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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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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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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저 하늘 미리내 건너 장모님은

 


나는 지난 9월 21일, 음력으로는 8월 초하룻날에 장모님을 잃었다. 지난해 내가 안식년으로 한국에 가 있을 때 장모님도 가셔서 몇 달을 함께 계셨는데, 캐나다로 돌아온 후에는 피곤하다며 자주 드러누우시곤 했다. 오랜 여행에서 쌓인 피로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회복할 날만 기다렸는데 너무 오래 끄는 것이 이상해서 전문의를 찾았더니 폐암 말기라는 청천벼락이었다.

 

그때가 2월 말이었으니 사형선고를 받고 꼭 7개월이 지나서 저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폐암이라 해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아픔도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는 혼수상태로 들어가 있다가 바로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사람도 모르게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향년 일흔 네 살, 아무리 고희(古稀)를 넘겼다 해도 요새같이 살기 좋은 세상에는 억울한 천수(天壽)라는 생각이 든다.

 

장모님 윗대들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바로 그때부터 서울 종로 권농동에서만 살았다. 서울 사람 중의 서울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18살에 결혼하여 지금의 내 아내 하나를 놓고 26살 되던 해에 6.25가 터지자 장인은 난데없는 의용군이 되어 월북했다. 그 날부터 딸 하나와 시어른 내외분을 모시고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장모님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삯바느질, 뜨개질, 청과도매상 등 안 해본 것이 어디 있을까. 아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로 불려갔을 때 비로소 장모님의 재정적 책임이 끝났으니 홀몸으로 10년 넘게 시부모를 포함한 4식구를 먹여 살린 셈이다.

 

우리 내외는 장모님을 내가 캐나다 서부에 있는 노틀댐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시고 살았다. 햇수로 치면 꼭 25년, 한국에서 나를 낳으신 어머님보다 더 오래 한솥밥을 먹고 지낸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내외가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장모님이 우리 두 젊은 사람들을 모시고 살았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도로 우리 집 살림을 일체 도맡아 살아주셨다.


노산(蘆山) 이은상 선생이 스무 살 된 동생을 잃고 쓴 [무상(無常)]이라고 제(題)한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이 적혀있다.

 

장자(莊子)가 초(楚)나라로 가던 길에 사람 죽은 두골을 보고 말채찍으로 두들기며 물어 가로되, "그대 삶을 탐하다 도리를 어기어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나라가 망할 때 죽음을 입어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악한 일을 행하고 추한 이름을 끼치기 부끄러워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얼고 주려 이같이 되었는가. 혹은 천명을 다하고 이같이 되었는가" 하고 두골을 끌어 베개 하고 누웠더니 밤중에 두골이 꿈에 나타나 말하되 "그대의 말은 모두 산 사람의 일이니 죽으면 이것이 다 없어지노라. 죽음이란 임금도 신하도 없고 사시(四時)도 없어 시원히 천지로써 역사로 삼는 것이니 저 제왕의 즐거움도 이보다 날 것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장자(莊子))는 믿지 아니하고 가로되 "내 저승왕에게 말하여 그대 형상을 다시 살려 그대 살던 곳으로 보내게 하려니 그대 가려는가?" 두골이 한참이나 궁리하고 가로되 "내 어찌 이 제왕의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사람이 될까 보랴" 하더라고 하였다. 

 

사실 죽음이 제와의 즐거움과 같다는 말도 맞지 않는 말. 죽으면 고통도 환희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일체 무(無)의 세상이라 하지 않았는가.


공자는 일찍이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이가 어디 있으랴. 부처도 이를 알지 못하여 화엄경에 이르되 "어디에서 왔느냐(生從何處來), 어디메로 가는고(死向所處去)"라고 했다.

 

뒤주에 쌀 떨어지고는 살아도 가슴속에 정(情)떨어지고는 못 산다는 사바 세상, 우리 부부에게 폭포수 같은 사랑을 내리쏟던 장모님과 이승의 인연이 사그라진 마당에 어찌 못다 한 정(情)과 한(恨)이 없겠는가.

 

"꽃 피자 비바람 인생엔 이별(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이라 탄식한 우무릉(于武陵)이란 시인이 있었다. 그렇다. 사람의 일평생이란 것도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 것일진대 오래 살았다, 못살았다는 게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저승 가는 길에 노자는 눈물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있다. 옛날 자하(子夏)라는 사람은 자식을 잃고 하도 서럽게 울어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한편, 장자(莊子)는 아내가 죽었을 때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 인생을 웃었다지 않는가.

 

장모님의 넋은 지금 가을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이 되어 떠가려니 생각하면 이승과 저승이란 것도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려고 붓을 들었을 때는 자하처럼 정에 울었으나 이제 장자(莊子)를 닮아 인생을 웃어나 볼까. 그런데 장모님, 도대체 어디로 가셨습니까? (1998.10.)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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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여자는 다소곳해야 한다?

 

 몇 주 전 대통령이 전국 검사들을 대표한 40여 명의 검사와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검찰에 대한 인사와 관련된 불평을 가라앉히기 위해 새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여성 후보 K 씨를 대동한 자리였다.


 그때 K 장관이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가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이를 놓칠세라 텔레비전도 집중적으로 몇 번이나 K 씨의 앉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면담이 있고 나서 또 몇 주 지난 후 K 씨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K씨가 검사들과 면담을 할 때 앉은 자세에 대해서 '공식적인 꾸지람'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점잖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세가 무슨 그런 자세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 중에는 참으로 한심스럽고 무식한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K 씨가 어떻게 앉는 것은 남이 참견할 성질이 아니다. K씨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 앞에 드러눕지 않는 이상 K씨 자세에 대한 불평이 청문회 자리에서 나왔을까?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자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테두리를 무척 좁디 좁게 규정해 놓고 그 테두리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기만 해도 비난을 쏟아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종이를 돌돌 말아서 그 좁은 구멍을 통해서 세상만사를 내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까.


