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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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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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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산토끼 토끼야(1999)

 

 O형, 12지(支)란 자(子), 축(丑), 인(寅), 묘(卯)로 시작되는 60갑자의 아랫부분을 이루는 12개의 지지()를 말하는 것으로 세월의 바뀜을 구별하기 위해서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 12지(支)에 닭, 쥐, 뱀, 소 등의 그 해[年]를 상징하는 동물들과 짝을 지어놓고 그해에 태어난 사람들 성격이나 팔자까지 점칠 수 있는 '부수입'이 따른다고 하니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재미있는 생각이지요.


 올해는 기묘(己卯)년, 토끼해라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 하나가 토끼인 것을 보면 그 토끼가 얼마나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존재인가를 알 수 있지요.

 

 애당초 나는 토끼해라고 해서 "토끼야 토끼야 산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로 시작되는 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 <토끼야>가 요사이 우리 현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노래를 적을까 하다가 나와 인연을 맺은 지가 좀 더 오랜 이일래 님의 작사 작곡 <산토끼>를 적고 말았습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데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데를 가느냐

 

 

 지금 생각하니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학예회 때 토끼와 연관되는 연극을 한다고 무대 위에 올라갔던 일이 어슴푸레 생각납니다. 나는 주연급 배우역은 아니었으니 틀림없이 무대에 올라서서 말도 한 번 못하고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내려와야 하는 그런 말단 조역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O형, 이것도 내가 토끼와 맺은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환갑이 내일모레인 이 나이에도 동요를 부르면 마음이 고와지고 기분이 젊어지는 것 같은 것을 보면 세상살이에 시달린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그 착하디착한 어린 시절의 순정이 아직은 조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나는 신년 붓글씨 꺼리를 가끔 동요에서 찾습니다.


 O형, 겨울에 토끼가 어려운 것처럼 요사이는 나라 안팎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경기(景氣)가 풀린다"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떠돈 지가 벌써 언제부터였지마는 일선에서 뛰는 사람들의 말은 "아직 멀었다"고들 합니다.


 중국속담, "끝이 없는 파티는 없다"는 말은 곧 "끝이 없는 불경기도 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니 O형, 다음 8글자를 담은 옛말, 즉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괴로움이 다하면 기쁨이 온다(興盡悲來 苦盡甘來)"는말을 믿어 보는 것도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
설사 저 장천(長天)에서 동아줄을 내려준 대도
이 강산 이 수심(愁心) 버리고 하늘에는 내사 안 갈래
풀피리 불자던 봄이 너 더불어 오지 않는가

 


 시조시인 정완영 님의 책에서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O형, 얼마 안 있으면 봄이 올 것이고 또 그러다보면 이 어려움도 봄 눈 녹듯 스르르 풀리는 날이 오겠지요. 부디 건강하십시오. (1999. 1)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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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살어리 살어리랏다”

 

 해를 보내며 붓글씨 하나와 거기에 따른 짤막한 글 한 편을 보내달라는 신문사의 청탁을 받고 무엇을 쓸까 생각을 해봤다. 


 "힘차게", "희망 속에서 웃음을 잃지 말고", "인내로 용맹정진", "황소처럼 튼튼하게" 따위의 듣기 좋은 꽃노래는 여러 번 불렀고 올해에도 내가 아니더라도 이 말을 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 소재 찾기의 방향을 서정적인 쪽으로 돌렸다.


 도덕적이고 훈계적인 말을 싫어하는 데다가 밝고 힘찬 구절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서정적인 구절밖에 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한문 구절은 피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작자 미상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옛시조, 현대 시(詩)를 뒤적였으나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눈에 띄질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위에 적은 고려 때의 속요 [청산별곡]이 떠올라서 여간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금년 봄에 안식년으로 경기도 판교에 있는 정신문화연구원에 가 있는 동안 순천대학교 한약재료학과 교수로 있는 Y양의 초청으로 담양의 정자골과 순천에서 가까운 경상남도 하동(河東) 주위를 맴돌다 온 적이 있다. 


 하루는 순천 송광사엘 갔다가 해질 무렵에 그 절 뒤에 있는 법정(法頂) 스님이 기거하던 불일암(佛日庵)에 들렀다. 불일암은 [서 있는 사람들] [영혼의 모음] 등을 비롯한 법정수필 문학이 태어난 곳이다.


 주인은 가고 없는 빈 뜨락 밑으로는 후박나무가 한그루 서 있고 스님이 거처하던 허름한 한일(一)자 건물 벽에는 [청산별곡]을 적어서 걸어둔 현판이 하나 눈에 띄었다. 


