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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예찬(小心禮讚)
yeodongwon

 
 나는 내가 소심하고, 겁 많고, 배포 적음을 늘 속상해 하며 살았었다. 나는 돈 놓고 돈 먹기식 놀음을 싫어했고, 큰일을 저질러 주위를 놀라게 해본 기억이 없으며, 늘 분수를 따져 고급스러움을 거북해 하며 피했고, 음식 맛은 값에 있지 않고 '시장이 반찬'이라며 비싼 음식을 못 사먹는 궁상기 흐르는 매력 0점, 소문난 짠돌이로 유명(?)하다. 그런데  60 넘어 산 지금에 와보니 소심이 자랑일 것까지는 못 돼도 결코 속상해 할 일은 아니구나! 여겨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간 큰 사내를 대장부라 하고, 배포 큰 사내를 사내답다 선호한다. 근육질 좋은 사내 혼자 열 명 좋게 돌려차기로 해치우는 터프가이(tough guy)가 영화 TV에서 영웅 대접받고, 신출귀몰 탈옥수가 의적으로 박수갈채를 받는다. 정치는 9단 만의 무대인 듯 3김, 아니 4김(북한 포함)이 반도 정치 40년을 보스로 주무르는 것이 가능한 한, 아니 아직도 진행형인 큰 것이 선호되는 사회다.


 교회는 세웠다 하면 세계 제일이어야 목회(牧會) 성공으로 여기고, 대통령들은 천억 단위로 사과 상자로 담아 해먹는 것을 관례라 큰소리다. 배포가 남산만 하고 배짱이 하늘만큼 두둑하다.


 촌지가 부끄러움이고, 새치기가 실례이고, 불로소득이 거북함이고, 빚을 겁내고, 높은 자리를 부담으로 여기는 여리고 소심한 착함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회면 얼마나 좋을까?


 적은 받음에 크게 감사하고 작은 거짓에 많이 부끄러워하고 작은 잘못에 크게 미안해하는 작은 심성의 사람들이 우대받는 사회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큰 것을 선호하는 우리식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니 쪼다 소리 듣기 딱 맞지만 본래의 우리의 심성은 가늘고 작은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선(線)의 미학이 한국미의 특성이라 배웠었다. 선(線)은 면적도 부피도 없는 그래서 가늘수록 본성에 접근한다. 가는 것은 보기에도 가련하다. 그래서 한국인의 특성인 한(恨)의 미학으로선 선이 제격이다. 그리고 선에는 색이 없다. 그래서 우리를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하는 것도 썩 어울린다. 


 궁궐, 무당, 기방, 신방에서는 그래도 색이 보였으나 일반 민가에서는 색 보기가 귀했다. 보릿고개 찌든 가난과 권력의 눌림에 의한 한(恨)은 백색과 선의 예술로 승화되어 구구절절 풀어낸다. 가락으로 춤사위로 옷섶에서 처마 끝에서 청자의 선에서 슬프디슬픈 한의 예술로 형상화 표출된다.


 그래서일까? 이제 살만해지자 과거 한풀이 삶이 지겨워 상대적 오기가 발동해서인지 크고 높고 화려하고 풍족함의 풍년가가 먼 이곳까지 들린다. 그래 지금은 우리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져 그 욕구충족이 가능해졌다 치자. 그러나 부풀린 풍선처럼 내용이 빈 과대포장으로는 알찬 미래는 없다.


 가지런히 보기 좋게 잘사는 나라를 보면 소심한 보통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인간 대접을 받는 모습이 부럽고, 부정을 부끄러워하며 검소함이 생활화된 사회가 특징이다. 담배꽁초를 홱 튕기듯 날리는 사나이다움의 건방이 아니라 작은 종이쪽지 하나를 봐도 안 줍고는 불안한 사람들이다.


 나는 도둑놈도 밉고 사기꾼도 밉지만, 더 미운 쪽은 깡패 집단이다. 그들은 간이 하늘만큼 부어있다. 죽고 사는 경계를 모르는 생명의 존엄을 모른다. 의리가 정의이고 보스는 하늘이다. 그들에겐 이성적 판단에 의한 사회정의는 웃기는 짓이다.


 우리의 정치풍토가 바로 이 깡패집단을 빼닮았다는 데 비극이 있다.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민주의식이 아니라 가신을 거느린 보스에 의한 정치, 그 보스들의 눈도장으로 정치가 요리되는 사회, 이런 정치에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사회정의는 기대할 수 없고, 추한 이기심의 감정이 정의의 이름을 빌려 포장되기 쉽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작은 마음이 하늘을 얻는다는 철학이 우리 사회에서는 왜 외면당해야 할까?


 “Be Ambitious!”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이 칠판 가득 힘차게 갈겨 쓴 영어 경구다. “야망을 가져라!” 젊은이들에게 이 얼마나 가슴 찡한 경구인가?


 또 있다. 졸업식 때의 교장 선생님의 훈시다. “세상엔 있어 해가 되는 인간, 있으나마나 한 인간, 그리고 있어야 할 인간이 있느니라. 너희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있어야 할 인간이 되어라!” 이 말 또한 어린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었다.


 그랬다. 야망과 일등주의, 이는 어린 우리에게 바이블이었고 분발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의 비극성을 감지하기에는 아직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었다.


 야망과 일등주의는 속살이 꽉 찬 자에게는 약진이라는 순기능의 불씨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과시라는 부정적 역기능이 사람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사회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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