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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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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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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1
놀이와 여가

 

 지난 12월에 대학 동창회에 갔다. 그 모임에서 K 은사가 "노는 법을 배워라"는 짧은 말씀을 하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K 은사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놀이는 우리 삶의 질이랄까 요사이 유행어 웰빙이라는 말과 퍽 가까운 관계에 있는 말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우리는 놀 줄 모르는 사람, 여가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지난날 우리가 즐기던 놀이나 여가란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을 치거나 TV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지 싶다. 그러나 요사이는 여가에 할 수 있는 놀이 종류가 무척 많아졌다.


 사전을 보면 놀이란 말은 "일 않고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있다. 놀이는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나 일은 힘들고 고단하다는 말이다. 놀이나 여가를 즐기고 나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그로 인해 기분전환이 된다.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그 옛날에는 다스리는 계급과 다스림을 받는 계급 사이에 구분이 없는, 핏줄로 맺어진 사회였다. 그때는 일과 놀이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으니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놀았다. 일을 하다가 지치면 쉬면서 놀이판을 벌였기 때문에 놀이는 주로 일을 즐겁게 해주는 기능을 했다. 무거운 돌을 여럿이서 함께 옮기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일하는 사람들이 지치면 무거운 돌을 내려놓고 어떤 이는 낮잠을 자고, 어떤 이는 물고기를 잡고, 어떤 이는 꽃을 꺾고, 어떤 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떤 이는 춤을 추고, 어떤 이는 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이 모두가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것, 뱃노래와 농요(農謠)가 그래서 생겼다고 한다. 이러다가 차차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생기는 계급사회로 변해갔다. 윗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힘든 노동을 적게 함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아 놀이를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놀이는 화투나 바둑, 장기처럼 주로 앉아서 비벼대는 놀이가 많다. 우리 문화가 벼농사를 짓고 사는 수도작 농경 문화였기 때문에 땅에 대한 집착이 많아 옮겨 다니는 활동이 적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 사회의 놀이와는 다르다.


 그런데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는 심리적으로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세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로 시비(是非)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네 아버지와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옛날 정(情)이나 인연에 호소하지 사리를 따져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려 들지 않는다. 


 이처럼 감성이 우세하다 보니 우리는 굿판의 야성과 격성의 심성이 많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굿판의 야성은 원초적 혼돈, 즉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미치광이가 되어 '나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엉키고 설킨 감정을 마음껏 내뿜는 열정의 마당이라고 한다.


 농사 사회에서는 경쟁보다는 협동이 요구된다. 친화적 감정을 가지는 것이 경쟁심을 가지는 것보다 살아가기에 더 유용한 사회적 기술이다. 그래서 우리의 놀이는 줄다리기나 횃불 싸움 같이 집단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많다. 


 캐나다나 미국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인종도 여러 가지일뿐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고 선택하는 놀이도 참으로 여러 가지다. 그러나 한국 같은 단순 문화에서는 여가나 놀이가 한두 가지밖에 안 된다 할 정도로 단순하다. 봄이면 연을 날리거나, 널을 뛰고, 가을이면 농악을 하거나 탈춤을 추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고스톱, 술집, 노래방, TV, 해외여행으로 그 수가 점점 늘어간다.


 캐나다나 미국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놀이에 대한 도덕적 규범이 적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자기만의 쾌락에 그치면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같은 단순 문화 사회에서는 "놀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놀이에 대한 규범이 많다. 우선 놀이는 품격에 맞아야 하고, 건전한 것이어야 하고, 점잖은 것이어야 한다. 옛날에는 탈춤이나 풍물 같은 것은 천민들이나 하는 것, 지배층은 시조나 읊조리고 가야금을 퉁기거나 난초나 치는 소위 격조 높은 놀이를 해야 한다. 그러나 물론 뒤로 돌아서는 기생을 품에 안고 별별 원초적인 놀이를 다 즐기는 그런 이중적인 데가 있었지마는.


 이 글 처음에서 말했던 것을 되풀이해보자: 노는 것도 배워야 한다. 놀 때 일 걱정하고, 일할 때 노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띈다. 이것도 일과 놀이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던 옛 농경문화의 찌꺼기가 아닌가 싶다. 


 '여가'라는 말의 '여(餘)'자는 '먹을 것'과 '넉넉하다'는 두 글자의 만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다. 우선 먹는 것이 넉넉해야 여가고 놀이를 즐길 생각이 난단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제는 우리 생활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어 놀이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 앞으로 일주일에 5일 일하는 때가 오면 "어떻게 놀까?" 하는 놀이 방법이 중요한 사회문제가 될 것 같다. (2004. 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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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물러가면서

 

 맞아죽을 각오를 하며 책을 쓴 사람이 있다더니 나야말로 맞아 죽지는 않더라도 동료 후배들로부터 "제까짓게 뭔데. "하는 비난을 각오하고 펜을 들었습니다. [교수신문사]에서 은퇴를 하면서 후배 교수들에게 교훈될 말을 적어 달라기에 어리석고 용렬한 마음에 우쭐하는 성벽으로 붓을 잡았습니다.


 후배교수들에게 교훈되는 말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한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교훈이란 말을 밖으로 내뱉는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는 뭔데'나 '메스꺼운 소리'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에서 배운 사람의 말이라도 생각하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아니꼬움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서두가 길어집니다. 내 부탁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는 현실참여에 지나치게 열심이어서 연구할 시간을 뺏기지 말라는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현실참여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현실참여야말로 자기 학문의 뜻을 구체화 해보는 경우도 되고, 상아탑이라 불리는 곳을 떠나 현실 세계를 맛보는 좋은 기회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에 보내는 시간과 정력이 너무 클 때는 책읽고 연구할 시간이 줄어들고 우리의 집중력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0년 전에 이 세상을 다녀간 거유 퇴계(退溪) 이황은 풍기를 비롯해서 몇군데 벼슬살이를 하다가 늙어서 그의 고향 도산에 돌아왔습니다. 벼슬살이 때문에 학문에 관심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던 그는 다음과 같은 노래 한 수를 남겼습니다. 요새 말로 옮겨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지요.