 술좌석에서나 몇 마디 오갈 수 있는 그런 말을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장관의 자질을 알아보기 위한 청문회 자리에서 내놓았으니 국회의원들의 정신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행동이다. 인사청문회 같은 자리에서는 후보로 지명된 사람이 일을 잘해나갈 수 있느냐 아니야 하는 직무수행능력에 대한 자격심의가 그 초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뒤로 미루다시피 하고 앉은 자세에 대해서, 입은 옷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질이 낮은, 영어로 말하면 no class 인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행동은 남성과 비교해 볼 때 여성은 어느 면에서나 열등한 위치에 있고, 문화적으로 창조적이지 못하며 남성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성(性)에 대한 편견이랄까, 차별의식을 부채질하기 쉽다. 지금부터 64년 전 이 세상을 하직한, 정신분석학 주창자 후로이트(S. Freud)의 여자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그야말로 낡고 무례한 행동이 아닐까?


 어둡고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것은 비단 국회의원뿐이 아니다. 지성의 상징이니, 이 사회의 정신적 선도자니 하는 대학교도 남자와 여자 교수의 비율이 수십 년 간 100대 0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다 싶은 데가 있고, 많은 대학이 90대 10을 넘지 못하고 있다. K장관에게 청문회에서 앉는 자세가 나쁘다고 나무라던 사람들도 바로 이런 대학에서 4년을 수학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루면 비행기가 지구를 한바퀴 돌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인들끼리 전자우편으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듯 하는 세상에 아직도 이처럼 낡고 무식한 생각을 가진, 그것도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을 보면 이 나라 남녀평등 의식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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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감성의 농축액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고도 하고 생각하는 갈대라고도 한다. 생각하는 갈대는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지(理智)랄까 지성을 말하는 것이니 진정한 민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필수요소로 볼 수 있다. 제각기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 모여 살아가는 오늘날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감성도 필요하지마는 합리적이랄까, 사리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 혹은 지성도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물론 감성, 이성 이 두가지 특성의 상호비례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회마다 다르다.


 이성과 감정을 칼로 두부판 가르듯 둘로 딱 갈라놓고 이것이 어떻다, 저것이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이지보다는 감정이 더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한쪽이 우세한 사실 그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풍부한 감정은 우리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고 우리를 정열적이며 인정이 메마르지 않게 하고, 노래와 춤과 풍류를 즐기고 뛰어난 예술 감각을 가지게 함으로써 드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편 이성은 우리가 세상일을 객관적이랄까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사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주로 이 이성이 있고 없음에 달린 것이니 이성이 발달했다는 말은 생각하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김태길 서울대학교 명예 철학 교수에 의하면, 지역적으로 좁은 범위 안에서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맞대며 사는 농경사회에서는 주로 부드럽고 따뜻한 친화적 정서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산업사회로 불리는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도리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감정은 때로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이 극단으로 흐르는 감정을 막는 것이 곧 사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지이다.


 문제는 감정 내지 지성 둘 중의 조화 내지 균형이다. 감정, 지성 둘 중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우세하면 이 불균형은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요사이 언론과 방송을 메우는 대통령 탄핵을 보자.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만약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을 하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사과란 잘못한 허물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과하는 방법은 주로 언어적 요소와 문자적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니 대통령이 용서를 비는 몇 마디 말만 하면 탄핵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나라 행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을 탄핵하느냐 마느냐 같이 중대한 결정도 사과의 말 몇 마디, 글 몇 마디에 달려있다. 100% 감정의 농축액이다. 우리 감정의 불길이 이처럼 맹렬할 수가 있을까 몸이 오싹해올 정도로 두려운 생각이 든다. 아무리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대통령 탄핵 여부가 사과의 말 몇 마디나 글 몇 줄에 달려있다 하니 이 얼마나 가벼운 일인가. 좀 과장해서 비유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범을 만일 그가 사과하면 살려줄 수도 있으나 만약 사과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말이다. 말 바꾸기를 식은죽 먹듯 하는 국회의원들이 말 몇 마디나 글 몇 줄에 이처럼 큰 비중을 두는 것을 보니 경멸의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화목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감정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절실하다. 이성적 생각과 행동이 너무 약하면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만큼 멀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 생각과 행동에서 감정을 말끔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많은 인류의 역사적 큰 성취는 피 끓는 정열과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는가.


 애당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무리한 절차로 억지 결정을 해놓고 "법으로 정한 일이니 마지막 심판이 나올 때까지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지켜보자"고 이성적 자세를 호소하니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하자고 해도 내 피는 벌써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재산에 탐이 나서 자기의 부모를 살해하고 난 어느 패륜아가 재판정에 서서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불쌍한 고아이니 동정을 바란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감정의 맹렬한 불길 앞에서는 이성도 맥을 못 추는 것은 바로 이런 때이지 싶다. (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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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어떤 어린이날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를 지키고 있던 어느해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 될까 말까 한 어린아이들 2, 30명이 자기들을 데리고 간 교사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한 것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다.


 널찍한 잔디밭에 꼬마 방문객들이 빙 둘러앉고 대통령께서 청와대를 방문한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그런 자리였다. 대통령께서 자리에 앉자 데라고 간 교사는 꼬마들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통령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려야지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마 손님들은 일제히 꾀꼬리 같은 목청을 높여, "대톤년 하라버지, 안년하제요"를 외치는 것이었다. 오기 전 연습을 수십번 한 모양이었다. 마치 어느 사극(史劇)에서 만조백관들이 임금 앞에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동시에 외치는 장면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어서 대통령 할아버지께서 그 자리에 온 꼬마들에게 한말씀 해달라는 사회자의 조심스러운 요청이 있었다. 자세한 어휘는 잊어버렸으나 대통령 할아버지는, "여러분, . 자신과 희망, 용기와 '야망'을 가지고. " 힘찬 나날을 살아가라는 말로 인사에 대신하였다. 대선을 앞둔 어느 야당의 전당대회에서 한판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수준 높은 북소리였다. 이렇게 용기와 자신감은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느니라.


