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lee
경제 및 시사문예 종합지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품격 있는 언론사로 발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410 전체: 657,225 )
육필 원고의 추억- 시대 따라 사라져가는 유물
ywlee

 

-인간냄새도 함께 묻혀 아쉬움     

 

윤동주 시인의 자유시 ‘소년(少年)’의 육필 원고

 

 “막내야, 네가 군에 간지 벌써 한 달이 됐구나. 훈련은 얼마나 고되며 배는 또 얼마나 고프냐. 밤에 잘 때 춥지는 않으냐. 모든게 궁금하니 자주 소식 좀 전해다오. 이 에미는 잘 있다…”

 

 수년 전까지 간직하고 있던 예전 어머님의 손때 묻은 편지. 군에 간 막내아들을 걱정하시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시던 모습이 선하다.

 

 병영(兵營)에 날아든 편지의 봉투만 봐도 어머님 편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된 훈련 후 침침한 침상에 누워 어머님의 편지를 읽노라면 내용과 관계없이 눈에 이슬이 맺혔다.

 

0…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어머님의 필체는 예전의 ‘아래 아’ 식이셨다. 지금도 ‘아래 아’만 생각하면 어머님 얼굴이 떠오른다.

 

 늙으신 어머님의 편지처럼 사람에겐 각자의 필체가 있는 법. 그런데 점점 육필(肉筆) 편지가 사라져가고 컴퓨터 자판(字板)이 대신하다 보니 필체란 것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편지 뿐인가. 글쓰기 원고도 펜 대신 컴퓨터만 두드리면 된다. 그러니 예전의 종이 원고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음은 10년 전 이맘때 쓴 글이다.

 

0…“멀리 에드먼튼에 사시는 문인께서 보내온 육필원고를 보니 반갑기도 하거니와 여러 생각이 든다. 200자 원고지에 빼곡히 써내린 글을 대하니 우선 따스한 정감이 간다. 달필(達筆)은 아니고 꾸불꾸불 써내려갔지만 그래서 더 인간의 체취가 풍긴다.

 

 이런 원고를 받으면 일일이 타이핑을 쳐야 하니 달갑잖은 일거리를 만들어주시는 꼴이 되지만 멀리서 글을 보내주시는 성의를 생각하면 그런 수고 쯤은 기꺼이 감수할 일이다.

 

 특히 알버타같이 원거리에 계신 분들은 문학적 열정이 높지만 현지에 한인신문이 없어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적다. 그런 분을 생각해서라도 육필원고일수록 더 소중히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0…고명하신 문인 중엔 아직도 육필원고를 고집하는 분이 계신다. 전직 L교수님이 그렇다. 언젠가 “교수님이 어떻게 아직도 컴퓨터를 쓰지 않으시냐”고 농담조로 물었더니 “컴퓨터 자판에선 인간냄새가 나지 않아 싫다.”고 하신다.  

 

 교수님은 어느 글에서 “나는 컴퓨터를 거의 쓰지 않는다. 컴퓨터를 쓴대야 전자우편이나 받아보는 정도. 그 외에 편지를 보낸다든가 문헌조사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오늘날 컴퓨터를 모른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태고적 동굴생활을 하고 있는 것.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산과 계곡, 강물줄기 밖에 없는 데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같은 사람이 고리타분한 성향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쓰셨다.

 

 이는 어쩌면 컴맹에 대한 강변(强辯)으로 들릴지 모르나 정서가 비슷한 나는 공감한다. 이전 신문사에 있을 때 교수님의 원고를 타이핑 치면서 때론 씩씩거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0…대체로 50~60대 이상 세대에게 원고지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특히 글쓰는 일이 직업인 기자 같은 사람에게 원고지는 낭만어린 기억으로 반추된다.

 

 80년대 후반만 해도 스트레이트 기사는 60자 원고지에, 박스기사는 200자 원고지에 주로 썼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원고지를 메워가던 기억이 삼삼하다.

 

 기사를 써놓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고지를 북북 찢어버렸으며 휴지통은 금세 폐지로 쌓였다. 그럴 때면 예외없이 담배 한대를 꺼내 연기를 뿜어냈고 편집국 사무실은 뿌연 담배연기로 자욱해졌다.

 

 때론 선배 기자로부터 “이걸 기사라고 써 왔느냐”는 질책과 함께 휙 내던져진 원고를 주섬주섬 집어 들며 이를 악물던 기억도 떠오른다.

 

0…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컴퓨터 키보드라는 도구가 나타나면서 육필원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글씨가 악필(惡筆)인 나같은 사람은 키보드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는 펜과 종이에서 나오던 가상한 기개를 무뎌지게 만들었다.

 

 기자란 자고로 어느 정도 지사(志士)적 기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며, 그런 기상은 잉크와 종이냄새 묻어나는 공간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기사를 써내려가면서 모순된 사회현실에 분개하기도 하고 정의를 향한 고독한 번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석간신문 뭉치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대낮에 들이키는 한잔의 소주 맛은 무척 썼다.

 

 하지만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그런 인간적인 냄새는 멀어져 갔다. 사람에겐 고유의 필체가 있는 법인데 천편일률적인 컴퓨터로 찍어내는 원고에선 도무지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0…한편, 기자는 배가 고파봐야 서민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기자생활은 대개 빈한(貧寒)했고 그런 사정을 아는 주변인들이 선술집에서 슬그머니 술값을 내주고 자리를 뜨는 의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대로 낭만이 있던 시절이다. 이런 풍경 역시 펜과 종이에서 생성되는 측면이 컸다. 요즘 신문기자들이 단순한 월급쟁이로 전락해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불행하다.

0…온타리오 교육부가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영어 필기체(cursive) 학습을 재도입키로 했다. 문서와 서류 등에 서명(sign)을 할 때 필기체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학생이 많은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필기체는 3~8학년 교과과정에 포함돼있었지만 2006년부터 이를 폐지했다. 대부분이 컴퓨터로 글을 쓰기 때문에 필기체는 거의 쓸 일이 없어진 때문이다.

 하지만 필기체는 독해와 인지기능 등 두뇌개발에 유익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람이 제 손으로 글을 써야 정상이 아닌가.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