‘당시에 가던 길은 몇 해를 버려두고/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온고/이제야 돌아왔으니 딴 데 마음 말으리’


 여기서 가던길이란 물론 학문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400년 전 퇴계가 살던 시대와 E-mail이 왔다 갔다 하는 오늘과는 큰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의 정신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학문적으로 너무 일찍 늙지 말기를 바랍니다. 40, 50만 되어도 연구에 열의를 잃고 '원로'가 되어 뒷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애늙은이 같아 보기에 애처롭습니다. 이런 분들이 좋아하는 말은 ". 나도 연구를 해본 사람인데. " 하는 식의 거드름에 가까운 말입니다. 물론 이런 '원로'들은 학회같은 모임에 가서 자기의 연구발표보다는 종합논평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너무 빨리 늙어버리는 풍토에서는 학문이 남에게 내보이려는 패션쇼가 되기 쉽습니다.


 세 번째 부탁은 자연과학 분야보다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더 절실한 것입니다. 학문의 한국 토착화가 절실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몸담고 있는 심리학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심리학이 세계 심리학에 끼치는 영향력은 심리학 분야에 따라 다르지마는 일반적으로 90~99%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나온 석박사 학위논문이나 학회지에 발표된 연구의 참고문헌에서 미국에서 발표된 연구를 헤아려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만들어진 심리학을 '보세가공' 없이 한국에 직수입해서 쓰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화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는 미국물[H2O]이나 남미 물이나 한국물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미국 사람 다르고 한국 사람 다르고 남미 사람이 다릅니다. 이렇게 K 문화에서 L 문화로 옮겨 심었을 때는 그 나라 문화 풍토에 맞는 '보세가공'이 필요합니다. 또한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옛날 사람 다르고 요새 사람 다릅니다. 제가 몸담은 상담 심리학은 제가 유학을 떠나던 1960년대 중반에 '한국적 혹은 동양적 상담'을 세우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같은 구호만 외쳤지, 그에 대한 큰 진전은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아마 우리 능력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한국에 뿌리내리기 작업은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대학행정을 맡고 있는 어른들께 부탁입니다. 요사이 무슨 장관이다 무슨 국장이다 하는 거창한 이름의 관직에 있다가 석좌교수나 대학 총장으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앙정부 한 기관에서만 지방대학 총장으로 가는 경우가 20명 가까이 되는 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이 대학의 무슨 큰 유행이나 된 듯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에 생기는 이득도 많겠지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것이 대학을 썩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대학이 썩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리와 대학은 다릅니다. 연구업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모셔오는 것은 대학의 자존심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있던 캐나다 대학에서는 학장직을 하다가도 평교수로 돌아올 때는 일 년 정도 다른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네 머리에 녹이 슬었으니 가서 충전을 해서 강단에 서라"는 말이지요. 어느 잡지를 보니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소련의 푸틴 대통령을 석좌교수로 오는 것을 거절했답니다. 이유는 연구업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업적으로는 충분하겠지요. 그러나 대학에서 연구업적 말고 정치업적 같은데 눈을 돌린다는 것은 대학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마지막 부탁은 학생들의 말과 글, 특히 글에 신경써달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말이나 글을 보면 쓸데없이 어렵고, 안 써도 좋을 한문이나 영어를 마구 써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내친김에 어려운 말과 글을 쓰는 경향은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도 많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나이가 드신 교수들은 어려운 한문과 일본식 우리말을, 나이가 젊은 교수들은 영어식 우리말을 마구 써대는 분이 자주 눈에 띄지요. 어려운 글을 써서 남이 잘 이해를 못 해야 '깊이가 있는 글', '학문적으로 심오한 글'로 생각되는가 봅니다. 학생들도 덩달아서 '논문개요', '본 연구'에서 시작해서 '평화에로의 길',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방면의 연구는 Maxwell에 의해 연구되어졌다'는 등 어색하거나 필요없이 거창한 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글은 수백 년간 한문 영향에다 35년 2달간 일본 영향, 최근에는 미국영어 영향이 우리말과 우리 글의 설 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그 예를 들 수는 없습니다마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학교단에 서는 사람들은 이 삐뚤어진 자세를 바로잡을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러가는 마당에 할 말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마는 더 했다가는 "이 사람,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하는 핀잔을 들을까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맑고 밝게 사시기 바랍니다.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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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3
일중 김충현 [예(藝)에 살다]를 읽고

 

 전나무나 은행나무, 소나무는 나이가 5,600년을 넘는 것도 있다. 또한 나이가 많은 것일수록 웅장하고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디어낸 이유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꽃이나 사람은 다르다. 꽃이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윤기가 빠져 볼품이 줄어들고 흉해진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되도록 젊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많은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나무와 사람 사이에서 나무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예술품은 은행나무나 소나무같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빛과 윤기를 더한다.


 이번에 범우사 도움으로 [예(藝)에 살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그야말로 밤이 늦도록 읽었다. 정완영 님의 [백수산고(白水散稿)]에 이어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정서적 갈증을 축여주는 시원함이었다. [예(藝)에 살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이다. 우선 독자 중에 일중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선언한다.