 지난 98년 봄 5월 5일 어린이날에도 청와대 잔디밭에서 또 다른 대통령 할아버지 앞에서 비슷한 숫자의 어린이들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있다. '국민과 대화'를 즐기는 대통령께서는 어린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 한 어린이가 "학교에서 과제가 너무 많은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좀 줄여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관계 당국의 검열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천진난만한 질문에 우리의 준비된 대통령께서는 "숙제가 '과중(過重)' 하면 줄여야 한다"는 요지의 대답을 했다.


 '야망'이란 말과 '과중'이란 말 중에 어느 것이 어린이들에게 더 어려운 말인지는 국어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선뜻 판가름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유식한 단어 모두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같은 신동이 아니고서는 초등학교 1, 2학년 수준에서 그 말뜻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운 말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생전에 즐겨 들려 주시던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즉 옛날 어느 시골에 선비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대낮에 호랑이가 와서 그의 어린아이를 물고 산으로 달아났다. 놀란 선비는 "사람 살려요. " 하는 고함 대신에 선비로서의 학식과 풍모를 지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유식한 문자를 써서 상황의 긴박함을 알렸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근산래(近山來) 하야, 가아(家兒)를 생포거(生捕去)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로다! 지봉자(持捧者)는 지봉(持捧)하고 지부자(持斧者)는 지부(持斧)하여 속래(速來)하라." 


 우리말로 옮기면 "먼 산에 호랑이가 가까운 산에 와서 우리 아이놈을 산 채로 물어갔으니 아아 슬프도다, 몽둥이를 가진 사람은 몽둥이를, 도끼를 가진 사람은 도끼를 들고 어서 빨리 나오라." 


 문자 투성이의 고상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농민들이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뒷산으로 가서 냠냠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이야기가 고을 원님의 귀에 들어갔다. 화가 난 원님은 당장 선비를 잡아다가 볼기를 때리게 하며 꾸짖었다. 


 "이놈, 네가 유식하면 얼마나 유식하다고 사람이 호랑이한테 물려가는 판에 무슨 문자냐, 미련한 놈. " 아픔을 이기지 못한 선비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지둔(我之臀)아, 차후(此後) 절대불용문자(絶對不用文字)로다."(아야야, 내 궁둥이야, 다음부터는 절대로 문자를 쓰지 않겠노라)


 이렇게 "소귀에 경 읽기" 식의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기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과거의 자기 경험이나 버릇이란 지금의 버릇이나 행동에 이처럼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정의 사회 구현'이니 '세계로 향한 한국인' 같은 화려한 구호들도 많은 사람에게 '야망'과 '과중'이나 '원산대호'에 지나지 않는 빈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99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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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5
화장실

 

 몇 년 전에 백두산 관광을 다녀왔다. 북경에서 비행기 편으로 연길로, 연길에서 자동차로 6시간인가 7시간을 가는 긴 여행이었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에는 10번 넘게 차를 세우고 손님들에게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일러주었다. 병원에 가면 나와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백두산에 가니 관광을 온 사람들이 우리 이외에도 정말 많았다. 마치 주말에 안동 하회마을에나 온 것처럼 관광 온 한국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런데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가는 동안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10번 이상 자동차를 세운 그 화장실이었다. 10번 넘게 자동차를 세우고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중국 농촌의 화장실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도록 민망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되어 있다. 비도 오지 않는 날 화장실 가면서 우산을 들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문은 물론 칸막이고 가리개고 없는 화장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행" 할 때 하반신은 그대로 내놓고 남들이 다 보는 데서 해야 하는 그런 열린 화장실이니 우산이라도 있어야 가리개로 앞을 가리지 않겠는가.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불결한 화장실은 어느 정도 잘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의 마지노선이 이번 백두산을 통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너무 지저분해서 도저히 집무수행 불가능이었다. 자동차를 세울 때마다 그 소중한 것을 꺼내서 무슨 중범자나 되는 것처럼 바깥 공기를 한번 쐬고는 다시 집어넣고 말았으니 말이다. 중국 농촌 화장실이 러브 호텔급이라면 우리나라 농촌 화장실은 신라호텔 특실이다. 우리나라는 농촌이라 해도 우선 문만 걸어 잠그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가.


 연암 박지원이 중국 북경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중국에서는 가장 더러운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고 하는데 조선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아 발 냄새가 흉하다는 것이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동이(動夷)라고 말하는바 이는 동이가 훔쳤다는 의미다. " 동이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나 종족들을 멸시하여 일컫던 말이다. 자세히는 중국 황하의 중간쯤으로부터 하류의 동쪽 이민족을 말하는데, 곧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묘사다. 


 그런데 "려"자 발음을 "리"라 하니 혹시 발 "고린내 난다"는 말이 "고려 냄새"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어쩌다가 그 중국 사람들까지 고려취라고 빈정댔을까?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더니 중국 사람이 우릴 보고 발 냄새가 난다고?


 일본은 화장실에서는 중국의 반대다. 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는 그네들 화장실이 캐나다보다도 깨끗하여 놀란 적이 있다. 중국 화장실에 비교하면 지옥과 천당이다. 일본 도시와 중국 농촌과 비교한다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일본 대도시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보다 작은 개천에 팔뚝만 한 잉어가 뛰놀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 농촌은 안 가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중국 기행문을 보면 화장실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조선 때의 화장실도 중국의 그것과 별 차이 없었지 싶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남녀 화장실이 같이 있어서 소변 보는 남자 옆에서 아주머니들이 손을 씻으러 왔다 갔다 하고(이쪽을 힐끔힐끔 보던 아줌마, 공짜관광하면 안 돼요)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여럿이 왁자지껄해서 “집무” 하는 동안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면 우리 화장실이란 것도 88올림픽 전에는 선진국 여행자들의 화젯거리였지 싶다.