 이런 산 속에 [청산별곡] 같은 노래가 벽에 걸려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공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방은 티 없이 맑고 무덤 속 같은 정적이 깔려 실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생각이 난다.


 [청산별곡]은 모두 8절로 고려 시가(詩歌)에서 공통적 주제인 생(生)에 대한 체념과 고독, 탄식과 허무, 은둔과 비애를 읊은 애절한 노래다. 깊은 산 속과 바닷가 어디를 헤매어도 이 마음의 공허를 메울 길은 없으니 덜 된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탄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청산별곡]은 애처로운 노래만은 아니다. 김희보 님의 말처럼 이 애달픈 사연에는 해학이 있고 우수의 일면에는 낙천적이고 명랑한 기조가 있어서 실로 유연한 정조가 감도는 그런 노래다. 마치 아리랑을 슬프게 부르면 두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슬픈 노래가 되지마는 힘을 넣어 부르면 봄날 소풍 길에 나선 것 같이 신바람이 나는 그런 노래가 되는 것처럼.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희열에 차 있는 사람이나 슬픔에 우는 사람,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 청산이 아닐까. 


 무의식 속에서 한세월 잊혀져 있다가 그 어느 날 하루 의식세계로 조용히 떠오른는 하나의 소원, 그것이 바로 우리의 [청산별곡]인 것이다.


 꿈속에서 맞았던 새해 무인년, 또 울며 웃으며 묵은해를 보낸다. 잘 가거라. (199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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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교민사회 수필문학의 현주소

 


 이 글은 세 번째 수필집 [청산아 왜 말이 없느냐]를 위한 출판기념회가 토론토 한인천주교성당 강당에서 열렸을 때 한 답사 내용이다.


 얼마 전 한국에 있는 어느 수필가가 [한국 수필 평론]이라는 책을 한 권 보내왔습니다. 그 책의 맨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수필이 어떤 문학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는 말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정의다. 수필은 결코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 한 장을 올려도 앞뒤 순서가 있는 법인데 어찌 문학이 붓 가는 대로만 쓸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붓 가는 대로 쓴 것처럼 자연스러운 글이 바로 수필이라는 것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수필이라는 이름을 붙인 글을 써서 남 앞에 내놓은 지가 꼭 12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이번에 나온 책까지 합하면 수필집이 모두 4권, 수필의 낱개 숫자로는 모두 240~250편이 됩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 수필계의 관심거리요 동시에 걱정거리 하나는 수필이 문학의 맨 뒷자리 내지 배 다른 형제 취급을 받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들은 기가 죽어서 문학적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시나 소설에 비해서 수필가들은 수준이 떨어지고 수필 내지 수필작가가 받는 대접이랄까 인정도 극히 적다는 말입니다.

예로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수필 분야도 있는 신문사는 거의 없습니다. 시, 소설, 동화, 동시, 희곡, 비평 등 여러 분야가 있지마는 수필은 없습니다. 시나 소설에 비교해서 별 볼일 없다는 말이지요. 일본이나 중국 같은 데서는 수필이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한국보다 몇 배 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수필이 푸대접 받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선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서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작가가 쏟는 정성과 노력이 비교적 적은데다가 수필에 대한 평론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수필가들이 나같이 문학적 수업을 전연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수필가 자신도 수필을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너무 빨리 자기 작품에 만족 내지 자기도취를 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등단이 되는 것도 수필은 시보다 훨씬 쉽고 등단 기간이 짧습니다. 예로 수필 전문지 대부분이 수필등단 과정은 1회 추천 제도입니다.


