들의 의견 이였지만 나는 아이들을 거두고 있는 입장에서 반대를 하였다 이곳에 와서 적응 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또 학교의 공부도 너무 힘들어 하고 있는데 다녀 오면 슬픔 속에서 또 적응이라는 단계를 거친 다는 것은 아이에게 다소 무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리고 일단 맡겨 둔 아이는 내가 상황을 더 잘 아니까 나의 정책에 따라 줄 것을 호소하고 그곳 일은 어른 들끼리 잘 해결하고 시간 있으면 부모님 들이 아이들의 상황도 점검 해 볼 겸 한번 다녀 가시는 게 어떠냐고 제시 했다. 한국에서 살 때 보다 몇 배나 넓은 집 이여서 그런지 우리가 가져온 짐을 제자리에 위치 시켜 놓아도 모두가 썰렁해 보였다. 지하에서 2층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정말 힘든 이삿짐 정리 였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는 결혼 후 거의 20번 가깝게 이사를 다녀봐서 이사라면 어떻게 짐을 정리하고 싸고 배치할 지에 대해서는 정말 환하게 읽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서도 이사를 한다고 결정 되었을 때 보통 한달 전부터 짐을 하나씩 꾸려 빈 방에다 적재를 해 두곤 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이사와 서 쓸 수 있도록 모든 가구 등을 이미6개월 전에 주문을 해두고 이사 날짜에 맞춰서 배달 해줄 것을 부탁해둔 상태 였고 물건은 하루에 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 몇 가지씩 나눠서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에 등교 시켜 놓고 우리는 늘 이삿짐 정리 및 주변 정리에 너무 바빠 있었다. 이사를 한 일주일 후에 집에 유학 와 있는 조카를 제외한 세 명의 남편 친구들이 캐나다 우리집을 방문한다는 연락이 와서 나는 공항에 픽업을 갔다. 이사 후에 정말 바쁜 날 이였는데 이렇게 손님들까지 겹치게 되어 너무나 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항 픽업으로 공항에 여러 차례 와 봤지만 지금은 기 기분이 너무나도 달라 있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화장실 안내 판 까지 보이고 비행기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호적에 올릴 수 없었던 자식을 숨겨서 키우는 슬픈 사연을 지닌 어느 여인네의 공항 마중과 흡사하게 전 에는 나의 어깨는 움쳐려 졌었었고 왠지 남들과 같이 기를 못 피고 공항 마중을 나왔었는데 이제는 그 상황이 다른 나를 나 자신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른 기분 때문인가. 나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공항 안을 돌아 다니면서 한국인들에 괜히 말을 걸어 보고 싶기도 하고 나도 “ 영주권자 이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나의 마음은 전 과는 무지하게 달라져 있었다. 딸들과 눈물로 상봉을 한 이 아이들 아버지와는 학교 방문을 필두로 가까운 인근의 유명 지 여행을 일주일 동안 빡빡하게 다녔다. 나중에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하고 말을 건넸었는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아이들과 같이 갈수 있다면 몰라도 우리 끼리 만 가는 게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욱 할애 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목적이 아니고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과 그 환경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먼 이국 땅도 마지 않고 이곳까지 찾아오지 아니 했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만족한 상태로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되돌아 갔다. 유학생 아이들의 공부하는 단계가 올라 갈수록 아이들은 힘들어 했고 신경도 몇 배나 떠 쓰였다. 그리고는 자주도록 시간이 있으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점 등을 남편과 아이들과 상의하여 결론에 도달하면 곧 실행해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 친구의 조카는 학과 선정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이탈리아의 유명 옷 브랜드를 가져와서 한국에서 디자인하여 국내에 한정적으로 파는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부친의 사업에 필요한 의류 디자인 계통을 전공하고 져 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추구하고 져 하는 이탈리아 풍의 의류 디자인을 배우는 것이 캐나다 보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가지고 아이는 이곳의 학업을 중단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나는 생각했다. 어른들의 잠깐 짧은 착오로 아이들을 왜 혹사 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계기를 바탕으로 내가 키우는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 나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 아이가 캐나다를 떠나기 전 날 한국에 살고 있을 때에 남편의 가문에 큰 기둥이 셨든 시삼촌 깨서 당뇨와 간염을 지병으로 오랜 기간동안 고생을 해 오시다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근무하던 담당 의사 선생님께 연락을 해 보니 간에 문제가 생겨 아마 오래 생존 하시기가 힘들 것 같다고 전해 주셨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많은 정신적,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온 당신에게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예의 인 것을 알고 집에 모든 일들은 남편과 큰 나의 딸에게 부탁을 하고 예정에도 없었던 한국 행 비행기를 타고 이 아이와 같이 한국을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는 공립이고 또 이 학교는 ESL 코스가 없었기 때문에 케네디 언 학생들과 똑같이 모든 수업을 참관하고 청강을 해야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척 어려울 것이 예상됐고 그래도 이제껏 가르쳐온 모든 것을 바탕으로 훌륭히 남편과 잘 해낼 줄로 믿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는 동안 늘 이런 걱정만 들게 되었다. 