 이 [예(藝)에 살다]가 무슨 내용을 담았으며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면을 더 보강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 작은 사람이다. 그러기에는 일중이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예술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는 그는 너무 큰배다. 그래서 나는 대신 내가 어떻게 해서 일중 선생을 알게 된 데 대해서 말할까 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온 것은 1958년 이른봄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때 읽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의 영향으로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 낸 세조에 맞서서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노들강변에 피 뿌리고 돌아가신 성삼문, 박팽년 등 여섯 명 충신(忠臣)의 절개를 드높이 존경하던 피 뜨거운 청년이었다. 어느 늦은 오후, 혼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 있던 사육신묘에 참배를 간적이 있었다. 그 때 일중 선생이 한글로 쓴 시비를 보고 막연하게 "이런 사람한테 글씨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는 3년 후에 그 꿈이 실현되었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미석(美石) 정옥자의 소개로 관철동에 있던 동방연서회 문을 두드리고 지정(芝汀) 이규숙의 안내로 회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맺은 인연이 1966년 내가 유학을 떠난 후에도 가끔 한국에 들를 때면 일중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으니 오늘날까지 40년에 이른 셈이다.


 [예(藝)에 살다]의 43쪽에 나오는 '동방연서회' 다섯 글자는 지난 2년전 신계 김준섭, 현암 정상옥 등 여러분의 주선으로 결성된 동방연서회에서 붓글씨를 배운 사람들의 모임인 '일중묵연' 회원 여러분들에게도 그들 예술혼의 엄숙한 도장(道場)임과 동시에 안식처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글씨에 대한 재주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흥취랄까 정서는 나름대로 즐기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동방연서회에서 백석, 석창, 신계, 중관, 현암 등 오늘날 서예계의 대가들과 함께 배웠다는 사실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하물며 일중 선생 밑에서 가로, 세로줄 긋기, 파임, 길 영(永)자부터 배운 영광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내 비록 뛰어난 제자는 못되었다 하더라도 40년 동안 변함없는 내 인생 자랑거리의 하나인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 때 일중 선생이 나를 옆에서 지도하는 사진 하나라도 찍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예에 살다]에 등장되는 인물들, 다시 말하면 일중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어른들은 당시 이 나라 예술계를 주름잡던 큰 별들이었다. 그것은 한국 근세 서예사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한국 종합 예술의 한마당 축제가 펼쳐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화려함과 웅장함을 준다.


 [예에 살다]를 보면 일중 선생은 영어로 말하면 그야말로 꽉 찬 삶(full life)을 산 어른이시다. 본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악같이 우뚝한 세 자녀에 쌍둥이 손자까지 두셨으니 말이다.


[예(藝)에 살다] 132쪽의 [서예개관: 1970년 서단회고]라는 제목을 단 글을 보면 노(老)대가로서의 선생이 후학들에게 만세에 교훈이 될 수 있는 따끔한 말 한마디를 인용하며 이 글의 매듭을 지으려 한다.


 ". 모든 공부도 다 그렇겠지만 잘못 배우면 안 배우니만 같지 못하다. 한 번 잘못 든 버릇은 고칠래야 고쳐지지 않고 누습만 몸에 배이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딱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현대 감각이니 현대 의식이니 하여 별로 기초지식도 없는데다가 엉뚱한 멋을 부리려 하여 우스운 꼴을 연출하려 든다. 이것도 큰 걱정거리다. 서투른 멋은 금물인 줄 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작가의 창의성만 알고 그의 공정(工程)을 모른 채 그 창의를 닮으려 한다면 이는 수박 겉핥기라는 옛말도 있듯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즈음 그러한 징후를 보았기에 한마다 붙여둔다."


 일중, 그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다.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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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2)

 

 

 (지난 호에 이어)
 행복의 또 다른 요소로 사회적 비교를 들 수 있다. 오늘 나의 행복이 남의 성취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는 것.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이것이 왜 어제의 빈곤한 사회가 오늘의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해도 행복감은 그대로 있느냐는 것을 설명해 준다. 


 한마디로 내 손에 든 떡이 남의 손에 든 떡보다 작을 때는 행복감을 못 느낀다. 연구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 20%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도 안 된다. 대부분은 "남은 부자이고 나는 부자가 아니가"고 생각한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행복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개 적어보자.


 첫 번째는 아주 능동적이고 활동적이고 바쁘게 지내라는 것이다. 조용하게 지내지 말고 아주 바쁘게 지내자. 꽃꽂이를 한다든지, 낚시를 간다든지, 사교춤을 춘다든지, 헬스클럽에 간다든지, 개를 키워보자. 활동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행복감을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교, 친교, 대인관계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며 참여하는 집단이 많고 분주할수록 좋다. 온종일 쏘다니고 남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다. 아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못 가서 대학교를 못 가면 어쩌나 약 20년 앞을 내다보고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있다. 그것은 그때 가서 할 일, 우선 걱정을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을 하자.


네 번째는 우리가 가진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희망사항이 있는건 좋은데 희망이 너무 크면 실망도 너무 크기 마련이다.


 다섯째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너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값진 것은 눈물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을 생각하면 슬퍼할 일도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섯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내 권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어하던 것을 마음껏 유감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째는 내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보면 "조그마한 놈이 무엄하게 나를 닮았다"고 혼을 내준단다. 그런데 사람은 호랑이보다 못해서 그 반대로 "나를 왜 안 닮아주냐"고 야단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한, 즉 누구를 속일 권한, 누구에게 정직하게 행동할 권한,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앞세울 권한, 남을 도울 권한, 바보짓을 할 권한, 거짓말을 할 권한, 얌체짓, 질투를 할 권한도 있고, 순수하게 살 권한도 있다.


 여덟째는 행복에 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 나에게 행복이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사과가 내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아홉 번째, 우리가 행복감을 방해하는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즉시 다른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된다. 불안하다, 걱정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걸 더 건강한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한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 때 손을 쓰지 못하고 운명에 내맡긴다. 행복을 방해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해야 된다.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생각이 들어도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하루 종일 '나는 가치 없는 인가', '나는 쓸모없는 인간',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루 종일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있다.