 아무튼, 요사이 우리나라도 화장실이 무척 깨끗해졌다. 대학 시절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선생님들께서 “화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별 신기한 화장실도 다 있구나” 싶더니 요사이 우리나라도 대부분 화장실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 앞으로 10년만 더 있으면 국제공항이나 큰 공공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 앞에 “아침 식사 배달됩니다” 하는 친절한 광고도 나붙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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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5
한국가곡의 밤

 

 조교 R양이 겨우 찾았다며 '2004년 한국예술가곡 대축제' 스케줄을 보여주었다. 주최는 아트그룹이라는 어느 낯선 단체이고, 후원은 '우리가곡의날 제정추진위원회' '한국예술가곡연합회'를 위시하여 모두 6개의 단체가 맡았다. 매주 금요일, 10회에 걸쳐 구기동 어느 화랑에서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불리는 [봉선화]로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160여 곡을 들려준다는 것. 출연 성악가들은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1960년대에 한국 성악계를 휩쓸다시피 하였으나 지금은 은퇴한 성악가도 몇 있고 요사이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는 성악가들도 많았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5~6번을 넘게 매주 금요일만 되면 구기동 문화예술관으로 달려갔다. 음악회가 열리는 장소는 한 100명 들어갈까 말까 한 큰 강의실 정도의 홀이었다. 그러니 무대에 선 성악가와 청중과 거리는 앞줄에서는 불과 2미터, 뒷줄에서도 6미터를 넘지 않으니 우선 분위기가 아늑하여 청중과 성악가의 심리적 거리도 무척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프로그램 끝에 가서는 그날 출연한 성악가들이 모두 나와서 홍난파의 [고향의 봄] 같은 노래를 청중들과 함께 불러 분위기를 돋웠다. 그리고는 청중과 출연 성악가 모두 다른 방에 가서 떡 벌어지게 차려 놓은 밤참을 먹으며 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 온 후 4~5년 동안 음악회에 가본 것이 그리 많지 않아서 요사이 음악회 풍속도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몇 번 가본 음악회 중에는 단연 이색적이고 무척 인정이 끌리는 그런 음악회였다.


 그런데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지금 한창 활약을 하고 있는 소위 '젊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는 예외 없이 앞에 놓인 악보를 들여다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번은 4명의 성악가가  올라와서 청중들과 함께 노래하는데 악보를 서로 자기 앞에 두려고 조용히 밀고 당기는 희한한 장면까지 있었다. 악보를 놓치면 물 떠난 물고기. 아, 이 사람들은 악보의 도움 없이는 우리 가곡을 부르지 못하는구나! 이들에게 한국가곡은 한국 노래가 아니요, 저 어느 먼 나라의 신기한 노래에 지나지 않는가 보다.


 악보를 들여다 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 한국가곡을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그윽한 정서는 메마른 화분에 물 빠져나가듯 어느 사이에 말라버렸다. 끝날 무렵에 청중들과 가수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를 때 함께 따라 부르고 싶은 마음조차 없을 정도였다. 음악이란 정서의 농축, 흥이 그 중심이다. 그런데 이 흥이 일어나질 않으니 낸들 어쩌랴.


 하루는 음악회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시간에 옆에 앉은 이 음악회 감독을 맡은 C 여사에게 "노래하는 분들이 한국 악보를 꼭 봐야 하나요?" 하고 넌지시 물었더니 설마설마 걱정했던 답이 나오고 말았다. "요새 성악가들은 악보 없이는 한국가곡을 부르지 못합니다. [성불사의 밤]이나 [옛 동산에 올라] 같은 초기의 노래는 부를 줄 모르지요." 부를 줄 모른다는 말은 자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옛날 성악가들이 그 노래를 부를 때처럼 깊이가 있고, 그 맛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내 머리에는 몇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첫째는 이렇게 초등학교 학생 만화 보듯이 악보에 눈을 박고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 깊이가 있고 그 맛이 그대로 나겠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젊은 성악가라고 한국 노래를 왜 못 부를까마는 이들이 한국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우리 가곡은 제쳐놓고 외국 노래만 열심히 불러온 우리의 음악 풍토 때문이다.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국가곡을 부르기를 장려하거나 부르는 법을 가르치는 대학은 거의 없다고 한다. 죽으나 사나 그놈의 꼬록께, 꼬록께 하는 외국말이지 우리말로 우리 노래를 불러서는 별 볼 일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성 음악가들이 우리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음악교육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노래 부르는데 깊이가 없다든가 그 맛이 안 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나 같은 문외한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5, 60년 전 그 노래를 듣던 마음과 오늘날의 마음은 다르다. 마치 옛날에 즐겨 먹던 음식이 그때 그 맛이 나질 않을 때 우리는 음식이 달라져서 그런가, 아니면 그 음식을 먹는 내 입맛이 달라져서 그런가를 생각해 볼 때가 있는 것과 같다. 대중가요를 보면 대중가요가 유행하던 그때의 그 '고리타분'한 스타일로 부르지는 못하지만 요사이 신세대 가수들이 현대 감각에 자기 개성을 넣어 부르는 것을 들으면 더 감칠맛이 나지 않는가. 


 그러니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변했지만, 노래를 듣는 사람도 변한 것이다. 노래 맛이 안 나고 깊이가 없다는 것은 5, 60년 전 그때와 비교해서 깊이가 다르다는 말이요, 5,60년 전 그때의 노래 부르는 스타일과 달라서 맛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나의 음악에 대한 이해는 0점에 가깝다. 그러나 막연하게 우리 성악가들이 우리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나고 그럼 “이들 성악가가 외국 노래는 깊이가 있게 부를 수 있을까?” 하는 비아냥성 질문도 스스로 해본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 가곡을 부르지 않으면 ‘우리 가곡의 날 제정 추진위원회’니 ‘국민 1인 1 애창 가곡 갖기 추진위원회’니 하는 기형적인 이름을 가진 모임이 생겼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가곡을 부르지 않아 이런 운동을 해야 한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마는 그중에 성악가 자신의 책임도 크다고 본다. 성악가 자신이 이렇게 한국가곡을 외면하는데 그 밑에서 노래를 듣고 배우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한국노래를 부르고 싶겠는가?