이게 자식을 떠나는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나. 한국에 도착이 되어 나는 짧은 기간 동안에 같이 호흡을 나누던 이 아이에게 먼 장래를 위해서 굳은 일 좋은 일이 많았지만 긍정적으로 좋은 일만 인상에 남기 자는 말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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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낭보3탄과 함께 꿈의 둥지로
날아든 낭보 3 과 함께 꿈의 둥지로 아이들과 남편을 학교로 보내고 나는 식탁 위에 홀로 앉았다. 구수한 한국에서 가져온 녹차 한잔을 홀짝 홀짝 마시면서 식탁 창가로 내다 보이는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난히 아름다운 새들이 우리집 뒤뜰에서 옹기 종기 모여 놀고 있었고 한번씩 불러대는 노래 소리가 유리 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선율을 들렸다. 갑자기 한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는 한국의 까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캐나다는 그 까치가 없다. 나는 그 까치를 대신하는 길조의 새로는 카나다에서 어떤 새가 있을까 하고 생각 해 보았다. 아직 까지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한 내가 그런 문화까지 아직 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의 기분은 이상하다. 저 새들이 유난히 큰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우리집 뒤뜰에는 블루베리라는 버찌 나무가 있는데 새들은 그 열매를 너무 좋아했다. 아침 기상은 항상 새소리에 깨어 나곤 하였다. 그날 저녁에 한국에 있는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영주권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애태우게 기다리던 영주권 이였던가. 너무나 기뻤고 몇 만번을 외쳐도 부족함이 없던 이 세 글자가 아니던가. 잠시 나는 내 몸에 힘이 모두 빠지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뇌리를 지나가는 많은 일들 특히 이민자가 아닌 관계로 겪어야 했던 고난의 순간들 뒤에서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차를 들여 받아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보내 주던 일, 공항 이민관 과 한국 여자 통역 자원 봉사자와 합세 우리가 뭐 죄 지은 사람 마냥 심문 아닌 심문을 3시간 이나 받으며 우리에게 대하던 그 모질고 냉정한 그 얼굴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써가면서도 뜻뜻하지 못했던 우리의 입장, 먼저 이민 왔던 못 되 먹은 인간들의 영주권자라는 거드름, 아이들이 이제는 정식 학교에 가고 싶다는 투정의 말들 등등 이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나의 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이로 부터는 해방이다. 내가 정말 이곳에서 절대 절명으로 살아 나가야 할 과제 만 남은 것이다. 우리 집으로 이사를 가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열심히 교회를 다닐 것이고,열심히 영어를 배울 것이고, 열심히 이웃을 사귈 것이고, 그리고 더욱 열심히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훌륭히 키울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결심을 했다. 에이전트로부터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영주권을 붙이려 하기에 마침 이 시기가 우리의 보금 자리로 거처를 옮기는 날과 거의 맞물리게 되어 잘못하면 또 우리에겐 너무 중요한 서류들이 제차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사 갈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우리집의 전 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혹시 우리가 이사 가기 전에 서류 우편이 도착을 하면 꼭 좀 받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사를 하던 날 아침 우리 집에는 그 동안 남편이 이곳에서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 주려고 왔었다. 조선생님댁과 또 그분의 친구분 인 박 선생님, 페루에서 이민 와서 7년이 되었다는 아르만도씨, 불이 나서 내가 도와 주었던 옆집의 에쉬리의 아버지, 타운하우스와 아파트 단지의 매니저의 남편인 알비씨, 일전에 이사를 도와 주워 고맙다고 이사 차량을 연락 해준 루나씨의 고향 후배인 폼피씨 등 여러 사람이 우리의 이사를 축복해 주었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영주권 없이 이곳에 정착 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조 선생님 댁과는 이제 약 40분 거리 밖에 안된 곳으로 이사를 가지만 그래도 너무나 정 들었던 미시사가의 많은 날들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 오늘도 우리의 이사를 도웁겠다고 우리가 떠나고 난 자리를 청소하고 뒤차로 우리가 이사 가는 집으로 떡을 하여 오시겠다고 했다. 캐나다의 이사 문화는 한국과는 다소 좀 다르다 아니 확연히 다르다. 나는 이런 문화는 권하고 싶다. 이곳은 살다가 이사를 하게 되면 이사 짐을 다 싣고는 집안을 말끔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이사 들어 오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다. 그러나 한국은 청소를 하려면 비자루로 쓸면 복을 쓸어 낸다느니 하는 이상한 문화가 정착이 되어 있지 않는가. 