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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정-과정의 미학(3)
yeodongwon

 

(지난 호에 이어)
 그때 중학생인 내 책상머리엔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짓거리지만, 그 계명 같은 표어는 아직도 한국의 아이들에게는 유효하다.


이는 목표달성을 위한 마음다짐을 다그치는 일종의 채찍이다. 목표만 보란 뜻이다. 과정은 무시되고 숨어버린다. 목표만이 위대한 선이 되고 있다. 민주의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위험한 수작이다. 개인의 자연스런 발육과정의 억제는 하늘이 준 자연법에 반하는 일종의 범죄적 행위이다.


99점 낙제자와 100점 합격자와의 1점 차이에 의한 삶의 형태가 땅과 하늘만큼의 차이가 돼버리니 시험에 모든 것을 건다.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시험 외에 아무짝에도 못쓸 교과서 천재가 된다. 달달 외워버린다. 소설책, 시집 한 권 볼 짬이 없다. 하늘의 별을 볼 여유는 더더욱 없다. 단짝이 경쟁의 적이 되고, 시험벌레, 시험기계가 된다. 결과가 되는 이치의 근본을 따질 겨를이 없다. 근본이 빠진 결과만을 간추린 시험용 참고서에 의해 주입된 지식이 머리에 저장된다.


인간성은 경쟁심에 의해 탱탱하게 긴장되고, 정서는 메마르고, 신경은 칼날처럼 날이 서 작은 일에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밖으로 향한 열린 마음 쓰기에 서툴고,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진다.


보이는 것만을 암기하듯 주입하며, 주어진 외의 것은 몰라버린다. 남이 해 논 껍데기만을 달달 외우는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언제 자기 것을 창조해 내겠는가? 모방의 천재는 될지언정 창조의 예술은 탄생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곳 캐나다의 교육은 어떤가 한번 훑어보자. 달달 외우는 앵무새 교육이 아닌 창의와 자발의 교육, 치사한 점수경쟁이 아니라 능력을 개발하는 교육, 질서와 줄서기와 남을 인정해 주는 교육, 목적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 이런 것들이 오늘의 서양사회를 지탱하는 힘으로 보인다.


입시 없는 대학의 문, 중 고등학교 전 과정의 결과로 대신하는 입학, 성적뿐 아니라 모든 대외 활동까지 참작되는 제도, 왜 한국에서는 시행되지 못할까? 아마도 치맛바람의 촌지와 정실이 춤을 추고, 경쟁이 칼날 같은 사회에서는 되려 부정만을 조성하는 우려 때문일 게다. 공정과 질서가 살아있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제도일 것이다. 내가 먼저, 내가 우선이라는 이기심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안 된다.


줄을 서되 참으며 억지로 서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듯 차례를 기다리는 느긋한 여유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목적달성만을 위한 안달로는 안 된다. 과정의 가치, 그 순서의 가치가 우선이 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리라.


포항공대에 가면 그 교정에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의 흉상이 나란히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 흉상 없는 받침대만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유는 제 4의 천재 노벨상 과학자의 탄생을 기대하는 뜻에서다.


나는 포항공대 당국에 건의한다. 그런 인물의 탄생을 전시용이 아니라 진심으로 원한다면 오늘 당장 그 흉상들과 제 4의 빈 받침대를 철거하라고.


학생들이 늘 오가며 그 흉상들을 바라보면서 노벨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공부하고 있다고 가상해보라. 목표지향적 부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린 가슴으로 어떻게 감당해 낼까 불상해져서 하는 말이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지식이 악용되고 있는가? 사회를 위해, 그 자신을 위해 없어야 할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종교 쪽에서, 법조계에서, 정치 쪽에서, 의학 쪽에서, 심지어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문학 쪽에서 없어야 할 악의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악의 지식은 목적달성식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나는 보는 것이다.


이기심을 부추기는 교육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자기 배 채우기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스스로 개발되지 못한 억지 주입식 교육으로는 노벨상은 꿈일 뿐이다. 


그 무서운 지옥 문을 통과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열중쉬어 되어버리는 것과는 반대로 지옥 문을 모르고 들어온 이곳의 대학생들은 그날부터 진짜 지옥 같은 공부가 시작 되는데 언제든지 공부가 하기 싫어지면 미련 없이 책을 덮고 나가버린다. 


계속 공부가 좋아서 하는 학생만이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그러다 보니 노벨상도 덤으로 받고, 그렇다고 쉬는 것이 아니라 공부(연구)는 계속된다. 즉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다 보니 석사가, 박사가, 노벨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던 지랄도 멍석 깔면 못한다.”는 목적의 역기능을 일찍이 알고 속담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과정의 중요성을 파악한 우리네들이 왜 목표 지향적 가치관의 사회를 만들었을까?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마 지독한 가난과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떤 수준(돈이나 권력)에 올라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의지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 그 신분상승의 기회가 한꺼번에 주어지는 “과거급제(科擧及第)”라는 매력의 제도, 그래서 모든 삶의 과정은 “과거(科擧)”라는 목표에 의해 무시되고, 급제와 낙방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로 생활수준을 벌려놓는다.


그 연속선상에서 “고등고시”를 보면 3수, 4수, 어떤 이는 평생을 달라붙는다. 요행으로 합격하는 날 인생은 그날로 달라진다. 그 지옥의 긴 동굴을 빠져 나오는 동안의 고통을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 받으려는 심리는 그의 일생을 좌우할 것이고, 그것이 사회에 악으로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판.검사가 악(돈, 명예)의 유혹에 약한 이유가 우연이 아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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