 궁금증이 가시질 않아 학생들의 우리 가곡에 대한 이해를 알아보기로 했다. 즉 [애국가]를 위시하여 [봉선화], [보리밭] 등 우리 가곡 8곡과 동요 3곡, 모두 합해서 12곡을 늘어놓고 각 노래를 누가 작사, 작곡했는지, 그리고 그 노래를 혼자서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를 표시하게 되어있는 질문지를 돌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애국가를 안익태 작곡이라고 바로 적은 학생은 37명 중에 15명 밖에 되질 않았다. 애국가 작곡자를 ‘모른다’고 대답한 학생이 16명, 홍난파라고 적은 학생이 5명이나 있었고, 윤이상이라고 적은 학생도 한 사람 있었다. [봉선화], [보리밭], [어머니 마음]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노래들을 혼자 부를 수 있다고 표시한 학생은 없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과수원 길]이나 [어머니 은혜], [고향의 봄] 같은 동요도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고 대답한 학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궁금증이 꺼지질 않아서 이번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 한국 노래든, 외국 노래든, 예술가곡이든 동요든, 오페라 아리아든, 대중가요든, 옛날 노래든 현재 유행하고 있는 노래든 상관없다. 어떤 노래 장르(genre)도 좋으니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 제목 3곡을 적으라”고 해보았다. 스무 명 학생이 3곡씩 적으니 가능한 노래 숫자는 모두 60곡이다. 그 60곡 중에서 우리의 예술가곡은 하나도 없었고, 동요 [어머니 은혜] 1곡, 그 나머지는 모두 요새 유행하는 대중가요들이었다.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만일 국민 모두가 하루에 우리 시(詩)를 한 수를 읊고 우리노래 한 곡만 부른다면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도 더 순박해짐은 물론 나라 사랑도 배로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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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5
겸손 문화

 


 요사이 들어 급하게 줄고 있는 현상이지마는 아직까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젊은 층보다는 나이 많은 층에서 더 주주 찾아볼 수 있는 한국문화로 겸손 문화 내지 겸손의 미덕을 꼽을 수 있다. 겸손 문화란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보이는 데 있어 높이는 것보다는 낮게, 나서기보다는 한발 물러서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다든지, 아는 척하고 우쭐댄다든지, 할 수 있다고 뽐내기보다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서질 않는다" 등의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더 칭찬받는 행동이다. 그래서 우리 이름에도 "크게 어리석다"는 태우(泰愚), "늦게 좋다"는 만길(晩吉) 같은 이름이 심심찮게 눈에 뜨이지 않는가. 


 세상만사에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를 가지면 "까불지 마라"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훈계로 한방 얻어 맞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런 것 할 수 있어요?" 하고 물으면 "아이고, 제가 뭐 압니까? 힘껏 해 보겠습니다"고 대답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행동이다. "어리석게 살아라" 하는 겸허한 태도는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나 부처 같은 사람을 봐도 한마디도 속지 않으려고 눈을 반짝이는 영리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빈 데가 많은 사람들 같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 백치(白痴)에서 묘사한 예수의 이미지도 그렇다. 심리치료에서도 심리치료를 하는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는 겸손의 미덕을 배우며 자란 환자를 사람을 자신감이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므로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은 환자의 이 같은 지나친 겸손이나 어리석게 행동하라는 문화적 요구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글쎄요 통 자신이 없는데요" 나 "모릅니다" 하는 사람의 말을 정말로 "이 사람이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이구나"로 단정하면 큰 잘못이다. 대학교수를 구하는 자리에 원서를 낸 사람이 "저는 배운 것도 보잘것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마는 귀 대학교수직에 원서를..." 하는 것이 "귀 대학교수직 광고를 보니 내가 이 분야에서 제일 좋은 훈련을 받고 잘 가르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점수를 받을 확률이 높다.


 앞에서 급속히 줄어든다고 했는데 이 겸손의 미덕이야말로 요사이 "내가 제일",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준비된 사람" 등의 자기선전에 바쁜 구미 대륙 개인주의 사고의 물결을 타고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들을 보라.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한결같이 "내가 제일 잘난 사람", "내가 제일 적격자"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것을 보면 겸손의 미덕은 우리 문화에서 꼬리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일에 자신 있는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이것을 남에게 너무 거창하게 드러내 보일 때 문제가 된다. 정말 자신이 있어서 그렇다면 모르겠으나 자기의 부족감을 숨기려는 얕은 꾀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 무척 고민스러운 경우가 많을 것이다. "자신 있다"고 수선을 떨던 사람이 장담했던 것처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럴 때에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전연 하지 못하는 "낯두꺼운" 사람도 있다. 


 이런 자신만만에 비해서 애당초 겸손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은 위험이 적다. 작전으로 말하면 한 수 높은 작전이다. 운동선수들이 상대편 팀을 강팀이라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시합에 져도 강팀에 졌으니 별로 부끄럽지 않은 일, 이기면 강팀에 이겼으니 우리가 더 강팀이란 말이다. 영어로 말하면 win-win(이래도 이기고 저래도 이기는) 상황이다.


 몇 년 전에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저는 많은 시간을 빈둥빈둥 놀기만 하다가 이제 와서 공부하려고 하니 잘 안돼요. 영 자신이 서질 않아요. 그러나 유학을 가면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선생님 추천서 잘 써주세요..." 그런데 내가 보관하고 있던 성적기록을 보니 이 학생은 백여 명이 넘는 반에서 2등을 한 우수한 학생이었다. 