이곳은 냉장고 안이며 방, 어느 구석구석 할 것 없이 먼지 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고 가는 것이다. 거의 1년 남짓 이곳에서 살았는데 제법 가제 도구들이 불어 있었다. 차 한대로 도저히 이사를 할 수 없어 운전 기사분 에게 두 번을 운송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러고도 너무나 싼값에 즉 그분이 도와 준다는 입장으로 우리의 이사 짐을 운송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남편은 인덕도 참 많은 편이였다. 우리의 보금자리에 도착을 했을 때 그곳은 한창 물건을 실어내고 한쪽은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집에 서류가 왔는지 만을 확인하고 곧장 변호사 사무실로 인수 열쇠를 받으러 갔다. 이곳에서 집을 사고 팔 때는 반드시 변호사가 중심 역할을 한다. 매매인과 매수인이 직접 거래하는 법은 없다. 매매인과 매수인의 변호사가 각각 따로 있기 때문에 변호사 끼리 연락을 하고 집 값이 완벽하게 지불이 되었는지, 집의 주 입구의 열쇠는 도착이 되었는지 등 집주인에게 무엇을 받고 주고 하는 이런 일은 없다. 반드시 변호사를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매매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갔던 것이고 그곳에서 우리가 구입한 집의 열쇠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의 가장 큰 일은 이사에도 있었지만 영주권 서류를 받아 쥐는데 그 뜻이 더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영주권이 가지는 비중이 컸다. 다시 우리 집으로 도착을 했을 때 아직 까지 계속 이삿짐을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주인집 아들이 나와서 노란 서류 봉지를 전해주고 갔다. 그렇다 얼마나 바라던 영주권의 서류가 내 손안에 들어 왔는가. 나는 너무나 행복 서러웠다. 남편은 우리 차 안으로 이 귀중한 서류들을 들고 들어 가자고 제의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 같이 개봉을 했다. 이 서류를 가지고 이민국에 가서 접수를 하고 랜딩 허가를 받으면 이제 100% 영주권자가 된다고 남편은 나에게 설명을 해 줬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로 왔다면 공항의 이민국에서 서류 절차를 다 수속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이민국을 어떻게 가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에 우리 비자 연장 신청을 했던 곳으로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해 본 결과 나이아가라 폭포에 있는 캐나다 이민국으로 가시면 되는데 차를 타시고 미국 국경 있는 곳으로 그냥 한 바퀴 도시고 캐나다 이민국으로 들어 가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대답을 해줬다. 작년에 아버님과 동생이 방문했을 때 우리는 미국 국경을 한번 통과한 전례가 있었기에 금방 이해가 갔다. 내일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월요일 날 수속하기로 결정을 하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캐나다 에서의 첫 우리 소유의 집에서 기분 좋게 아무 걱정 없이 꿈나라로 갈 수 있는 행복한 첫날이 될 수가 있었다. 일요일 날도 우리는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의 방 배정을 다 끝내고 나의 성격상 전 주인이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고 떠났다 해도 나는 다시 진공 청소를 하고 걸레로 훔쳤다. 이렇게 열심히 육체적인 노동을 해도 피곤 하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게 내 집이고 또 손에는 영주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라고 나는 나 혼자서 뇌 아려 보았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우리 4식구는 나이아가라를 향했다. 나이아가라 레인보우 다리 위에서 우리는 순서를 기다렸다. 국경소 입구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온 서류를 보여 주니 차를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류에다가 미국 입국 거절이라는 도장을 찍어 주면서 그곳에서 돌아서 다시 캐나다 국경소로 가라는 것이 였고 우리를 그곳 입구까지 안내 해 주었다. 우리는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국경소에서 랜딩 허가를 받았고 담당자는 아주 친절하게 농담을 섞어가면서 우리가 살 주소지 등등을 물었다. 서류 작성을 완전히 마치고 이민관 이 페이퍼를 접어 여권 속에 집어 넣으면서 만면에 웃음을 띄고는 캐나다에서 좋은 삶 사십시요 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우린 밖으로 나왔는데 아! 이 기분을 어디다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발걸음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캐나다의 정식 영주권자다. 그리고 영주권자로서 모든 혜택을 누릴 수가 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이 영주권이 너무나 크다란 정신적이고 때론 경제적인 이익까지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다. 그리고 이제는 편안한 나머지 아이들과 나는 농담까지 나왔다. 좀 전에 우리가 잘못 알고 실수한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 아이들이 여태 까지도 미국 비자 없으면서도 미국 땅 밟아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는 농담을 하고 있다. 사실 미국 국경 검문소를 가지 않아도 충분히 바로 캐나다 이민국을 바로 갔으면 될 수 있었는데 캐나다 이민국이 너무 작고 코너에 위치해 있어 다리로 돌아간다고 가는 것이 미국 쪽으로 가게 된 것 이였다. 그렇다 2000년 5월 28일은 우리가 캐나다의 정식 영주권자로서 새로 태어난 날이다. 그리고 이 날이 있으므로 나는 나의 서재에서 이렇게 나의 수기를 쓸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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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케나다에 날아든 낭보2탄
