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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기
yeodongwon

 

 밴쿠버 겨울 하늘에 만국기가 펄럭이며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내가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는 운동회가 있었고, 그 운동회에도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을 하늘에 만국기가 펄럭이었습니다. 올림픽에 만국기가 펄럭이어야 하듯 운동회는 만국기가 펄럭이어야 분위기를 냅니다.


 설날에 색동옷 입듯 그날엔 오만 국기가 왜 휘날려야만 하는지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해본 일이 없었는데 이번 밴쿠버 올림픽을 보면서 '아! 저 만국기' 그랬었구나! 가히 60년 만의 깨달음입니다.


 나라마다 깃발들이 있습니다. 그 자존심의 상징들, 그 어디에서나 당당하고 싶은 애국의 깃발들이 함께 모여 나란히 손에 손잡고 춤을 추듯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참으로 지구촌의 축제, 저 정신을 닮고 싶은 바로 그 운동회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내 깃발이 나의 자존심이듯 남의 깃발의 자존심을 동렬로 보듬어 안아주고 있는 열린 마음들입니다. 하나의 깃발만이 고집이 되면 정복자의 깃발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 정복자의 깃발 앞엔 남의 깃발은 시기, 미움, 악의 대상으로 보여 짓밟아 버립니다.


 오늘도 이쪽에선 박수 함성의 올림픽 한마당이 펼쳐지고 있는데 지구촌 저쪽에선 피바다 전쟁이 한창입니다. 전쟁과 평화, 그 상극의 숙제가 같은 지구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들에 의해 꼬여지고 있는 이 모순, 어쩌면 됩니까?


 보십시오! 저쪽의 전쟁에선 피와 눈물과 시체로 쌓아 올린 고지에 정복자의 깃발 하나만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펄럭이는데, 이쪽 올림픽에선 오대양 육대주를 손에 손잡고 돌아온 성화를 높이 밝혀놓고 땀과 웃음과 박수 함성이 울려 퍼지며 만국기가 나부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전쟁은 내 깃발만이 정의라 상대(다름이)가 악으로 보이고, 평화는 상대(다름이)가 형제로 보여 만국기가 정의됩니다. 미움은 다름이 시기로 보이고 사랑은 다름을 설렘으로 봅니다.


 올림픽에서의 시상대에서 승자(금)의 깃발에 모두가 축하의 박수를 보냄은 모든 우열(優劣) 모든 다름을 우주 질서의 가닥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희고 검음, 높고 낮음, 느리고 빠름의 그 다름의 차이를 우주적 질서로 받아들이는 아량의 화합, 이것이 올림픽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10,000M 스피드 경기에서 금(金), 은(銀), 동(銅) 선수들이 시상대에 올랐을 때의 장면입니다. 시상식이 끝나자 갑자기 양쪽의 은, 동메달 선수 둘이서 가운데 금메달 선수를 무등을 태우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금, 은, 동 그 색깔의 우열이 시기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축하의 대상으로 함께 함빡 웃고 있습니다. 나는 감격으로 올림픽 만국기 정신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민족주의가 국수주의적 감정으로 대립하면 피눈물이 소용돌이치는 전쟁이 되지만 너 있으니 나 있는 이치로 겨루면 땀과 웃음과 박수가 어울리는 올림픽이 됩니다. 내 용모, 네 용모가 다르듯 내 사상 이념이 있다면 남도 사상 이념이 있을 터, 같을 수 없는 이 절대 이치가 왜 겉돌아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국적 정복의 깃발, 내 의지만이 정의라는 그 아집의 깃발의 발톱이 언제쯤이면 이 지구촌에서 사라질까요? 내 깃발이 정의이면 남의 깃발도 정의가 되는 올림픽 정신으로 보면 쉽게 풀리는 이 이치가 왜 외면을 당해야 하는 걸까요?


 너 있으니 나 있는 상생의 이치로 보면 손잡을 상대이지 깨부술 상대가 절대 아닌데, 왜 자꾸 나의 색깔로 남의 색깔로 남의 색깔에 덧칠하려고 덤비는가요?


 팔도 사투리가 있어 드라마 보기가 더 감칠맛이 있듯, 네 생각 내 생각 따로 하면 어때서 왜 자꾸 한가지로 획일하려 드나요? 양귀비가 예쁘다고 죄다 양귀비로 성형해 버리면 그래 살 맛이 날까요? 그럴까요? 문화의 다양성, 이것이 지구촌의 활력이고 생명인데?   - 2010년 2월 밴쿠버 겨울 올림픽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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