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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호의 개성
leed2017

  

▲송강 정철과 기생 진옥 

 

 

 서양 예술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조선 화단(?壇)이나 문단(文壇)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 중에는 남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성격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이들 성격적 특성이란 예술이나 문학에서 대성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기 보다는 그들 중 몇몇 소수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니 이런 성격 특성이 예술가들의 보편적 특성이라든가 대성에 반드시 필요한 특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조선 화단에서는 호생관(毫生館) 최북, 오원(吾園) 장승업, 문학에서 고산(孤山) 윤선도, <홍길동전> 소설을 쓴 교산(蛟山) 허균 같은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독특한 개성을 가졌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지 싶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어찌 위의 네사람 뿐이겠는가.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조선 중기의 문호 송강(松江) 정철이다.


 송강은 어릴 때 그의 누나가 인종의 귀인(貴人)이었고, 둘째 누나 역시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궁중에 수시로 드나즐며 경원대군(후일 명종)의 소꿉놀이 친구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일찍이 고봉(高峰) 기대승, 하서(河西) 김인후 같은 호남의 거유(巨儒)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커서는 고산(孤山) 윤선도, 노계(蘆溪)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삼대 시조 작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대성하였다.
 단가에 고산이라면 장가에는 송강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고문 시간에 힘들게 배웠던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가사를 위시하여 장진주사, 훈민가 같은 단가 등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성질이 강직한데다가 꼬장꼬장하여 융통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남과 타협할 줄 모르는, 어떻게 보면 주위 사람들이 쉽사리 호감을 가지기 어려운 타입의 성격이었다. 강직한데다가 시비 가리기를 좋아하며 임금 앞에서도 상대방을 너무 몰아세우는 버릇 때문에 그에게는 항상 적이 많았다. 


 이렇게 까슬까슬하고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는 시인이나 예술가, 문장가는 몰라도 정치가가 될 사람은 못 된다. 그의 문장은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이 성큼성큼 떼어 놓는 큰 걸음, 쾌속선을 타고 호수 위를 날아가듯 내빼는 시원함과 호쾌함이 있다.


 송강은 술과 여자를 너무 좋아했다. 동갑내기 친구 율곡(栗谷)은 여러 번 이에 대해서 충고했으며, 임금은 그를 호색과 과음으로 귀양까지 보낸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특이한 개성을 가진 시인이었던가는 다음 시조에서 잘 나타난다. 평안도 강계에 갔을 때 진옥이라는 기생과 술자리에 앉은 적이 있는데, 그때 두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주고 받았다.

 

 

송강 :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 보아하니 진옥(眞玉)이 분명하다
       내게 살 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진옥 :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鐵)만 여겼더니
        이제 보아하니 정철(正鐵)이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번옥이니 섭철이니 하는 말은 가짜 옥, 가짜 철이란 말이다. 진옥의 시에 송강이 답한 것이라 하나 일개 미천한 기녀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먼저 이런 시를 써보냈겠는가. 그래서 송강을 먼저 적었다. 살송곳 있다고 자랑하는 송강이나 골풀무 있다고 녹여 보겠다는 진옥이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당대의 명신(名臣)이요 지체 높은 어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육욕(肉慾)이 끓어오르는 메시지를 일개 기녀와 주고받았다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호방한 기상, 그야말로 파격적인 용기다. 시조를 주고받는 순간만큼은 우의정 정송강, 문필가 정송강이 아니요 그냥 사나이 정철이다.


 젊었을 때 자기를 진사(進士)라고 소개한 정철은 강원도 고성에 가서 그 고을 순수와 술을 질탕하게 마시고 어느 기생과 잠자리에 든 적이 있다. 이튿날, 떠나기 전 송강은 그 기녀에게 "내 10년 후면 감사가 되어 그대를 찾아오리다."고 호언을 했다. 진사밖에 안되는 자가 터무니없이 높은 벼슬자리를 마구 끌어대는 송강이 얄미운 생각이 든 기녀는, "귀한 감사보다는 얻기 쉬운 찰방(察訪)이 어때요?" 하고 쏴붙였다. 네까짓 게 감사는 무슨 감사냐는 말이다.


 10년이 지나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그곳을 들렀더니, 그 기녀가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10년 세월에 기녀의 귀밑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도 많이 망가진 것을 본 송강은 세월 무상의 감회에 젖어 시 한 수를 읊었다.

 


십 년 전의 약속이 감사냐 찰방이었는데
비록 내 말이 맞기는 했으나
모두가 귀밑털이 반백으로 세었네

 


 이런 시를 짓는 순간이 바로 풍류객 송강이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시심(時心)이 넘쳐 흘러나오는 순간, 시인 정송강이 되는 순간이다. 큰 예술가에게는 자기 주위를 살피지 않는 이 정도의 충동이랄까 집념이 있어야 한다.


 동인(東人)들은 그의 숙적이었다. 그는 수많은 동인들을 죽였으며 동인들도 그를 증오했다. 동인 때문에 송강은 벼슬에서 네 번인가 탄핵을 받아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 정치가였다. 윤고산처럼 유유자적, 자연을 벗삼아 노래 부르기보다는 벼슬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한(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문학을 아첨 문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명예욕은 그가 지은 가사 곳곳에 나타난다. 모략, 중상, 음모가 판을 치는 당파싸움 소용돌이 속에 어떻게 그가 연꽃같이 청순하고 지고한 시심(詩心)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 송강 자신도 모를 것이다.


 그가 죽고 그의 제자 석주(石洲) 권필은 송강의 묘를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쓸쓸한 산에는 낙엽만 우수수 떨어지니/멋진 풍류도 적막하기만 하다/
술 한 잔 나눌 수 없는 이 슬픔/옛적의 노랫소리 들리는 듯 하구나
(空山落木雨蕭蕭……昔年歌舞卽今朝)

 

 

 송강은 가고 그의 무덤 앞에 절하던 제자 권필도 갔다. 이제 동인(東人)도 없고 서인도 없는 세상, 그러나 그의 문학은 반천년이 지난 오늘도 그 향기는 변함이 없다.(20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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