 열 번째는 우리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한 극단적인 생각을 스스로 하고, 그 생각 때문에 우리 감정이 영향을 받는다. 어려운 문자를 쓰자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가끔 "나는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사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모르지만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등의 극한 용어, 즉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 때문에 불행감에 시달린다.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합리적이다. 이같이 비합리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는 우리는 재빨리 그 합리적 근거를 찾아보고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울 때는 용감하게 그 비합리적인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비합리적 생각 말고도 우리는 여려 개의 비합리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지어보면 행복이란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생각에서 끝나는 것이다. 또한 행복은 만들어지는 것인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002. 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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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8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1)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맨 첫 번째 나오는 답은 돈이다. 그럼 "돈이 행복을 가져오느냐?고 물으면 "물론"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연구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의 돈은 행복을 가져오지만 그 이상은 행복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기본권리가 주어지고 의식주가 넉넉하고 여려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 이를테면 캐나다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행복감과 돈은 관계가 없다.


 물질적인 풍요에 비례해서 행복감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효용체감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월급이 처음 10만원 올랐을 때와 두 번째 10만원 올랐을 때는 다르다. 결국 가서 문제 되는 것은 절대적인 부가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부이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버는 돈에 어느 정도 만족하느냐 하는 해석에 달려있다.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가진 것에 얼마나 행복해 하느냐에 달려 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슬픈 일, 기쁜 일이란 없다. 오직 슬프고 기쁜 생각이 있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은행에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보다도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얘기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평을 좀 덜해야 된다. 어떤 말을 입 밖에 내놓느냐에 따라 우리 감정과 생각이 달라진다. 물론 우리 감정과 생각에 따라 우리의 말도 달라지지만 우리가 입 밖에 내놓는 말에 따라 우리 감정도 영향을 받는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태도를,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된다. 한마디로 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똑같은 의견이나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 그것을 정말로 믿게 된다고 한다. 교회에 가면 이 원리를 이용해서 신도들로 하여금 "미쉼다(믿습니다)" "미쉼다"를 수십 번씩 외치게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약간 말머리를 돌려서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가 생각해보자. 성공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실패를 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모두가 일시적이다. 복권에 당첨된다든지, 월급이 올랐다든지, 자전거를 새로 샀다든지, 새 집을 장만했다든지, 새 양복을 장만했다든지.  


 이 모든 것도 일시적인 것으로 오래는 못 간다. 자동차 사고라든지 실연의 쓰라림, 심지어 암(癌)에 걸린 사람도 몇 달만 지나면 정상적인 감정상태로 돌아온다는 보고가 많다고 하지만 한 마디로 우리가 흔희 얘기하는 것처럼 "시간이 약"이라는 것이다. 중국 속담에 "끝이 없는 파티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맹인이나 불구가 된 사람들도 일정한 기간의 적응기가 지나면 정상에 가까운 기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미국 일리노이즈 대학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면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은 50%가 행복하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20% 정도이고, 30%는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로 대답했다. 신체적으로 불구인들의 행복감도 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행복감은 우리의 이전 경험에 달려 있다. 심리학의 중요한 원리 하나는 사람은 이전 경험에 비교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새 집을 산다든지, 새 자동차를 산다든지, 월급을 받는다든지 이 모든 것이 이전과 비교해서 상하로 감정이 구분된다. 경험이 바뀌면서 옛날의 사치가 오늘의 빈곤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정신과 의사는 "이따위 연봉을 받고 공직에 있는 의사로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 따위 연봉이라는 게 2억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돈을 가지고 이따위 연봉이라고 했다. 왜나면 자기의 과거 수입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이전과 비교하는 이러한 현상 때문에 사람들은 욕심을 내고 더 큰 것을 성취하려고 애쓴다. 만약 이 현상이 없다면 우리는 첫번 성공에 만족하고 절대로 더 올라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환경에 적응하는 현상 때문에 복권 당첨의 행운이라든지, 새 자동차라든지, 교통사고라든지, 잃어버린 애인리라든지, 암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며 이에 대한 우리의 불행감도 줄어든다.


 우리의 행복은 그날그날 일어나는 작은 일에 따라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에게 쌀을 보내 주어야 하는가?" 같은 제목으로 싸우는 부부는 없다. 아주 시시콜콜 작디작은, 남에게 이걸로 싸웠다 하기에 창피한,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원수나 만난 것처럼 싸운다.


 둘째 원리는 반작용의 원리이다. 반작용 원리라는 것은 한 가지 감정은 반드시 그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가 끝나면 그 반대되는 감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술꾼이 술기운이 떨어지면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행복의 또 다른 요소로 사회적 비교를 들 수 있다. 오늘 나의 행복이 남의 성취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는 것.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행복감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데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이것이 왜 어제의 빈곤한 사회가 오늘의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해도 행복감은 그대로 있느냐는 것을 설명해 준다. 


 한마디로 내 손에 든 떡이 남의 손에 든 떡보다 작을 때는 행복감을 못 느낀다. 연구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 20%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도 안 된다. 대부분은 "남은 부자이고 나는 부자가 아니가"고 생각한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행복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개 적어보자.


 첫 번째는 아주 능동적이고 활동적이고 바쁘게 지내라는 것이다. 조용하게 지내지 말고 아주 바쁘게 지내자. 꽃꽂이를 한다든지, 낚시를 간다든지, 사교춤을 춘다든지, 헬스클럽에 간다든지, 개를 키워보자. 활동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행복감을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교, 친교, 대인관계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며 참여하는 집단이 많고 분주할수록 좋다. 온종일 쏘다니고 남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다. 아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못 가서 대학교를 못 가면 어쩌나 약 20년 앞을 내다보고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있다. 그것은 그때 가서 할 일, 우선 걱정을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을 하자.


네 번째는 우리가 가진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희망사항이 있는건 좋은데 희망이 너무 크면 실망도 너무 크기 마련이다.


 다섯째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너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값진 것은 눈물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을 생각하면 슬퍼할 일도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섯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내 권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어하던 것을 마음껏 유감없이 할 수 있어야 하낟.