 수필이 양적으로 너무 많이 생산되는 것도 수필 내지 수필가에 대해서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요새 한국에서는 누구나 수필을 씁니다. 수필이 선비문학이니 세제여적이니 하는 엘리트 문학 정신이니 하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요사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수필 홍수시대, 수필집 안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코미디언, 배우, 가수, 국회의원, 아나운서, 교수, 스님, 운동선수, 깡패, 흉악범, 넘편한테 얻어맞고 일생을 보낸 여자, 수많은 남자를 농락한 꽃뱀, 유부녀를 농락하고 나서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는 제비족, 10살 아래 남자하고 사는 50대의 자유부인, 이대로 가다가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흉악범, 모두가 수필집을 낼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수필집 저자들의 삶이 기구하면 기구할수록, 괴상망칙하면 망칙할수록 더 좋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수필집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 질은 점점 더 떨어지고, 질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수필가가 문학권에서 받는 천대랄까 설움은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 한국에 비하면 우리 한인 동포 사회에서 수필에 대한 대접은 무척 좋습니다. 즉 정서의 황무지인 이 북미대륙의 동포 사회에서는 수필이 동포 정서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대접을 받고, 상상 이외로 많은 독자들이 수필이나 시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 기사는 우리 해외 동포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질 못합니다. 그러나 시나 수필 같은 문예란은 노래방 다음 가는 정서의 단비를 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부산물의 하나는 예술의 대중화입니다. 이제는 시인만 시를 쓰는 세상이 아닙니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화가만이 미술전시회를 여는 세상이 아닙니다. 홀아비 앙상블, 가족 음악회, 장로 합창단, 여느 여고 몇회 졸업생 수필집, 가족 수필집, 주부 미술 전시회 등 제 신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예술 표현의 자유천지가 왔습니다. (199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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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창의성과 성격(상)

 

 창의성과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의성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해야겠다.


 우선 창의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의견을 가장 많이 내놓는 사람이 일등이 된다. "만일 이 세상에 밤이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생각나는대로 모두 적으시오."


 독자들은 위와 같은 질문은 우리가 자주 쓰는 전통적 지능검사 문항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질문에서는 소위 '정답' 이란 것이 없다. "전등회사가 망할 것이다" 라는 것도 대답이 될 수 있고 "유치원 수가 격감할 것이다" 라는 것도(성생활 감소 -> 출산율 감소 -> 신생아들 수 격감 -> 유치원 수 감소) 정답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독자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전통적인 지능을 재는 검사에서는 정답이 있는, 소위 수렴적인 지식을 주로 측정하고, 창의성을 재는 검사에서는 정답이란 것이 없는, 소위 확산적인 지식을 주로 측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잘 아는 지능이란 개념과 창의성이란 개념은 서로 비슷한 데가 있지마는 서로 다른 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의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보자. 말하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창의성'이라고 했을 때는 다음 요소가 포함된다.


 첫째, 어떤 철학적, 자연 과학적, 사회 과학적, 예술적 문제를 오리지널하고 혁신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새로운 방법으로 해결할수 있는 능력.


 둘째, 해결한 결과가 사회적으로 건설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새롭고, 혁신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방법이라 해도 남의 집 물건을 훔치는 것은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건설적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베토벤이 내놓은 음악적 산물은 사회적으로 건설적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셋째,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스위치만 누르면 남자가 여자로 변하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는 생각은 어떻게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성이 없으면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창의성과 성격특성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자들이 무슨 근거로 창의성에 대해서 말하는지를 말해야겠다. 심리학자들이 창의성에 대해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 창의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만천하에 보여준 사람들, 이를테면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나, 진화론을 창시한 다윈, 정신의학자 프로이트, 음악가 베토벤 같은 사람들이 창의력이 높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성격특성을 살펴보고 일반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이것이 곧 창의성이 높은 사람들의 성격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초등학교나 중, 고,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아직 창의성을 만천하에 보여줄 기회가 없었고, 지금 창의성이 막 피어나는 단계, 다시 말하면, 창의성을 "준비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창의성 검사를 실시해서 그 결과를 토대로, 즉 검사로 측정한 창의성이 높고 낮은 사람들의 성격특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창의성이 높은 사람 성격이 어떻다고 몇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창의성이란 실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어떤 성격특성은 사람 A에게는 나타나지만 B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B에게는 나타나지만 A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로 연구자들 사이에 서로 상반되는 결과 보고가 너무 많아서 실로 어느것을 믿어야 할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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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8
적응 탄력성이 주는 의미

 

 아빠는 술 중독자요 마약중독자, 엄마는 상습도박꾼, 형은 청소년 범죄자, 삼촌은 백수건달. 이처럼 풍비박산이 된 집 안에서 자라는 아이를 상상해보자. 이 아이가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사내아이인 경우 깡패나 술주정뱅이, 여자아이인 경우는 창녀나 좀도둑, 아니면 마약중독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도 많지마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즉, 이처럼 나쁜 환경에서 자란 어린이들 가운데는 바위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끈질긴 풀포기처럼 온갖 역경을 딛고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영어로는 resilience, 우리말로는 적당한 말이 없어서 우선 적응 탄력성이라고 해둔다. 이 적응 탄력성 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생행로는 수학 공식 같은 궤도에 맞출 수 없는, 삶에는 박진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적응 탄력성이 높은 어린이들은 어떤 특성이 있는가?