낭보 2탄 2월18일의 새벽 이였다. 어제 그리고 아래 이틀동안에 임시 렌트할 집 결정 때문에 많은 신경을 쏟았더니 피곤이 엄습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전화 벨 소리를 비몽사몽 간에 듣게 되었다. 큰 아이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지금 이 새벽시간에 캐나다에서 전화할 주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도 완연히 안 깬 상태 속에서 말이다. 그런데 난데 없이 큰 아이가 방에 노크도 아니하고 문을 후다 닥 열고 엄마! 하고 들어 와서는 서울 에이젠트서 전화가 왔는데 아빠의 이민 인터뷰가 면제가 되었으니 신체검사, P.R여권 그리고 Landing fee 이 모든 과정을 동시에 서둘러 하라는 통보였다. 이런 낭보가 어디 있을까? 우리 가족은 이웃 모두가 꿈속에 있을 때 그때 시간이 정확이 1월18일 새벽 4시였는데 환호를 지르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 그 기쁨을 이루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바라던 소식 이였던가. 아니 인터뷰 면제 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고 우리는 단지 인터뷰 날짜가 나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다고 생각 해 왔었다. 왜냐면 인터뷰 후에 이민을 오지 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호 조건을 갖고 있는 경우엔 100% 가능하리라고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가 면제 된 것은 우리에게 경제적, 정신적의 모든 부담을 덜어 주게 되었다. 실지 이민 신청할 당시에 인터뷰 지정 장소를 필리핀으로 했기 때문에 인터뷰 날짜가 잡히면 우리 가족 즉 작은 아이를 제외 하고는 모두가 필리핀 대사관으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으로 가면서 발생되는 3사람에 대한 비행기 티켓이며 또 숙소 및 식사 등에서 발생되는 비용은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이미 그곳을 다녀온 선배 이민자들에게 수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사 드렸다. 처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 감사 드렸고 다음은 캐나다 대사관에 참작 해달라고 서류를 잘 정리하여 보내주신 에이젠트에 감사를 드렸다. 실지 캐나다 대사관에서는 참작 서류를 검토한 후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항상 걱정을 하고 있는 한국 친지들에게도 전화를 내어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아침 일찍 조선생님댁에도 전화를 내어 이 소식을 알렸다. 그들로부터 축하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실지 내 큰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빠른 결정을 내렸다. 오늘은 이곳에 비행기가 뜨는 날이기 때문에 모두 한국을 가서 신체검사부터 시작하여,PR여권도 만들고 Landing fee도 내고 모든 서류를 마친 뒤에 우리집으로 올 예정으로 되어 있는 조카와 남편 친구 아이들과 들어 온다는 계획으로 일단은 비행기 좌석을 알아 보기 위해 LA에 있는 대한 항공 지사로 연락을 했더니 마침 스페어 좌석이 있어 예약을 해두고 아침부터 부산하게 짐을 꾸리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 간다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한국에 가면 자신들이 할 계획들을 미리 얘기하며 부산을 떨더니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남편은 이웃에 살고 있는 예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상황을 얘기하고 저녁에 공항까지 실어다 줄 것을 부탁했다. 짐을 꾸려 놓고도 한국가면 또 친척들으 선물이 생각나서 가까운 몰에 가서 여러 가지 선물들을 준비하여 가방 빈틈 사이를 채워 넣었다. 자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조 선생님 댁에 전화해서 우리가 없는 동안 집에 가끔씩 들러 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옆집의 예준 아빠는 벌써 우리의 집을 자신의 벤에 싣고 있었다. 그때 였다. 난데 없이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서울 에이젠트 ** 대리라는 분으로 부 터 전화가 왔다. 이번 전화는 내가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한국에 올 필요 없이 신체검사 며 모든 것을 카 나다 땅에서 다 해도 된다는 것이고 자신들이 보내 주는 주소를 바탕으로 이곳에서 모든 서류를 하라는 것이다. 신체검사는 어느 곳에서, 보내 준 주소로 Money order를 발행하여 대사관으로 보내고 , PR 여권은 캐나다 한국 대사관에서 모든 수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경비 지출하여 한국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였다. 나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더니 갑자기 우리 식구의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쪽에서는 한국에 가서 수속을 하자는 것이고 그래도 경제적, 시간적 모든 사료가 밝은 어른들인 우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수속 처리를 하겠다는 쪽이 였다. 그때의 아이들의 실망스러운 그 눈초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성장하여 나의 처지가 되었다면 그저 한국을 가는 것 자체에만 비중을 둘 것인가를…. 그렇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의 사고 방식은 차이가 난다. 우리는 아이들을 설득했다.