 일곱째는 내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보면 "조그마한 놈이 무엄하게 나를 닮았다"고 혼을 내준단다. 그런데 사람은 호랑이보다 못해서 그 반대로 "나를 왜 안 닮아주냐"고 야단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한, 즉 누구를 속일 권한, 누구에게 정직하게 행동할 권한,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앞세울 권한, 남을 도울 권한, 바보짓을 할 권한, 거짓말을 할 권한, 얌체짓, 질투를 할 권한도 있고, 순수하게 살 권한도 있다.


 여덟째는 행복에 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 나에게 행복이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사과가 내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아홉 번째, 우리가 행복감을 방해하는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즉시 다른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된다. 불안하다, 걱정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걸 더 건강한 생각으로 바꿔치기를 해야 한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 때 손을 쓰지 못하고 운명에 내맡긴다. 행복을 방해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해야 된다.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생각이 들어도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하루 종일 '나는 가치 없는 인가', '나는 쓸모없는 인간',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루 종일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있다.


 열 번째는 우리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한 극단적인 생각을 스스로 하고, 그 생각 때문에 우리 감정이 영향을 받는다. 어려운 문자를 쓰자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가끔 "나는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사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모르지만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등의 극한 용어, 즉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 때문에 불행감에 시달린다.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합리적이다. 이같이 비합리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는 우리는 재빨리 그 합리적 근거를 찾아보고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울 때는 용감하게 그 비합리적인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비합리적 생각 말고도 우리는 여려 개의 비합리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지어보면 행복이란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생각에서 끝나는 것이다. 또한 행복은 만들어지는 것인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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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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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행복 불감증

 

 토론토대학교 철학 교수로 있는 킹웰(Mark Kingwell)이라는 사람에 따르면 현재 이 세상에 알려져 있는 정신병은 모두 374개로 거의 400개에 가깝다 한다. 이것은 10년 전의 297개에 비해 무척이나 많이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정신병 종류가 많이 늘어난 것은 문화적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상태의 혼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심리학에서 나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생리적이랄까, 타고난 성향이 상상외로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자신에게 좋은 일, 즉 자신에게 긍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횟수가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감이 높은 반면 자신에게 좋지 못한 일, 즉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횟수가 많은 사람들은 행복감이 낮을 것 같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객관적인 사건과는 관계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행복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계없이 언제나 행복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행복감이라곤 느끼지 못하고 불평불만으로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돈이 많고 교육 정도가 높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행복감이 남보다 높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고, 가난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감이 낮은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좋은 소식이다. 신(神)은 이 세상을 참 공평하게 만들었나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밤에 두 아이를 둔 아버지가 생활고로 자살을 했다는 아침 뉴스를 듣고 "생활조건이 좋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 때가 많다. 그런데 그 결론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조건은 행복감과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는 연구보고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다. 사회적 지위, 돈, 이 세 가지가 종합해서도 행복변량의 8%~15% 밖에 설명 못한다는 것이다. 행복감과 가장 큰 연관을 보이는 것은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건강이라고 한다. 역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평범한 말은 천년을 내려와도 변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이 곧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는가.


 그런데 상대적으로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 간에는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는 데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즉 좋은, 긍정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행복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간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좋지 못한, 부정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는 데는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 즉, 행복감이 낮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건을 더 부정적으로,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은 부정적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의 긍정적 면을 찾아내어 덜 부정적이 되도록 해석한다는 주장이 있다. 


 예로 시험에 낙방을 한 것 같은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행복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은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막다른 골목에 왔구나" 하는 극히 부정적인 해석을 한다는 것. 그러나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은 "내가 시험에 떨어지다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다. 이번 낙방을 좋은 경험으로. " 하는 식의 덜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지도하고 있는 I양의 석사논문에서는 그 반대 결과가 나왔다. 노인들은 연구 대상으로 한 그이 논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즉 노인들은 부정적인 사건을 해석하는 데는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과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 간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긍정적 사건을 해석하는 데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즉, 행복감이 높은 노인들은 긍정적인 사건을 더 기분이 좋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행복감이 낮은 노인들은 행복한 사건이 있어도 그다지 행복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결과이다. 


 우리는 아직 이 선행연구와 다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노인과 젊은이들 차이 때문인가. 젊은이는 늙은이에 비해 부정적 사건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진다는 연구 보고가 많다.


 사람의 일생이란 것도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건강을 찾고, 돈을 벌고, 지위를 찾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간절한 소망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에서 행복을 완전히 거머쥔 사람도 없고, 행복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없다. 듣기 좋은 말이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가까운데 두고 그걸 찾아 그렇게 멀리 헤매는 것이 인생살이라 생각하니 사람이란 게 무척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청마(靑馬) 유치환의 노래처럼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마는 머리 위에 푸른 하늘 있어 이렇게 행복되노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200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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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묘지송(墓地頌)

 


 요사이 들어 묘지를 찾아가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지난 9월에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집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정도 걸리는 동네 공동묘지에 모신 후다. 사실 나는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도 묘지에 가서 돌아다니길 좋아했으니, 이 버릇은 꽤 오래 된 셈이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인 1974년 중반에 캐나다 서부의 레드 디어(Red Deer)라는, 우리 말로 옮기면 '붉은 사슴'이라는 인구 3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마을에 있는 앨버타 학교 병원(Alberta School Hospital)이라는 기관에서 심리학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 기관은 웬만한 크기의 대학보다도 더 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부속 건물들도 서로 1천 미터나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A군(群)과 B군으로 갈라져 있었다.