 첫째, 적응 탄력성이 높은 어린이들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대인관계 기술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어떻게 해서 이 어린이들이 뛰어난 대인 감각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비교적 높은 지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탄력성이 높은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성격이 적극적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전망이 밝은 성격에 가족이나 낯선 사람들로부터 좋은 감정을 유발하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비록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대해도 그 상황을 보통 건설적이고 희망적으로 해석한다.


 둘째, 적응 탄력성이 높은 어린이들 주위에는 인생 초기에 자기에게 많은 시간과 배려를 아끼지 않고 끈끈한 정을 맺어온 보호자가 있다. 부모가 부모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할 때는 그들을 대신해서 보호해 주고 감싸주고 격려해주는 사람, 이를테면 외삼촌이나 외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직계 가족이나 친척의 도움이 없는 경우에는 좁게는 그 어린이가 살고 있는 동네, 넓게는 사회에서 그 어린이에게 온갖 정서적 지지와 관심을 베풀어준다.


 셋째, 적응 탄력성이 높은 어린이들은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인생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는 특성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 주위에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그들의 생활에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지연과 혈통으로 이어진 농경 사회에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집단주의 사회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혈통윤리가 우세한 반면 시민 윤리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우리도 이제는 너무 '우리 식구' '우리 집' '우리 동네'만 찾지 말고 좀 더 넓은 시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좋은 사회란 사회구성원들끼리 모두가 서로 보살펴 주고 격려해주는 사회가 아닌가.


 우리는 가끔 우리가 남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깜깜 잊어버리고 지날 때가 많다. 비록 소설 속 이야기지만 은촛대를 훔쳤다가 뜻밖의 관대한 행동을 베풀어준 신부의 행동에 감화를 입어 과거의 잘못된 인생행로를 바꾸게 된 장발쟌(Jean Valjean)은 이 적응 탄력성의 어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실의에 젖어있는 학생에게 무심코 던져준 한마디 격려의 말, 불우한 아동에게 보낸 몇 푼의 성금이 그들이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잊을 수 없는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응 탄력성 개념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된다.


 적응 탄력성 개념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 사회의 어른 구성원 모두가 자기 가족이 아닌 다른 집 어린이 하나를 맡아서 격려와 배려를 해준다면 20년 후 거리를 방황하고, 밤중에 남의 집 담을 뛰어넘고, 윤락행위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생 낙오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다.


 아무튼 물고기나 개구리, 혹은 참새 같은 동물세계에서는 남을 돕는 행동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진화발달상 맨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제 새끼 돌보는 것은 동물도 얼마든지 잘하는 일, 남을 돌보는 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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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7
부모와 자녀교육

 

 사람들이 모이면 가끔 자녀들 얘기로 꽃을 피운다. 뉘 집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다는 얘기부터 뉘 집 아이는 부모가 공부하라는 성화 한번 안 했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그 어려운 과를 쉽게 들어갔다는 것.


 그러나 그렇지 않은 얘기도 있다. 중학교 때까지는 모범생이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와서는 빌빌 기고 있다는 이야기며, 중, 고등학교까지는 모범생이던 아이가 대학에 오더니 게을러지고 행실도 나빠졌으니 애들은 커봐야 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아이들 얘기 끝에는 으레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원인규명이 시작되고 그 원인 규명이 시작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부모가 어떻다는 등 부모에 대한 평가도 아울러 따른다. 그러니 아이 얘기로 시작되어 부모에 대한 평으로 끝나는 것이다.


 아이들의 잘한 행동에는 으레 그 부모의 피나는 보살핌이 칭찬을 받고, 아이들의 잘못한 행동에는 부모의 무성의 내지 무지가 그 원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요컨대 "부모가 이런 이런 잘못을 저질렀으니 아이에게 저런 저런 일이 터질 수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 대단한 성의와 열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집을 뛰쳐나가고 부모 속을 썩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 부모가 잘못을 저질러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외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들의 영향 때문인 경우일 때가 더 많다. 인간 행동에서 직접적, 단수적 인과관계는 극히 드물다.