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이며 또 한국에 갔을 때 주변 친척들에게 주는 피해며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하늘과 땅에서 소비되는 시간이며 일일이 예를 들어 가며 설명을 했더니 수긍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을 약속했다. 예준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의사를 전달 하였다. 예준 아빠도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너희들은 어른들의 굳은 심경을 잘 이해 못 할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집을 향했다. 다음날부터 무척 바쁘게 보낸 날이 되었다. 신체검사 지정 병원에 예약을 하니 신체 검사가 밀려 있어 1주일 후가 된다고 하고 또 신체 검사로부터 1 주일 후에 검사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검사결과 통보를 병원에서 직접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로 송부하여 각 해당 지국 대사관으로 송부 한다고 했다. 일단 신체 검사를 하면서 혹시 신체검사에서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담당 의사의 말에 따르자면 이상이 있으면 상세 검사를 위해 다시 나와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늘 검사 결과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1주일이 지나갔다. 병원에서 연락 온 사항은 전혀 없었다. 일단 안도에 한숨을 쉬었다. 다음은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 한국대사관에 가서 우리의 PR여권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리핀으로 Money Order를 발행하여 우리 식구들의 Landing Fee를 송부하였다. 그래 이젠 거의 안심이다. 우리는 이제 영주권만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자 하고 나는 나 혼자 중얼 그렸다. 실지 나의 기분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아직 완연한 영주권을 못 받아 쥐었지만 80% 정도는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과 비교 해볼 때 이는 비교가 안 된다는 말이다. 정신없이 보낸 2주후에 나는 피어슨 국제 공항으로 조카와 남편 친구의 딸들을 마중 나가게 되었다. 이전에 실지 나는 너무나 바빴던 것이 아이들이 오면 같이 사용해야 할 방들을 청소하고 또 남편과 내가 쓰던 방이 그 중에서도 제 일루 크고 좋았기 때문에 이방은 남편 친구 딸들이 사용을 하도록 준비를 했다. 사실 조카는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이고 그리고 남편 친구 딸들은 첫 객지, 부모를 떠나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해 줘야 한다는 나의 배려였던 것이었다. 또 우리는 이사 갈 때 까지 1층 거실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장실 사용이 문제 였는데 지혜롭게 사용 하기를 기대했다. 한국에서는 벌써 남녘에서 화신의 소식이 들려 올 때 이지만 이곳은 여전히 한 겨울을 아직 탈피 하지는 못했기에 밖의 날씨는 살을 애는 듯한 매섭고 차 거운 바람이 불어 왔다. 아이들 모두가 출구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각자의 손에는 인형과 선물 꾸러미들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 해 두었는데 아이들은 관심이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 부모와의 첫 헤어짐과 친구와의 먼 훗날 성공하여 만나자고 하던 약속들이 너무나 힘이 들었던지 각자의 얼굴에는 그렇게 밝은 표정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방들을 배정해 주고 이사를 할 날까지 조금 불편 하더라도 잘 지내 달라는 양해를 구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부탁을 했다. 너희들은 이곳에 공부를 목표로 온 이상 잠자는 시간 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더 길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이구 동성으로 “예” 라는 답을 들었을 때 무척 흐뭇했다. 그 다음날부터 아이들의 시차 적응을 위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비롯해서 북쪽에 얼음 낚시로 유명한 심코 호수, 카사로마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낮에는 각 몰을 다니면서 전시되어 있는 이 나라의 상품을 감상 하기도 하고 이들은 어떤 것을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도 그로서리 스토어를 다니면서 익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모두가 부모들 밑에서 이날 이때까지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온 아이들 이였기 때문에 남과 같이 사는 공동생활에 대해서도 인지 시켰다. 아이들은 서로 서로 상부하며 양보하는 미덕 속에서 공동생활을 배우고 이해 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서서히 터득해 나가고 있어 정말 보기가 좋았고 나의 마음도 푸근했다. 유학생들이 입학을 하는 날 우리 온 가족은 그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안에서 아이들에 대한 소개를 해주고 선생님들을 만나보며 그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제일 처음 아이들에게 이게 너희들의 학교라는 것은 소개 시켰을 때 아이들은 학교 건물만 보고 다소 실망하는 눈치였다. 캐나다의 대부분의 학교 건물은 한국과 같이 외부 장식을 거창하게 지어 놓은 것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학교 내부의 구조나 실험 실습 기자재며 속이 알차다고 보면 옳다. 이곳도 마찬 가지이다. 겉으로 건물은 너무나 볼 것이 없다. 한국의 여느 오피스 건물 같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남편이 아이들을 매일 데려다 주고 데려 와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길은 너무 멀고 한번 왕복하는데 실지 들어가는 자동차 휘발유 값도 카나다는 싸다고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형편 이였다. 