 A군에서 B군 건물 사이에는 작은 계곡이 하나 있고 바로 그 계곡 옆으로는 큰 공동묘지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다른 건물군(群)으로 오갈 때는 그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호기심으로 몇 번 그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묘석을 살펴보며 다닌 것이 그만 습관이 되고 말았다. 간혹 중국 산동성(山東省) 어디에서 태어나서 캐나다에 와서 죽었다는 것을 한문으로 적어둔 묘석을 볼 때는 아련한 향수나 슬픔 같은 것이 배어들어 한참 그 묘비의 주인공에 대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장모님 묘소에서 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우리 동네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 우리 마을 사람들의 묘석도 대여섯 개가 눈에 띈다. 그 가운데 C형의 묘석은 볼 때마다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마흔여섯 살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C형은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었는데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캐나다에 친척은 물론 가까운 친구도 별로 없어서 뼈에 저리도록 외롭게 살았을 C형. 췌장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는 그가 죽기 며칠 전에 문병을 가서 임종석에 누워 눈을 껌벅이며 씩 웃던 그를 본 생각이 난다. 바다가 보이는 양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나 바다가 천리만리 밖인 우리 동네에서 그 유언은 사치스러운 빈말이 되었고, 그 대신 템스강 물줄기가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공동묘지에 잠들게 되었다. 아내도 자식도 없이 갔으니 그가 묻힌 후 15년 동안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을까? 아무도 없지 싶다.


 내가 공동묘지를 좋아하는 데는 무슨 별난 사연이나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 한다면, 술이 내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면 묘지는 내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진정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묘지는 내가 세상을 때문에 안달하고, 성내고, 시기하는 것은 물론, 기뻐하고, 흥겨워하고, 뻐기는 그 모든 일체를 한순간에 가라앉혀 버리는 것이다.


 인생이 허무한 것이라는 생각을 뼛속까지 느낄 때는 장례식에서 돌아올 때일 것이고 세상살이를 그렇게 바둥대며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좀 마음을 놓고 쉽게 살아가자는 다짐이 간절할 때는 묘비 앞에서일 것 같다.


 묘지는 내 삶의 모든 것과 심지어는 삶 그 자체까지 새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묘비 앞에 서면 죽음과 친숙해질 수 있어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도 줄어든다.


 생각해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무서운 것이지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삶이 끝나면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난다"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죽은 뒤의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S형이 마흔일곱 나이에 간암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나는 걸핏하면 그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다. 장모님은 "공연히 그런데 가는 게 아니다"는 충고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죽음이 상서롭지 못하고 불쾌한 것이라는 생각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오전에 장모님의 무덤을 다녀왔다. 나보고 "일없이 그런데 자꾸 가는 게 아니다"고 충고하시던 장모님이 오늘은 어느 시인이 그의 친구 무덤 앞에서 읊은 노래처럼 "아, 벌써 가느냐고, 언제 또 오느냐"고 무덤 속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으실 것만 같았다.(199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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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행복(2)

 

 
 현대인의 행복이 원시 태곳적 환경과 너무나 뚜렷한 차이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면 이에 대비해서 현대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서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더위와 추위, 전염병과 천재지변에 별 대처를 할 수 없었던 원시 태곳적 환경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진화심리학이 현대인의 행복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처방'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맨 먼저는 흩어진 가족, 일가친척 간에 약해진 상호지지 관계를 보완 수습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식구들과 일가친척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꿈을 찾아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해서 서로가 외로움과 우울증을 겪기 쉬웠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보다 더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해야 한다. 


 이 점에서 핸드폰은 물론 E-mail이나 팩스, 비디오테이프 같은 전자 통신 수단은 실로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저쪽 아프리카 대륙의 공사장에 있는 아들이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사촌, 친구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천리를 지척에 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지 않는가.


 행복을 향한 걸음의 또 하나는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깊은 우정을 나누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깊은 우정이란 평상시보다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찾아보기가 더 쉬울 것이다. 서양 속담에 "필요한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현대 사회는 진짜 우정을 시험할 수 있는 많은 '위기'들은 거의 사라졌다. 무서운 짐승들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천재지변의 위험도 이제는 극히 적은 정도로 줄어들었다. 도둑질이나 강탈 행위는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부족과 부족,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다툼은 경찰서와 재판소가 관리한다.


 무서운 짐승들과 싸우는 데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칼을 들고 나설 친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겪는 비교적 '좋은 시절', 풍랑 없는 뱃길에서는 진짜 우정과 가짜 우정의 차이도 희미해졌다.


 인간이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진화를 했다면 그것을 줄이는 사회적 환경도 만들 수 있다. 예로,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가치, 흥미, 취미, 성격과 비슷한 사람으로 정하는 것은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많은 사회심리학 연구가 배우자 간에 흥미나 가치, 성격이나 취미가 서로 다르면 그 사이에 애정의 금이 가기 쉽다고 한다. 서로 달라서 매력을 느끼고 상호 보충을 할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틀린 말이다. 가치나 흥미 취미나 성격이 비슷한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은 배우자의 바람(외도)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을 막는 좋은 방법이다.


 진화론에서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 중에 가장 큰 어려운 문제 하나가 상호 경쟁과 자리다툼에 대한 생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차별을 없애고 협동을 늘이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이 내놓을 수 있는 충고의 하나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식의 공동 운명의식을 권장하는 것이다. 적에 대한 공동 투쟁, 천재지변 같은 고난에 대한 공동 노력같이 개인의 운명이 집단 안[內]사람들의 운명과 연관이 될 때는 경쟁심은 내려가고 협동심을 올라가기 마련인 것이다.


 행복을 성취하는 또하나의 방법은 진화된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적응해서 진화한 것처럼 성취를 해서 오는 기쁨도 진화를 했다. 성공, 건강하나 육체, 남을 돕는데서 오는 기쁨, 긴밀한 인간관계, 자신감, 유능감 등은 현대인에게 가슴 뿌듯한 행복을 안겨주는 것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은 결혼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유전인자, 즉 자기의 종자를 넓게 많이 퍼뜨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쉬운 것이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아룁기 황송한 말씀이나 행복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하나는 남녀를 막론하고 결혼을 한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남편의 횡포, 아내의 변덕, 자식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시집, 처갓집 식구들 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지마는 그 부대끼는 세월에 부대끼는 즐거움이 그래도 독신으로 사는것보다는 훨씬 더 크다는 말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미(美)적 감각도 원시 태곳적 환경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즉 인간은 미적 유쾌함을 즐길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가지 기제를 가지도록 진화했다는 것. 예로, 현대인은 원시 태곳적 풍경과 비슷한 초원과 지형을 좋아하며 인공재배보다는 자연산을, "남은 나를 들여다보지 못해도 나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비밀스런 장소에 집을 짓기를 좋아한다. 