 아이들은 부모 영향도 받지마는 또래 영향도 받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 영향도 받고 좋아하는 가수나 탤런트 또는 운동선수 영향도 받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모의 영향이 차츰차츰 줄어 들면서 학교 안팎에서 만나는 친구들 영향이 늘고 영화나 소설, 신문이나 잡지 영향도 받는다. 아동에게 영향을 주는 이 무수한 요소 중에 우리 눈에 가장 쉽게 띄고 알기 쉬운 것이 부모의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걸핏하면 부모 행동을 아이 행동 원인의 전부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신문 배달을 한 두 소년 A와 B를 생각해보자. A는 순조롭게 고등학교를 마친 후 우리가 말하는 '모범 청년'이 되고 B는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건달'이 되었다 하자. 그러면 우리는 A는 그 부모가 어릴 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켜서 일찍부터 세상 물정을 알게 하여 오늘날의 성숙한 청년이 되었다 할 것이고, B는 그 부모가 어린놈을 신문 배달을 시켜서 너무 일찍부터 돈 맛을 알게 한 까닭에 오늘날 그 꼴이 되고 말았다고 할 것이다.


 꼭같이 신문 배달을 했는데 왜 한 아이는 모범 청년이 되고 또 한 아이는 건달로 됐는지 그 이유는 너무 복잡해서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일 것이다. 신문 배달이 과연 아이 행동의 원인이 되었는지는 규명하기가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설사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직접적 원인인지 아니면 간접적 원인이 되었는지를 밝혀내기는 더욱 더 힘들 것이다. 


 또, 신문 배달과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을 시간상의 흐름으로 보면 신문 배달과 공부를 게을리한 것을 시간상의 흐름으로 보면 신문 배달이 공부를 게을리한 것보다 먼저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즉, 공부에 흥미를 잃어서 그 결과로 신문배달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면 공부를 게을리한 것이 신문 배달의 원인이 된 것이다. 또한 신문 배달과 공부의 태만이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다만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일어난 현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사건의 원인을 찾아내려 할 때, 다시 말하면 "왜 그런 결과가 생겼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할 때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구별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것인가 남에게 일어난 것인가에 따라서도 그 원인의 소재를 다르게 생각한다. 나쁜 결과가 일어난 데 대한 원인을 규명할 때는 자기 자신에 일어난 결과는 외부적, 환경적인 요소로 돌리고, 남에게 일어난 나쁜 사건은 그 사람 특성, 예를 들면 "욕심이 지나쳐서" "성격이 칠칠맞지 못해서"와 같이 그 사람이 갖는 특성으로 돌리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보면 어떤 결과를 보고 왜 그것이 일어났을까 하는 원인을 규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뿐더러, 흔히 얼토당토 않는, 그야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식"의 잘못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길을 걷는 자식들 때문에 평생 징역을 언도받은 죄수처럼 활기를 잃어간다. 변호사도 없이 집행된 이 재판에서 언도를 내린 재판장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부모들인 것이다. (200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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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1
자기 계발

 

 나무나 골동품은 오래되어 나이가 먹을수록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나 꽃이나 사람들은 그렇질 않다. 꽃이 시들거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윤기가 빠지고 볼품이 흉해진다. 그래서일까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늙게 보이지 않으려고 많은 돈과 시산을 아끼지 않는다.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은 신라시대 때 성골(聖骨) 진골(眞骨) 귀족부터 오늘날 압구정동까지 내려오는 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욕심인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모를 젊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욕심은 물론, 자기 내부랄까 자기의 속도 젊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의 안팎이 모두 젊고 아름답고 넉넉한 자신을 꾸미고 싶은 욕심은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꾸민다는 의미에서 자기계발이라고 부를 수 있지 싶다. 이런 욕망이 전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인생의 자기계발을 언제 구상해야 하느냐에 대한 정해진 시간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이가 비교적 젊은 청춘시절에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욕심, 자기계발을 가장 크게 마음껏 구상해보고 싶은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대학생들이다. 대학은 바로 자기계발 내지 자기 실현을 계획하고 꿈꾸는 도장인 것이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가능성이 없는 젊음은 죽은 젊음이다. 젊음이 대학의 혼(魂)이라면 대학은 젊음의 육신(肉身)이라 할 수 있다.


 "청춘이 아름다워라"라고 외친 사람들을 보라. 청춘은 이미 그를 저 멀리 떠나버린 사람이 아닌가. 학교에 오는 학생들에게 청춘이 아름다운가 물어보면 긍정적인 대답은 극히 드물지 싶다. 하루라도 빨리 이 청춘을 벗어나서 기성세대로 뛰어들고 싶다는 대답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 지긋지긋한 이 청춘, 청춘이 아름다워요? 누가 그랬어요?" 하는 반응이 더 많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 청춘의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다. "내 아니면 네 죽기"식의 시험제도, 나이, 선후배로 짜여진 위계질서, 내 실력대로 살 수 없는 억울함, 생존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나친 경쟁, 그리고 어지러운 사회현실. 이 모두가 청춘의 아름다움, 자기계발의 꿈을 방해하는 요소인 것 같다.