그래서 남편은 그 대책으 일환으로 아이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다운타운 금방에 위치한 Salvation Army(구세군 교회)에서 정부의 보조를 받아 운영하는 ESL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편과 우리 아이들과 유학 온 학생들의 하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그곳에 등록하게 되었다. 이곳은 각 나라에서 온 이민자나 난민자 등에게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데 비지터는 적절한 수업 비를 내고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도 비지터의 신분 이였지만 남편이 그곳 선생님에게 현사정을 설명하니 이민 접수 file number가 있으면 되니 그걸 내일 가져 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남편이 수업 해야 할 Level Test를 치루였다. 이곳은 초급 반 1, 중급 반 2, 고급반1 해서 4 학급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우리 아이 둘과 남편이 같은 고급반에 Level Test를 통과하여 내일부터 정식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업시간은 아침 9시에 시작하여 오후 3시 30분이면 마치니 유학 온 아이들 마치는 시간이 3시40분이고 보면 거의 시간이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후 아이들이 파할 시간 즘이 되어서 우리는 학교 비지터 주차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아이들이 몰려있는 곳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모두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손에 낀 모양은 한두 번 그 행동을 한게 아닌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서로 안고 뽀뽀하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 보통 이였다. 나는 내가 너무 과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담배를 태우는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허깅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글 담배를 하다 보면 이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약과 마리화나에 노출 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의 문화는 이러한 난잡한 행위나 행동을 받아 들이는데 그렇게 관대 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엄한 관리자 밑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참다운 교육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내가 아이들의 교육에 가정 에서부터 신경을 써야겠다는 마음 가짐을 다시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첫날 첫 만남의 타 유학생들이 취한 이미지들이 지금 이순간 까지도 없어 지지 않는다. 유학생들은 부모를 떠나 감시 감독이 소홀한 이곳이 천국이다. 이곳이 그들을 위한 낙원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한국 보다도 훨씬 자유 서러운 모든 것 들은 이들을 유혹하는 연결 고리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공부에 흥미를 잃으면 모두가 유흥쪽으로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 수기 속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부모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부모들이여! 절대 일가 친척 없는 이곳으로 학생 혼자 절대 유학을 보내지 마십시오 하고 단호히 부탁 아닌 부탁을 보내고 싶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아이들에게 부모와 자식 관계 이상으로 키우고 있다. 아마 자신들의 부모 보다 더욱 엄하다면 정답이 될 것이다. 실지 주변에서 내 자식 키우기도 힘든 데 넘 자식을 키운다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은 수십 번 또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이 아이들을 만난 이상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대로 이들을 키우겠다. 그리고 이들에게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을 50% 씩 만을 배정 할 것이다. 우리 부부의 정직한 삶과 노력을 배운다면 이들이 후회 없는 자신들의 결혼 후의 삶이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저녁 먹이고 그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있는 남편을 볼 때 아이들이 이곳에 적응을 잘 해나가고 있다 싶어서 너무도 행복했다. 한번씩 나의 눈에 눈망울이 메이도록 하는 일도 있다. 아니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한국의 부모들이나 동생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받을 때 이들은 훌쩍이면서 울면서 통화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본인들이 보고 싶어서 일어나는 현상은 백번 이해가 가지만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섭섭한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걱정도 하고 또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눈 속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이다. 옆집에 살고 있던 예준아빠는 미국에 직장이 되었다고 미국으로 가야 된다고 인사를 왔다. 