 오늘의 현대인은 일년 열두 달 어느 때나 슈퍼마켓 선반에 놓인 채소를 집어들 수 있으니, 3, 4월 봄이 와서 첫 냉이 뿌리를 캐서 입에 넣는 원시 태곳적 사람들의 달콤한 맛을 느끼기는 어렵게 되었다. 없는 게 없고 지나치게 편리한 세상이 놀라움과 반가움에서 오는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는 앞에서 말한 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중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예로, 사람은 얻음[得]과 잃음[失]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는다. 돈 10만원을 잃어버리는 아픔은 10만원을 얻은 기쁨보다 훨씬 더 오래가고 그 아픔은 기억 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정구선수가 말한, "나는 이기기를 좋아하기보다 지기를 싫어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까. 


 왜 잃음[失]의 아픔이 얻음[得]의 기쁨보다 오래 가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날 현대인의 감정이 행복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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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d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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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행복(1)

 

 몇 주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어느 음악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서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활[bow]을 막 바이올린에 대려는 순간, 어디서 "삐르르르, 삐르르르. " 하고 핸드폰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순간 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란 바이올리니스트는 활을 내리고 "아줌마 빨리 전화 받으세요. " 하는 말을 내던지고는 무대 옆으로 휙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나도 몹시 난 것이 틀림없다.


 지난해 8월 한국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이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였다. 이 요물은 실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전철, 버스, 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 강의실, 극장, 화장실, 목욕탕, 어디 한 군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공중장소에서 고막이 터질 듯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데(특히 경상도 아줌마 아저씨들 제발 좀 봐주셔요) 놀라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내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목이 터져라고 "냉장고 쪼꼬마한 냄비 안에 있는 콩나물국 뎁혀 머거레이" 하고 소리치는 어머니의 애정 어린 지시를 들으면 그런 고성능 전파를 타고 오는 어머니의 보살핌 한 번 받아보질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데 대한 억울함 비슷한 것도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핸드폰같이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긴밀하고 가깝게 만들어 주는 데 도움이 될까 안될까, 더 길게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닐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텔레비전을 생각해보면 행복을 증진하는데 방해는 되지 않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 보다는 따로따로 떼어놓는 반(反)사회적 행동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텔레비전은 사람들을 안방에 가두어 두고 여름밤 이웃집 아저씨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친(親)사회적인 행동을 막는다. 동네 아이들도 집 밖에 나와서 저희끼리 와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은 점점 줄어가고 텔레비전, 아니면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외로운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을까.


 텔레비전과 비교해서 핸드폰은 어떨까? 약간 길을 벗어난 이야기가 되겠지마는 일반적으로 진화 심리학에서는 동굴 속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의 원시 태곳적 생활환경과 현대 환경의 엄청난 차이 때문에 현대인이 행복감을 느끼는데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진화심리학이란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진 모든 특성은 동굴 생활을 하던 원시 태곳적 환경에서 시작해서 수수만년을 내려오는 동안 정직성이나 책임감 같은 다른 모든 심리적 특성이 생리적 특성과 마찬가지로 생식과 번식에 필요한 진화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은 진화의 마지막 결정체로 본다. 


 이런 심리적 특성들은 처음 원시.태곳적 환경에서 맹수나 천재지변과 질병에 시달리고, 다른 부족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나 현대생활에서 행복을 성취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견해이다.


 예로, 질투심이 그렇다. 질투심이란 태곳적 환경에서는 자기의 종자번식에 절대 필요한 성(性)적 파트너를 남에게 빼앗기거나 자기의 파트너가 몰래 남의 아이를 잉태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생긴 특성이었다. 그런데 이 질투심은 자기 파트너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사람들이 자기의 성적 파트너를 남에게 빼앗기거나 남의 아이를 잉태했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사람들을 종족 보존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의 잔재로 남아 있는 특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그 질투심 때문에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거나 잠 못 이루는 밤의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이것 말고도 태곳적 환경과 현대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현대인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경우는 실로 많다. 예로, 태고 원시적 환경에서는 보통 50명, 100명의 혈육으로 얽힌 소규모 집단으로 살았으니 성(性)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르다. 10만, 100만의 무수한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 퍼져 살고 있고 성(性)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후보자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성관계는 늘어가는 반면 깊고 긴밀한 성관계를 줄어든다. 여기서 오는 정서적인 공허감도 현대인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무시 못할 요소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매스 미디어는 날마다 세계 정상급 미남 미녀, 정상급 운동선수, 정상급 음악가, 정상급 댄서 등 그야말로 한 나라 혹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상급 음악가, 정상급 댄서 등 그야말로 한 나라 혹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상급에 대한 사람들의 소개를 쏟아 놓는다. 원시 태곳적 환경에서는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힘센 사람’이나 ‘얼굴이 제일 예쁜 사람’은 이제 그 나라 혹은 세계의 정상급과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될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뿌듯한 자신감에서 오는 행복감을 유지하기는 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원시 태곳적 환경과 현대 생활환경의 차이 때문에 행복감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에 대한 ‘대책’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자주 해서 외로움을 덜게 함으로써 원시 태곳적 환경과의 차이를 좁히는 것일 것이다. 이 점에서 핸드폰은 크게 공헌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이제 몇 발짝만 더 가면 어디쯤 도착할 것 같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서는 대화도 많고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좌우간 소위 핸드폰같이 문명의 이기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데 한몫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에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를 보고 “선생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 “야 이 사람아, 내가 삶[生]도 모르는데 죽음[死]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하지 않는가.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승의 삶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행복은 나 이외 다른 인간과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 없이 내 행복은 어려워진다. (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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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논다는 것

