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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매(南冥梅)를 그리워함
chojungdae

 

 


 
남명매(南冥梅)를 그리워함

 

 

 

봄 산 어디엔들 아름다운 꽃 없겠는가,
(春山底處無芳草))
내가 여기에 집을 지은 이유는
다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운 걸 사랑해서라네,
(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돌아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白手歸來何物食)
은하수 십리 맑은 물 먹고도 남겠네.
(銀河十里喫有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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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제(山天齊)를 짓고 지은 한시다.


지리산의 상봉 천왕산(天王山)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한 산천제(문화제 사적 제 305호)는 말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힘을 쏟았던 남명 학문의 요람으로서 텅 빈 앞뜰에는 4백 년 동안 그의 높은 기개를 꽃피워 온 고목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가 그 유명한 ‘남명매(南冥梅)’로 남명 선생 생전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닮은 매화꽃을 이른 봄이면 어김없이 고목의 목피를 뚫고 피워 올리고 있다.


내가 유독 이 꽃을 그리워함은 남명 선생이 유독 우리 창녕 조가(昌寧 曺家)) 집안의 윗대 어르신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진정한 선비 정신을 실천한 그분의 삶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산 동갑내기 퇴계가 봄 동산의 ‘꽃향기’ 라면 남명은 ‘설산(雪山) 같은 기개(氣槪)’라고들 평가하는 것을 보아도 같은 시대를 살면서 쌍벽을 이룬 두 분은 너무나 다르다.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지만 남명은 당시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성리학을 이론화하는 경향에 찬성하지 않고, 경(敬)과 의(義)에 바탕을 둔 실천철학을 표방했고 끊임없이 실천하면서 살았다.


퇴계가 벼슬에 나아가 왕권에 충성한 데 반해 선생은 사림(士林)에 묻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백성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건 상소로 국정을 비판하면서 실천유학을 고취하였으니 그 취향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이곳 산천제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실천하는 선비정신의 산 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지금이 어느 때라고 고리타분한 전 시대적인 인간상인 선비정신이냐고 웃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정신이 앞장서야 할 시대를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한마디로 올곧은 선비정신의 기개를 마음 가운데 세우고 반듯한 자세로 살아가는 지식인이 그리운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문학이라는 허울을 쓰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허망한 이름 얻기에 정신을 잃은 소인배들도 있고, 심지어 돈으로 당치도 않는 명예를 만들어 팔려는 풍조까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선비란 모름지기 매사를 삼가고 조심하되, 옳은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 정의의 편에 서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듯해야 할 본연의 문학정신이 지조없이 흥청대는 꼴을 보면서 새삼 ‘조선 선비정신의 전형’인 남명 선생을 닮은 남명매(南冥梅)가 그리워지는 봄이다.

201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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