 시험이건 무엇이건 간에 '실패'가 많은 사회에서 아름다운 일이 많을 수 없고, '성공'이 많은 사회에서 아름다움이 적을 수 없다. 더더구나 실패와 성공이 남과 비교하는 데서 결정된다는 것은 쓰라린 실패감을 부채질하고 이 실패감은 청춘의 아름다움은 물론, 결국에 가서 자기계발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어렸을 때는 피아노, 발레, 스케이팅, 미술 등을 배우다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 가서 이건 "입시에 필요 없다"고 집어치우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물론 피아노를 치고 발레를 해야 자기계발을 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 대학입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 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말로만 '자기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고 해놓고는 대학입시 때문에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은 옆에서 지켜보기에 참 애처로운 일이다.


 젊은이들이여, 가만 있을 것이가? 흙탕물 속에서 연꽃은 그 청초함을 드러낸다. 오늘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내 자신을 계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를 계획해보자.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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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남을 돕는 사람들

  

 올 봄에 사회복지학과 K교수와 어느 재단에서 약간의 연구비를 얻었다. 연구 내용은 이타심이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특성 연구였다. 이타심(利他心) 내지 이타적 행동이란 남에게 신경을 써주고 도와주려는 마음 상태나 행동을 말한다. 반대되는 말은 물론 이기적(利己的) 행동이다.


 이타적 행동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건강한가, 건강하지 못한가를 판가름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남에게 신경을 써주고 도와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는가.


 이 연구의 책임연구원의 한사람인 L씨는 "이타적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들인가?"를 알아보기로 했다. L씨는 이타적인 행동을 베풂으로써 M방송국의 [칭찬합시다]라는 프로그램에 방영된 사람들 300여 명 중에서 담당 PD들의 도움을 얻어 다시 60여 명으로 줄였다. 300명만 해도 남을 돕는데 있어서는 보통사람과는 비교도 안될텐데 그 중에서 또 60명이라니 영어로 말하면 그야말로 최고의 최고(the best of the best)를 뽑은 셈이다.


 이 60명의 직업을 살펴보면 이발사로부터 성직자, 미용사, 구두수선공, 교수, 환경미화원, 의사, 식당주인, 판.검사, 주부, 경찰관, 선원에 이르기까지 없는 직종이 없다. 어느 한 직종에서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온 경우도 없으려니와, 어느 한 지역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더더구나 없다. 제주도에서 울릉도, 전라도에서 강원도, 서울, 시골 각지 어디에서나 이타주의자들은 골고루 흩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경찰관 생활 10년째 접어드는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있다. 자기 살림을 꾸려가기도 빠듯한 박봉으로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자기 근무시간이 아닌 여가에는 불량 소년소녀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어느 양로원에 가서 돌볼 사람 없는 노인들의 저녁밥을 준비해드리는 일을 7년째 계속하고 있는 순경 아저씨다.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드문 사람이 아닌가!


 L씨는 이 60명의 이타주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최소 1시간 내지 2시간 가량의 개인적인 면담을 하기로 하고, 대학원 학생들에게 면접을 위한 훈련을 시켰다.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전국으로 흩어져서 미리 준비해둔 질문에 대한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기에 담아왔다. 실로 장장 7000분에 이르는 금쪽같이 귀한 자료임을 물론, 그것을 분석하는데도 몇 달이 걸리는 방대한 자료이다.


 나는 우연히 제주도로 울릉도로 뛰어다니며 면접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인 두 K양에게 이들 이타주의자들의 "겉으로 나타나는" 인상에 대해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두 K양이 들려주는 그들에 대한 인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처음에는 보통사람들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정도로 냉랭하고 형식적이다가도 이야기가 진전되어 상대방을 신뢰하고 나서부터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고 따뜻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감에 차있었고 항상 인생에 비전을 가지고 있는듯 보였다.


 둘째,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심한 심적 혹은 물질적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 세상에서 극히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해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 천재의 천재랄까 혁신아들 중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뛰어난 창의성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 중에는 어렸을 적에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도 없진 않지만, 그 반대로 부모의 이혼이나 사별, 부모의 술과 마약 중독, 뼈저린 가난 등 그야말로 불우한 환경에서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많다. 