 자기 겸손에 쩔은 이 학생이 "나는 정말 자신 있어요"를 외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개인주의 사회라는 미국에 가면 잘 견딜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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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30
꼴찌 예찬

 

 2004년 11월 말경은 확실한데 정확한 날짜는 잊어버렸다. [꼴찌의 행복]이라는 어느 독자가 쓴 글을 보았다. 이 [꼴찌의 행복]이란 글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30대 초반이 된 딸 셋을 둔 글쓴이의 아버지 M씨는 자기 딸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M씨의 둘째 딸은 고등학교 3년간 보충수업으로 밤 11시까지 학교에 매여 있었는데 겨울이면 벌벌 떨며 학교로 마중 나가는 아내를 보며 우리 교육 현실을 탄식했다. 딸아이가 시험 잘 봤다고 하는 달은 꼴찌로부터 2, 3등이었고 졸업 때는 M씨가 아예 꼴찌를 바라서 남들이나 도와주라고 빌었다. 그래선지 딸의 고교 졸업 성적이 정말 250명 중 250등이었다. 졸업식 날 딸은 친구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며 M씨는 딸의 장래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마음을 놓았다. M씨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우리 사회에는 1등은 못한다고 안달하는 부모와 M씨 같은 부모가 함께 살고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누구 마음이 더 여유가 있을까? 물론 답은 M씨 같은 부모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골목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몰려 있어서 아침이면 좁은 골목 안에 어린 학생들로 붐빈다. 등교하는 모습들도 제각각이다. 대부분 아이는 명랑한 표정이고 얼굴에 웃음이 찼으나 어떤 아이들은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잘 못 잤는지 아니면 아침에 엄마 아빠로부터 꾸중을 들었는지 등교하는 아침 길이 어둡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있다. 울먹이던 아이들도 자기 반 친구를 만나면 더없이 기뻐하고 즐거운 표정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교 다닐 때 친구는 우리의 감정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가 있다.


 좌우간 골목을 메우는 어린 학생들을 보고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아이 중에 장래의 대통령도 있고 장래의 죄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장차 사기를 치다가 잡혀가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사기 친 사람을 잡아가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이 중에는 매일 학교 가는 것이 죽기 다음으로 싫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학교에는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어제는 단국대학교 K교수가 서울 시내에서 공부에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는 학생들이 중,고등학교에서만 3만 명이라 한다. 놀라운 숫자이다. 이들 학생 대부분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행사에 ‘나와는 상관없는’ 태도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도대체 성적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매기는 일부터가 못마땅할 것이다. 어린 가슴에 평생 한(恨)을 지고 살아서야 하겠는가. 유치원 때 꿈이 서울대학교, 초등학교 때 꿈이 서울대학교, 중학교 때 꿈, 고등학교 때 꿈이 서울대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서울대학교 못간 한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보내는 것은 어딘지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번 학기에도 내가 가르치는 반에 ‘A’는 반 전체의 30%를 주어야 한다는 대학 규정이 나왔다. 소위 말하는 상대평가이다. 반 학생들이 같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많아서 ‘A’를 주다 보니 30%가 넘는 학생이 3명이 더 있게 되었다. 3명을 더 넣으려 했더니 컴퓨터에서 ‘거절’을 해서 성적을 등록할 수가 없다. 억지 트집을 잡아서 이 3명의 학생을 ‘A’ 밑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또 하나의 학원 범죄다.


 ‘A’와 사회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내 생각에는 별 관계가 없지 싶다. 한 번은 내 평생에 처음 보는, 성적이 극히 우수한 학생 W양이 장학금 추천을 받으러 왔다. 나는 성적이 극히 나쁜 학생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극히 우수한 학생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남과 협동해서 일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암튼 나는 좋은 말로 추천서 쓰기를 거절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추천을 하더라도 별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 강의를 직접 들어본 사람에게서 추천서를 받는 것이 더 효과가 있으리라는 것, 다른 교수에게 추천서 부탁을 해보고 그래도 없을 경우 때 다시 찾아오면 그때 가서 추천서를 써 주마고…


 그리고는 한 2주 지났을까, 내가 내 연구실에서 대학원 학생들이 두 사람이나 보는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학생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키는 장승 같은 사람이 연구실 바닥에 드러누웠으니…


바로 이 순간 W양이 추천을 받으러 내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대학원 학생 중에 한 사람이 문을 빼꼼 열고 “선생님이 지금 몸이 몹시 편찮으셔서 119를 불러서 지금 어느 순간에도 119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 오면 좋겠다…” “선생님이 서명만 하면 되는데…1분밖에 안 걸리는데…” 


 선생이 어디가 아프냐, 미안하게 됐다는 등의 형식적인 말 한마디 없이 1분만 하면 서명할 수 있는데 소리만 연거푸 하더란다. 물론 이 이야기도 응급실에서 완전히 깨어난 뒤에 학생들한테서 들었다. ‘참 이상한 학생’이라는 게 학생들의 말이었다. ‘추천서 써주는 것을 거부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이때였다.


 W양은 서류로 보면 뛰어난 학생이다. 성적으로 보면 뛰어나고 우리 사회에서 그처럼 좋아하는 수석일 것이다. 그러나 남과 같이 일하는 데는 꼴찌일 가능성이 크다. 수석과 꼴찌… 다 같이 비난을 받아야 할지 다 같이 칭찬을 받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경우만큼은 꼴찌 한 학생은 다르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이번 겨울 방학에는 학생들에게 제발 책 보는 것은 그만두고 친구들과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권했다. 여행에서는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찌를 했는지 그 지긋지긋한 등수라는 게 없다. 그리고 단체 여행에서는 나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도 그리 점잖은 행동은 못 된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가 있다. 여행길에서는 학교에서 꼴찌가 가끔 일등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 (200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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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5
한국 청소년 상담원

 


 몇 주 전이다. 토론토에서 캐나다한국문인협회 모임에 갔다가 새벽녘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거의 저녁 무렵에 일어나서 아침인지 저녁인지 얼른 구별도 안 가는 어리벙벙한 중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뜻밖에 L 교수였다. L 교수는 나와 대학교 동기 동창으로 E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을 맡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한국청소년 상담원 원장으로 촉탁발령이 났다고 한다.