남편이 그들의 이삿짐을 싸는 것을 도와 주려고 했더니 자기가 취직된 회사에서 이삿짐 전부를 싸고 부치는 게 포함이 되어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부러운 한 대목 이었다. 지금도 가끔 전화가 오지만 이들이 그 동안 너무도 고마웠고 그리고 이들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함께하길 빌었다. 그 동안 우리 가족들은 주말을 이용하여 근처 Eldorado Park을 자주 찾았다. 이곳에서 일주간의 모든 스트레스도 풀고 아이들은 마음껏 그곳에서 뛰어 놀기도 하고 또 목이 터 저라 한국 가요들을 불러 보곤 했던 곳으로 자주 갔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참나물이나 고비 등을 채집하기도 했고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곳에서 먹기 힘든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아직까지 랜트 하여 살고 있는 타운 단지 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불을 피워 BBQ를 만들기도 어려웠고 해서 우리는 이곳으로 고기를 장만해서 항상 야외 BBQ를 즐겼던 것이다. 우리가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날 한국 에이전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 벼락 같은 소린가. 영주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아니 우리 큰 아이의 신체검사 서류가 빠졌다는 것이다. 정말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정 신체검사에 전화를 내어서 사실을 이야기 하고 지금 당장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확인을 하였는데 자신들은 한 봉투에 다 같이 붙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들의 이야기로는 아마 오타와 대사관에서 분류 도중에 미싱 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 서류를 다시 한번 카피 해서 부쳐 달라고 이것은 우리 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서류라고 우리는 사정을 했다. 다행이 담당자는 실지 이건 개인이 볼 수 없는 일급 서류이므로 봉투에 넣어 봉해서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게 더욱 인정스러운 것 같아 승낙을 했다. 그리고는 우체국에서 특급으로 그 서류를 필리핀 카나다 대사관으로 직접 송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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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케나다에 날아든 낭보 1탄
2000년 1월달 동안에 우리집에 날아든 낭보 1탄 해가 바뀐 지가 오늘이 3일째가 된다. 나는 바깥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우리집 우편함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광고지려니 하고 생각을 하고 가까이 갔다. 아니다. 큰 우편물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아니면 소포가 올 때가 없을 텐데 하고 손으로 짚어 들었다. 그런데 봉투 위에 캐나다 국기가 걸려 있는 관공서 봉투였던 것이다. 아마 내 짐작으로는 십 중 팔구는 비자 연장 했던 게 돌아 왔는가라고 직감 되었다. 나는 옆집에 있는 남편을 불러 서류를 보여 주니 캐나다 대사관에서 보낸 것 이란다. 우리는 얼른 개봉을 하고 서류를 읽어 나갔다. 6개월 연장이 되었다는 내용 이였다. 또 이게 웬일인가 이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6개월 연장이니 약 8개월을 이곳에서 체류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정말 도와준 분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일일이 도와준 분들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옛날 말에 이런 속담이 있다. 화장실 갈 때 종이가 급하다고 그런 후에는 그 종이의 고마움을 모른다. 나는 나의 인생사에서 이 말을 젤루 싫어한다. 이 연장 비자 서류를 받아 들었을 때 가장 내 머리에 떠 올랐던 것은 피어슨 국제공항의 이민 심사관의 얼굴 이였다. 왜 일까? 나의 간장을 그토록 애타게 했던 그가 괜스레 미워졌다. 이러면 될 것을, 물론 자신은 자신의 업무를 이행했을 뿐이 였겠지만 나는 피가 말랐었잖아! 이제는 우선 급한 불은 소화가 되었지만 다음 걱정은 우리 아이들의 학교 문제 였는데 빨리 우리가 영주권자가 되어야지만 아이들 학교를 보낼 수가 있었고 개월을 더할수록 나이는 한 살씩 더 먹게 되고 공부는 한층 더 어려워 진다. 나는 우리 어린 시절에 흔했던 말 한가지가 생각이 났다. 학교를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가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부러웠다는 말을 수 없이도 들어왔었는데 그게 지금 우리 아이의 현실이다 이제는 학원은 그만두고 학교를 가서 정상적인 수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제껏 잘 참아주고 불평을 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시간을 그들은 영어라는 제2 외국어에 소비했던 것이다. 입국할 때 내가 결심한 결심 중에 하나가 영어를 정말 열심히 잘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지금 내 나이에 한쪽 귀로 들으면 한쪽 귀로 세어나가는데 정상인데 그래도 나는 오기심을 갖고 입국 후에 시간만 나면 TV앞에서 떨어 지지 않았다. 알아 듣든지 못 알아 듣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언젠가 귀가 뚫히고 입이 열리겠지 생각하며 캡션 자막에 나타나는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 메모 해가면서 실지 나의 선생은 TV이라고만 생각 했다. 또한 주변 사람의 충고도 우선 말보다 귀가 뚫려야 된다는 것이다. 말은 중학교 때부터 해온 영어가 밑 바탕이 되기 때문에 단어를 생각해서 꿰 맞추면 된다는 것 이였다. 날과 해가 갈수록 제일 처음 외국인을 대할 때 보다 이젠 많이 달라졌다. 겁이 안 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외국인이 금방에만 와도 주눅부터 들었다. 그리고 쥐구멍만 찾았고 남편만을 찾았다. 