 특히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그런 인물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사람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틈새를 뚫고 올라오는 잡초같이 끈질긴 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장래의 문제아가 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셋째,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렸을적에 어려움을 겪었던 바로 그 영역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예로, 신체불구로 고생을 했던 사람들은 신체 불구인을,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가난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말이다.


 넷째, 일반적으로 남을 도와주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형편이 부유하기보다는 앞에 예를 든 경찰관처럼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돕는 경우가 많다.


 나를 가장 슬프고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두 K양 중의 하나가 들려준 말이었다. 어떤 환경미화원을 면접하는데 그가 갑자기 울더라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가 남을 도운 아름다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전화를 하고 "네까짓게 뭔데 남을 돕느냐?"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남을 도와?" 하는 따위의 경멸과 질투가 섞인 말을 듣고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운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남을 도와주는데 온갖 정성과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착한 사람들의 행동을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괴테(Goethe)가 말했던가, 하늘에는 별이 있어 아름답고, 땅에는 꽃이 있어서 아름답고. 여기에다 나는 하나 더 달고 싶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사랑의 향기를 뿜어 이 세상을 그윽한 향기 속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타주의자들이 아닌가. (200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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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8
교민과 동포

 

 지난 12월에는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와 권사 선거가 있었다. 집사 책임을 3년 이상 맡았던 신도 중에서 교회의 지도자 격 일꾼이 될 장로 네 사람과 권사 세 사람을 뽑은 것이다. 선거가 있던 그 다음 주였던가, 새로 장로로 뽑힌 L 씨를 보고 "OO 장로님 안녕하십니까" 하는 농담조로 인사를 던졌더니 그 장로는 머뭇머뭇 하더니 계면쩍은 표정으로 "아직은 장로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피택장로'라고 불러야 한답니다"라고 친절하게 일러주는 게 아닌가.


 그럼 '피택'이란 무슨 말인가? '피선(被選)'과 의미가 같은 말로 한문에 기반을 둔 말일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갔지마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꽤 권위 있는 두 개의 국어사전을 열심히 뒤져도 '피택'이란 말은 눈에 뜨이질 않았다.


 몇 년 전에도 신문 부고(訃告)란에 자주 나오는 '소천'이란 말이 무슨 말인가 알아보려고 사전을 뒤졌으나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의 '소천'은 사전에 나와 있질 않아서 나 혼자서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내는" 의미겠지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피택'이나 '소천'의 경우에는 이젠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되어 이런 말을 만들어낸 사람보다는 사전에 넣지 못한 출판사를 나무라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어떤 단어가 사전에 들어가는지의 기준을 모르며 사전을 펴낸 출판사부터 나무라는 것은 그다지 공평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였다. 하루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교포' 내지 '교민'이라는 말이 "임시로 붙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다소 서글픈 뜻이 담겨있는 말이니 '동포'라는 말로 바꾸어 써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글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는 '교포'와 '교민'을 버리고 '동포'를 따르리라 마음을 먹고 내 수필집 [청산아 왜 말이 없느냐]의 출판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이 사실을 '엄숙히' 선포했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옥편(玉篇)과 우리말 사전을 뒤져 보니 옥편에는 '교포'의 '교(僑)"는 '우거할 교' '나그네 교'라고 적혀있고, 우리말 사전에는 '교포'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동포," '교민'은 "외국에 살고 있는 겨레"로, '동포'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자매라는 뜻의 '한겨레' 내지 '같은 민족'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동포'는 '교민'에 비해서 한핏줄, 한민족임을 강조하는, 그 기개에 있어서 좀 더 장엄하고 끈끈한 정이 어려 있다고 볼 수 있고, '교민'은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겨레"이니 '나그네'나 '방랑자'의 냄새를 풍기는 그런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30년을 넘게 써 온 이 '교민'이라는 정든 말을 하루아침에 말의 근원을 따져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구태여 따진다면 그 본래의 의미와는 별 관계가 없이 쓰여 지고 있는 말이 어디 한두 개인가. '화장실(化粧室)'이 그렇고 요즘에 와서 부쩍 흔해진 '사모님'이란 말이 그렇고 뒷골목에 있는 '철학 연구소'도 본래의 의미와는 별 상관없이 쓰고 있지 않은가.