 나는 한국에 가면 그의 연구실을 찾아가기도 하고 또 요청 하지 않아도 특강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몇 마디의 헛소리를 해주고 점심을 얻어먹고 올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다. 10년 전에는 L교수가 그의 부군과 함께 캐나다에 여행을 왔을 때 우리 집에 들러 이틀을 놀다 갔다. 有朋自遠方來不樂乎(벗이 멀리서 스스로 찾아오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의 옛말은 제쳐두고라도 내 아내의 중, 고등, 대학교까지 선배가 되니 처가 세력을 의식해서라도 도저히 괄시 못하는 처지다.


 지금부터 40년 전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L양이 내 레이더망에 걸려든 적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출신은 성골(聖骨) 진골(眞骨)이 못 되는 안동 두메산골에서 올라온 토종 꺼벙머리 평민, 말도 한 번 사나이답게 걸어보질 못하고 4년을 보낸 한(恨)을 간직하고 있다.


 L 교수가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한국 청소년 상담원' 현판을 내가 붓글씨로 하나 써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쾌히 응낙하고 수화기를 놓았지만 한동안 회억의 실타래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1963년이었던가, 나는 서울대학병원 구내, 당시 함춘원(含春苑) 뒤에 있던 서울대학교 학생지도 연구소에서 인턴을 마치고 거기서 연구조교(그때는 유급조교라 불렀다)로 있다가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가난한 시절이었으니 우리 집은 물론 나라에서도 돈이 없어서 캐나다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여비는 한미재단의 도움을 얻어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언제였는지 분명치 않으나 직원 R씨의 부탁으로 '서울대학교 학생지도 연구소' 간판을 내가 훈민정음체로 써서 동판(銅版)으로 만들어 벽에 걸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로부터 35년의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한국 청소년 상담원'을 써달라는 부탁이 전파를 타고 건너왔으니 이 어찌 보통 인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릴 때 집에서 붓글씨를 배우다가 고등학교 때는 대구에 가서 석대(石帶) 송석희 선생께, 그리고 대학에 가서는 일중(日中) 김충현, 여초(如初) 김응현 선생께 배웠다. 국전(國展)을 준비할 때는 여름부터 그까짓 학교공부는 접어두고 파고다 공원 앞에 있는 동방연서회 서실에 가서 밥 해먹고 잠자며 글씨를 썼다. 그때 나와 같이 붓을 잡았던 서우(書友)들로는 간산(艮山) 황제국 교수, 백석(白石) 김진화, 석창(石蒼) 홍숙호, 신계(新溪) 김준섭, 일파(一波) 정상옥, 초정(艸丁) 권창륜 등 수없이 많다. 지금은 모두 한국 서예계를 주름잡는 대가들이다.


 지금 나의 아내가 된 미석(美石) 정옥자는 대학 같은 과 후배도 되려니와 동방연서회에서 붓대를 잡던 글 벗이었다. 운명의 장난으로 구름 밖으로 떠돈 지가 어언 30년이 넘었으나 오늘까지 마음 가라앉히고 붓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질 못했다. 벌써 山影人門堆不出(산 그림자가 문턱을 넘어 섰는데 밀어도 나가질 않네)의 이순(耳順)이 내일 모레다. 무정타 세월이요-.


 무용이나 노래를 하는 예술인은 내 심정을 잘 알 것이다. 어떤 때는 신명이 나고 힘이 솟구칠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 ‘한국 청소년 상담원’을 붓글씨로 써달라는 부탁이야말로 너무도 신이 나고 더덩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일이다. L교수가 바로 옆에 있다면(설사 그 부군 되는 분이 옆에서 째려본다 하더라도!) 부탁해줘서 고맙다는 큰절이라도 넙죽 올리고 싶도록 기분이 좋은 것이다.


 요즘같이 우울한 세상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만족한다” “나는 행복하다”를 외치는 것도 신종(新種) 정신병으로 볼 수 있다. 정신병 증세가 아닌 엄연한 현실감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왜 이 불초소생(不肖小生)이 뛸 듯이 기분이 좋은지 이유를 몇 자 적는 수밖에 없다.


 첫째, 나는 가끔 내 자신을 예술가로 자처하기를 좋아한다. 이 하늘 아래 예술가로서 자기 작품이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은 봉래(逢萊) 양사언도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에 “逢萊風嶽元化洞天“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놨다지 않는가.


 둘째, 나는 학문적으로 1963년부터 오늘까지 상담심리에 몸담고 있다. 늘 푼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비아냥도 할 수 있겠지만 상담실리야말로 나의 분신이요 학문적 조강지처라 할 수 있다. 상담이란 두 글자는 낯선 곳의 어느 기차정거장에서 고향 마을 이름이 엿들릴 때처럼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다. 이같이 내 인생을 바친 상담심리학을 짊어지고 나갈 사람들의 수련도장이자 상담학의 본산인 ‘청소년 상담원’의 간판을 써달라는데 어찌 신명이 나질 않겠는가.


 나는 이번 ‘한국 청소년 상담원’ 간판이야말로 건물을 부수는 쇠망치에 얻어맞고 엿장수에 팔려가는 비극적인 종말이 되질 않기를 빈다. 물론 내 글씨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담학이 대 비약을 해서 학문적인 탈바꿈이랄까 거듭 태어남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Tomas Kuhn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학문의 혁명, 패러다임의 변혁을 가져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한국 청소년 상담원’이 되기를 빈다. (19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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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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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9
난설헌(蘭雪軒)을 찾아서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라고 해서 사람 마음을 반드시 명랑한 쪽으로만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떠가는 한 조각 구름, 무심한 물소리, 바람 소리, 피고 지는 꽃잎 같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서 일순간에 무슨 슬픈 노래라도 듣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돌려놓을 때가 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찾아든 1998년 3월 하순, 이른 봄치고는 제법 훈기가 도는 어느 날, 나는 몇몇 문우들과 함께 K 여사를 인솔단장 겸 운전기사로 하고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로 차를 몰았다. 허초희(許楚姬) 난설헌(蘭雪軒)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이다.