 
 학생들에게 이번 방학에 무얼 하느냐?고 물어본다. 대부분이 영어 강습소를 다녀 영어 실력을 올리겠다는 대답이다.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든지, 소설이나 보며 집에서 실컷 놀기나 하라고 권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놀 수 있는 때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때는 바로 학창 시절, 그것도 방학 때일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학생들은 여행은 참 좋은 생각이지만. 하고 뒤끝을 흐린다. 아마도 여행할 돈이 없기보다는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뒤로 물려놓고 여행을 쉽게 갈 수 있겠느냐는 것 같다. 요새 학생들은 이런 의미에서 참 불쌍하다. 웬 학생이 해야 할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여행은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은 즐거운 것. 여행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성 행사이다. 그런데 우리는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엄연히 구분한다. 책을 들여다보며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려 할 때는 공부, 만화나 보고 낚시질을 가는 것은 노는 것이라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놀이는 일 않고 세월을 보내는 것이니까.


 '놀다'라는 말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니 여가가 있어야 쓸 수 있는 행위이다. 옛날 옛적에는 놀이는 일과 함께 존재했다. 즉 놀이는 노동을 즐겁게 해주는 목적으로 있었다. 농사일을 하며 부르는 농요나 고기를 낚으며 부르는 뱃노래를 보면 알 수 있다. 


 고인돌을 운반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무거운 돌을 움직이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어떤 사람은 술을 마셨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풋잠을 잤을 것이다. 모두 다 다음 차례릐 힘든 노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놀이를 한 것이다.


 한편 일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다. 옛날 옛날 그 옛날, 일과 놀이가 나뉘어지기 전에는 노는 꼴이나 노는 양도 사람들 사이에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계급 사회가 되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나타나면서 가진 자는 고된 노동을 적게 함으로써 시간적 여유가 더 많았고 놀 시간이 더 많아졌다.


 놀이에도 동서양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같이 집단주의 유교권 사회에서는 노는 데도 '건전하게', '점잖게', '신분에 맞게' 놀아야 한다. 그러니 서당깨나 다닌 사람은 여가에 난초를 치거나 서화나 창을 즐길 것이요, 놀이패 같은 것은 못 배운 사람이나 하는 놀이다. 놀이에 대한 경직성이 크고 여가선택의 폭도 극히 좁다. 예로, 봄이면 널 뛰고, 연 날리고, 윷판 벌리고 여름에는 그네나 씨름, 가을이면 강강수월래나 농악이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놀이도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도박을 한다든지 버스간에서 춤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여가 사회학]이라는 책을 쓴 김문겸님 주장에 의하면 우리 놀이에는 TV나 술집, 바둑이나 장기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서 깔고 뭉개는" 놀이가 많다고 한다. 땅을 떠나기 싫어하는 농경사회의 유물이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놀이가 사회 공익만 해치지 않고 자신에 기쁨만 주면 OK이다. 고로 여가문화도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의식만큼 여러 가지여서 개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그 자체가 여가이다. 여가의 범위는 여러 가지이다. 도박, 마약 등이 사회적으로 큰 거부감 없이 여가활동으로 수용된다는 것이 Godbey라는 사람의 주장이다.


 우리나라 같은 농경국가에서 출발한 나라의 놀이는 협동을 요구하거나 집단 단결을 유지하는 놀이, 예를 들면 줄다리기나 횃불싸움 같은 것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좀처럼 혼자서 노래방이나 술집을 가지 않는다.


 그런데 요사이 놀이의 여왕벌로 뜨는 것이 하나 있으니 이는 다름 아닌 노래방이다. 노래방은 참으로 단군의 피를 받은 자손 적성에 맞는 놀이인 것 같다. 첫째 그것은 노래 중심이니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사람 취향에 꼭 맞는 것이요, 둘째 노래방은 여러 사람이 빙 둘러앉아서 제 신명나는 대로 하는 것이니 미리 정한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첫 번째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 지목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도 알고 보면 어디까지나 나이 많은 사람을 빨리 잠재우고 젊은 사람들끼리 놀겠다는 속심이 있는 경우가 많다. 


 셋째,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노래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는 큰 상관이 되질 않는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정말 노래를 잘못할 때는 응원군은 얼마든지 있다. 노래를 잘하고 잘못하고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노래방이 한국 사람의 놀이 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는 크고 오래갈 것 같다.


 한국의 놀이문화는 굿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굿판에서는 흥을 잘 내든 못 내든 별 상관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술을 마실 줄 모른다 해도 억지로 술을 권하는 것도 굿판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가진 자라 할까 지배계급의 놀이행사도 이중적으로 되어 있는 사회도 드물지 싶다. 우리나라에서 지배계급은 겉으로는 ‘건전’을 외치지만 뒤로 돌아서서는 ‘호박씨 까는’, 원색적인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다. 건전을 외치던 지배계급이 은밀히 또 하나의 ‘사모님’을 두고 있다든지 원색적인 오락을 즐기고 있을 때가 많다는 말이다.


 오는 겨울방학에는 학생들이 뭐좀 달라졌겠지. 어떤 녀석은 소설을 많이 읽었을 테고, 또 어떤 녀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워 동해안 눈바람을 맞고 왔을 것이다. 이 모두가 어른이 되면 해 보기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쉽지 않은 놀이들이라는 것은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보면 알 일.


 1주만 있으면 겨울방학이다. 신난다. 나에게 시작되는 영원한 겨울방학, 즉 은퇴가 내년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은퇴하면 무엇을 할까?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그것도 쓸데없는 일. 10분만 보면 눈이 어른거려 책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색소폰이나 부- 부- 불어보고 싶지만 그럴 기운이 있겠는가.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에 큰 저수지가 있으니 낚시질이나 갈까. (2004.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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