 '교민'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포라고 하는데 구태여 나 혼자 '교민'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또한 '동포'와 맺은 새 인연을 1년도 채 못 넘기고 다시 '교민'으로 돌아가는 것도 의리를 져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잠자코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어딘지 개운치 않은 그 무엇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포면 어떻고 교민이면 어떠랴. 그 말이 그 말이니 제 마음에 드는 말을 쓰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을 꼬치꼬치 따지려면 이것 말고도 우리말이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많다. 예로 4천만 겨레가 다 아는 동요 [고향의 봄]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 이 아니라 "내가 살던 고향은. "으로 해야 한다고 이 노래의 노랫말을 쓴 이원수 선생은 말했다. 


 이러다 보면 '동포' 때문에 '화장실', '철학 연구소', '환경미화원', '벼룩시장' 같은 말도 다시 그 뜻을 검토해봐야 할 것 같다. (199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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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신동(神童)과 늦둥이

 

 미국 지식층 사람들이 즐겨 읽는 [타임(Time)]이라는 잡지에서 현재 살아있는 세계 신동(神童)에 관한 특집을 낸 적이 있다. 소개된 사람들은 주로 예체능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신동들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을까?" "이게 정말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일찍부터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 신동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특집에 적힌 몇 가지 사실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첫째, 신동들을 독점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는 것.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후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도 찬란한 재능의 빛을 뿜고 있는 신동들이 많다는 말이다. 둘째, 이들 신동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 보여준 그 놀라운 능력을 계속 보여주는 '성숙한 신동'은 드물다는 것이다. "일찍 핀 꽃이 먼저 시든다"는 말이 있듯이 신동들 대부분이 정상적인 환경에서 꾸준하게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한 '늦둥이'들보다 결국에 가서는 더 나을 것도 없다는 말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 거북이가 결국에 가서는 토끼를 따라잡고 만다는 말이다.


 왜 어려서 이름을 날리던 신동들이 자라면서 일찍 시들어지고 마는가? 아직 심리학은 이에 만족할만한 대답은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 부분적 이유밖에 되질 않겠지만 부모 형제나 이웃, 더 넓게는 사회 전체가 이들을 보는 시선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신동들이 커서는 뒤쫓아 오는 대기만성형 늦둥이들에게 따라잡힌다는 것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늦둥이 얘기가 나온 김에 퇴계(退溪) 이황 얘기를 해야겠다. 단군 이래 가장 큰 학자로 불리는 퇴계(退溪)는 과거(科擧)에 세 번이나 떨어졌다 한다. 4수 만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것은 그가 27살, 문과(文科) 시험에 합격한 것은 33살 때였다. 퇴계에 비해 율곡(栗谷) 이이(13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던가?)나 고봉(高峰) 기대승 같은 사람들은 천재성이 번뜩이는 '토끼반' 출신들이다. 


 율곡이 22살 때 경북 안동 도산에 있는 거유 퇴계를 방문하여 이틀을 자고 갔다. 당시 58살의 대학자였던 퇴계는 22살 청년 율곡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율곡의 학문에 관한 질문에 성실한 자세로 설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율곡이 집으로 돌아갈 때 퇴계는 학풍상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이 젊은 학자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고재희 님의 힘을 빌려 옮겨 적어보자.

 

 

병도 깊고 문도 닫아 봄 못 봤는데
그대 와서 심신 뚫어 꿈 깨듯 했네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아님을 알고
지난날이 부끄러워 몸둘 바 없네
속이 찬 곡식 숲엔 잡초가 없고
갈고 닦은 새 거울엔 티가 없는 법
.
공부에 힘 쓰며 서로 친하세
 

 

 


 퇴계의 학자다운 풍모와 사람에 대한 공경심을 잘 느낄 수 있는 시조이다. 뒷날 퇴계는 "옛 성인들이 후배를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율곡이야말로 두려운 재주를 가진 선비다"며 율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400년 전 퇴계같이 꾸준히 노력하는 거북이 특성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대가요, 알아주는 권위요, 국제적이요, 최정상급이다. 대가, 알아주는 권위, 국제적, 최정상급이라는 별명이 이렇게 쉽게 붙여지는 풍토에서는 '늙은 신동'은 드물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은 계속 노력은 하지 않으며 이름 쫓기에 바쁘고 공명심과 자만심만 큰 사람이 되기 쉽고, 아동을 어른들의 허영심을 충족하는 도구로 이용당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신동은 "저 사람이 저래도 옛날에는. " 하는 소리나 듣는 평범한 성인이 되고 마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신동들의 어머니 아버지와 그리고 늦둥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여,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퇴계와 같은 꾸준한 자아계발의 길, 노력의 길인 것을 잊지 말자. (200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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