 허난설헌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외면하던 조선사회에서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화려한 예술 꽃을 피운 3대 여류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황진이나 매창에 비해서 후세 사람들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지 못하는 것은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단가(短歌) 형식의 노래, 대중들이 좋아할 우리말 시조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난설헌 문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명희(金明姬) 교수에 따르면 난설헌의 시(詩)중에는 [공부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며] 같이 중국판 시집에는 수록이 되어 있으나 한국판 [난설헌 집]에는 들어있지 않는 것도 있는데 그 이유는 외설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난설헌의 이름은 들은 지 오래지마는 정작 그의 작품을 대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녀의 묘소가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경기도 광주에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더더욱 최근 일이니 묘소 참배는 생각을 품은 지 오래지 않아 곧 실행으로 옮겨진 셈이다.


 생각과는 달리 묘소는 초월면 지월리, 무갑산 연봉이 저 멀리 바라보이는 경수마을 안동김씨 묘역 맨 아래, 산 밑바닥에서 몇 발자국 되지 않을뿐더러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종일 끊이지 않는 그런 시끄러운 곳에 우리의 외로운 시인은 누워있었다.


 난설헌은 조선 중기 명종 때 양천(陽川)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물론 두 오빠도 당대를 휩쓸던 대 문장가요, 성리학자들이었고 동생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이었으니 실로 명문대가, 책의 향기가 끊이지 않는 부러운 환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문학적 재능으로 말하면 사방에 이름을 떨치고도 남을 재주였지마는 출생신분이 그다지 화려하지 못하다는 이유 하나로 변변한 벼슬자리 한 번 못해 본 이달(李達) 문하에서 시(詩)를 공부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동생 균과 함께 설움 받는 계층에 대한 동정의 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난설헌은 14살 때 안동 김씨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했다. 강대욱 님에 따르면 결혼 초기는 재주와 미모를 겸비한 신부로 시가(媤家)의 기대와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평범한 주부가 아닌 보기 드문 천재였던 난설헌의 시(詩)적 재능과 감성은 시어머니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극심한 불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남편은 보통 남성이었으니, 타고난 미모에 천재적 시인의 재질을 가진 부인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아내를 멀리하고 기생방 출입으로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고 자기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 정을 쏟는 남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난설헌은 "남편 김성립을 이별하고 죽어서는 영원토록 두목(杜牧)을 따르겠노라"고 했다 한다(人間願別 金誠立 地下長從 社牧之). 이는 성실치 못한 남편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도 되겠지마는 시(詩)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애착이 얼마나 뜨거웠던가를 말해주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남편과의 소원해진 관계, 어린 자식들의 잇단 죽음, 오빠들의 귀양으로 풍비박산이 된 친정, 이 엄청난 비극을 외면하기에는 그녀의 프라이드가 너무 컸던가,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구라파에서는 25살 된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잉제 막 드날리기 시작하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선조 22년의 일이었다.


 [한국 묘지 기행]이라는 책을 펴낸 고제희 님에 따르면 213수의 난설헌 시(詩) 가운데 신선이 되고 싶다는 내용이 128수라 한다. 잇단 비극에 위안을 얻을 안식처라고는 오직 한 곳, 신선 세계였음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이다.


 발아래에 뻗은 고속도로 때문에 원래 무덤을 옮겨서 그렇게 되었다 하나 어느 왕릉 못지 않는 호석을 둥글게 두른 화려한 무덤, 애당초 그녀 무덤이 이랬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 같은 시인이라도 전라북도 부안 기녀 매창(梅窓)의 초라한 무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회고(懷古)의 정마저 식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무덤 옆으로 1978년 4월에 세웠다는 어른 키만 한 높이의 화강암에 새겨진 이숭녕 님 비문은 같은 문학인으로서 선배 난설헌에 대한 존경과 찬사가 그녀의 슬픈 생애와 함께 나란히 적혀있다.


 굴종만이 강요되던 질곡(桎梏)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부인은 정녕 우뚝하게 섰다. 난(蘭)처럼 청아한 용자에 재예(才藝) 비범했던 부인은 가슴 가득한 한(恨)과 곱게 가꾼 꿈을 작품으로 승화시켰으니 인구에 회자되는 시와 문으로 해서 부인의 참 모습은 오늘에 살아있다. 스스로 버리려 해도 주옥은 제 빛을 잃지 않아서 나라 안팎에서 책이 되어 나오고 오늘의 국문학계에서 부인을 추앙하는 소리 날로 더해가고 있으니 문학사상 부인의 영명(令名)은 영겁에 빛나리라.
 무덤의 왼편에는 동호인들이 세운 화강암으로 된 기단과 오석으로 세운 비신 위에 자연석으로 된 시비가 하나 있다. 앞면에는 그가 겪은 비극 중에서 분명 그녀의 이승 하직을 재촉했을 어린 남매를 잃은 슬픔을 적은 [곡자(哭子)]가정양완 님의 소담하고 복스런 글씨로 새겨져 있다.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


알고 말고 너의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 테지.

 

 

 왜 이러한 걸출한 시인,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갖춘 시인이 한과 눈물로 살다 갔을까. 그녀의 천재적인 예술적기질 때문에 남편과 시부모과 불화했고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너무 뛰어난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두 오빠를 잃는 비극을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난설헌의 시는 남매간에 우애가 극진했던 동생 균이 그가 죽은 후 남은 시편들을 모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허균 그 자신도 끝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만약 누나보다 동생이 먼저 이승을 하직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난설헌의 시는 찾아보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M여사가 준비해온 제물을 펼쳐놓고 문배주 한 잔으로 음복(飮福)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들처럼 모두 마른 봄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보며 놀았다. 찔레 순이 고개를 내밀 채비를 하고 있을 이른 봄, 그녀 생애의 두 배가 넘는 나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월리 낯선 길을 물어물어 찾아온 그 피로를 400년 넘은 시의 향기로 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난설헌은 외롭지 않다.(19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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