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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윤리
leed2017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나 “이것은 반드시 해야된다”느니 “이것은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등의 규칙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 집단에서 영향력이 있는 소위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 몇몇이 이런 규칙을 만드는 것이 상례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협의에 의해 서로 지키도록 되어 있는 규칙이 곧 규약이라 할 수 있지요. 이 규약을 어기는 이는 사회의 따돌림과 배척을 받고 이 규약을 잘지키고 따르는 이는 사회의 칭찬과 수용을 받지요.

 인간사회에서는 전쟁, 대량학살, 배반, 음모 등이 언제나 있기 때문에 사회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망하지 않고 아직까지 유지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규약 때문이라고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인지진화연구소에서는 “인간사회에 공통되는 도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구상에 있는 60여개의 조직에 대한 조사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직이란 말은 문화, 사회, 국가라는 말과 얼추 같은 말로 썼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문화 혹은 사회조직을 관통하는 일곱가지 공통적인 도덕규범을 뽑아냈는데 그 일곱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족을 도와라. 둘째, 소속집단에 충성하라. 셋째, 위 사람을 따르라. 넷째, 호의를 갚아라. 다섯째, 용감하라. 여섯째, 자원을 공정히 나누라. 일곱째, 다른 사람의 것을 존중하라.

 연구에 참여했던 커러(O. Curry)를 따르면 인간사회는 모두 비슷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사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비슷한 도덕규범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도덕이란 것도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협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나서 진화해온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협력도덕의 뿌리는 수천만 년을 이어온 집단생활, 그리고 수십만 년에 걸친 수렵생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인간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커리의 주장입니다.

 이 일곱가지 덕목이랄까 공통윤리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알게 모르게 변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윤리라는 것도 어느 특정사회만 변한 것이 아니고 공통적으로 모든 사회가 변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날씨를 얘기할 때 체감온도라는 말을 쓰지요. 우리가 피부를 통해 느끼는 온도는 실제 온도계가 알려주는 온도보다 더 낮게, 혹은 더 높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윤리도덕에서도 실제 그런 변화가 있었으냐에 대해서는 사회과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연구로 결정되겠지만 내가 피부로 “옛날과는 다르구나”를 느끼는 것이 체감변화라고 한다면 말이 될까요? 사회과학자들의 연구보고는 어떤지 몰라도 내가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발표한 일곱가지 윤리도덕 중 처음 세 항목의 변화는 눈에 제일 쉽게 뜨이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인 가족에 충실하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집안형제끼리 다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드물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고 따로 떨어져 사는 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새는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한집에서 사는 것이 옛날에 부모가 따로 독립해서 사는 것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가 남긴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에 서는 모습도 신문에서나 앞뒷집 현실에서도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소속 집단에 충성하라는 말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한국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들어먹힐 여지가 있겠으나 미국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희미하기 짝이 없는 말이 되어가고 있지요. 아무리 내가 속한 집단이라 해도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개인적인 윤리도덕 기준과 어긋나는 것을 때는 가차없이 자기주장을 씩씩하게 주장하라는 가르침이 서구식 생활태도에 대한 지침입니다.

 한번 직장에 들어가서 백발이 될 때까지 충성을 다하던 개념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큰 직장에서 충성심과 단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직장을 가족의 확장으로 생각하기를 권하며 무슨무슨 가족모임이니 단합대회니 하는 이름을 붙여 전체 조직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큰 기업에서 자랐다시피 하고 그 조직을 대변하다시피 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돌변해 자기가 수십 년 몸담았던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상부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던 직원이 나중에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윤리적인 판단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 윤리라는 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세 번째인 윗사람을 따르라는 말은 조선시대 금과옥조이던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다) 같이 무조건 나이 많은 사람을 따르라는 말(The younger should give precedence to the older)이라기 보다는 조직에서 경륜이나 경험, 판단력이 건전한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도 나이 많은 사람=구식, 보수, 한물간 사람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어가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흘러간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흐르는 속도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빠르다는 것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옛날에 살던 방식이 그리워 옛날식을 고집하고 살아가려는 극소수 사람들도 있지만 디지털 문화가 계속되는 한 그 세력이 그다지 왕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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