이게 그래도 좀더 진보됐다는 증거라도 생각하고 싶다. 1월 중순쯤해서 서울 에이전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학 서류 수속한 학생들 모두가 학생 비자가 나와서 케냐다행 비행기를 2월 16일자로 모두 티켓팅을 해 두었다는 연락 이였다. 너무나 기뻤다. 지금 나는 영어라는 단어 때문에 심히 고생을 한다. 이 언어 때문에 한국에서 그렇게 마당발이라던 나는 이곳에서는 그 세끼 발가락에도 못 미친다. 설레임 속의 연속된 날 들은 나의 기분을 다른 한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이 아이들과 연계가 되었던 이 아이들을 잘 길러 내리라는 나의 사명감 같은 게 치솟아 올랐다. 이즈음해서 내가 돌보고 가정 교육부터 학교교육까지 이들을 선도하고 가르쳐야 하는 이 아이들과 우리집과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싶다. 캐나다로 유학을 올 4 학생 중에서 한 학생은 바로 나의 조카이고 중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냈던 친구들의 두 딸, 대학친구의 딸 이렇게 4명이다. 물론 남편의 친구이긴 하지만 나도 전 부 터 이들과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카와 중학교 친구의 2딸 만을 데리고 오려고 했었는데 나중 대학 친구의 딸과의 인연이 묘하게 되어 남편과 나는 그 학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남편이 캐나다로 올 때 대학 친구였든 그와는 연락이 되질 않았다. 왜냐면 그렇게 잘되던 사업이 파산이 되는 바람에 그는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연락이 닿을 수가 없었다. 한국 제 입국을 했을 때 우연히 전화 통화가 되었는데 그는 깜짝 놀라면서 꼭 만나자는 것이 였다. 왠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우리는 저녁 식사를 겸해서 만나게 되었다. 자신이 그 동안 연락이 안됐던 사정을 우리에게 이야기 했고 자신은 자신의 이름으로는 이땅에서 아무 사업도 새로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 동생 밑에서 부인이 봉급을 받아가며 일을 하는 상태라고 현재의 처지를 우리에게 알려 줬었다. 본인은 지금 피지섬으로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나도 기뻤다는 것이 였다. 몇 개월 살지는 아니했지만 친구의 질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최대한의 상식을 알려 주었다. 이민 신청을 어디서 했으며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정보와 함께 캐나다로 돌아가면 조카와 남편 친구의 두 딸을 키워야 한다고 말을 했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는 헤어졌다. 그 다음날 또 전화가 와서 우리는 만났다. 그 만난 자리에서 자기도 캐나다로 이민을 갈려고 결정했으니 우리가 알고있는 에이전트를 소개 해달라는 것이 였고 또 한가지는 자기도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 딸이 있으니 현재 상황으로는 자신이 충분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니 두고 두고 그 신세를 갚겠네 라면서 다른 아이 밥 먹을 때 숟가락 하나 더 올려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였다. 숟가락 하나 더 올려 놓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는가? 실지 그러고 보니 그는 실지 다소 떵떵 거리며 살긴 했었다. 그런 이가 이렇게 사정까지 하는 연유를 보면 정말 딱하게 보였다. 남편과 나는 이 아이까지 거두기로 약속을 하고 우리가 진행 중에 있는 에이전트에 연락을 취해주게 되어서 오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충 설명을 하겠지만 인연은 중요한 것이고 인연은 잘 맺어져야 한다. 2월 16일에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오고 나면 당장 기거해야 할 문제 였는데 우리는 집을 샀지만 전 주인이 이사를 갈 때까지의 기간이 무려 세 달하고 10일이라는 중간의 갭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당장 3월 초면 개학에 들어 가게 된다. 현재의 집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다소 힘이 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냐면 인구 밀도가 8명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방 세 개에 화장실은 1개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침 등교 시간이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이들 학교 까지는 고속도로를 거쳐 약 40분 정도가 소요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이들을 그곳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와야 하는 문제가 발생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족 회의를 거쳐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브로커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가 산 집으로 입주하기 3달 정도를 임시 렌트할곳이 없겠는가라고 상의를 하였고 그래서 그분이 소개해준 몇몇 장소를 들렀지만 너무나 낡은 집들이였고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아 먼지며 겨울의 냉기에서 오는 거부감들이 도저히 거주하기가 불가능 했다. 아울러 우리 아이들도 기겁을 했다. 단지 2개월 정도만 임시 랜트 할 곳은 정말 하늘에 별 따기 였다. 그러한 곳을 찾는 우리가 어리석은 것 처럼 느껴졌다. 우리 아이들도 조금 비좁더라도 참고 우리의 집으로 이사할 때 까지 현재 그곳에서 지내자는데 동의했다. 단지 꿈을 갖고 오는 학생들이 현제 살고 있는 우리 집을 보면 실망을 할까 싶어 아이들이 오면 우리가 이사 올 집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이사할 때 까지 참아 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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