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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있었던 지난날
ybkim

 

63년 전 일이다. 나는 충주성공회(Anglican Church) 마가(Mark) 신부님의 도움으로 서울 정동에 있는 대한성공회에 속한 니콜라 호스텔에서 기숙할 수 있었다.

남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는 니콜라 호스텔이며,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는 성모관(St. Mary's Hall)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기숙을 하게되면 큰 재정적 부담없이 적은 생활비로 공부하고 기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형편이 좋은 친구들은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며 편하게 생활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니콜라관에 기숙할 수 있는 조건은 성공회 교인이 되고, 주일 미사 때에는 주교나 신부님을 돕는 복사(Altar Server)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성공회의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영세(Baptism)와 견진(Confirmation)까지 받은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주일 미사 때는 복사를 주로 맡았다. 특히 미사 때 Bach /Gounod 그리고 Schubert's Ave Maria 를 Pipe Organist가 항상 연주하기 때문에 주교나 신부님의 강론보다도 어쩌면 음악을 듣는 미사 시간이 오히려 기다려지기도 했다.

 50여 명의 기숙사생들은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인천, 춘천 등에서 온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었다. 마침 나는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과 Roommate가 되어 클래식 음악에 대하여 듣고 배우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1959년 봄 군입대 후 나는 xx사단 최전방에서 1년 6개월을 보냈다.

 그곳에서 동료로 만난 친구 역시 성악을 공부하였던 학생이었는데, 저녁근무를 마치면 그가 종종 들려주었던 오페라 아리아의 당시 대학생들에게 유명했던 푸치니, 토스카 중에서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과 라보엠(La Boheme) 중에서 "그대의 찬손(Che Gelida Mannia)"을 불러주었으며 때로는 우리 가곡 보리밭과 선구자 등도 들려주곤 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Opera aria를 들을 때면 그때 그가 열정적으로 불러주었던 음악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리고 졸업 후 1964년 10월4일 서독파견 제2차 루르탄광 광부로 떠났다.

그곳에서 한달 쯤 지난 후 내가 살고 있는 작은 광산촌은 온통 크리스마스 준비에 분주한 듯 거리마다 가로등들이 크리스마스장식으로 반짝이며 때로는 Bach/ Gounod의 Ave Maria 와 Pietro Mascagni의 Cavalleria Rusticana intermezzo 그리고 Handel's Messiah 와 Largo(Ombra mai Fu)등이 들려오곤 했다.

그리고 작은 맥주집까지도 동전을 집어넣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들을 선택하여 듣곤 했다. 내가 주점에서 자주 듣던 클래식 음악은 타이스의 명상곡 (Massenet's Meditation from Thais)과 슈만의 트로이메라이(Schumann's Traumerei), 생상스의 백조(The Swan / Saint -Saens), 사라사데의 지고이네르바이젠(Sarasate's Zigeunerweisen), 쇼팽의 녹턴(Chopin's Nocturne) 그리고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 히브리노예들의 합창(Verdi's Chorus of The Hebrew Slaves )등이었다.

하루는 술집주인이 너는 왜 이곳에 오면 항상 클래식 음악만 듣느냐고 묻는다. 너의 나라에도 클래식 음악이 있느냐? 이런 질문까지 받았지만 나는 클래식 음악이 무척 좋아서 듣는다고만 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광산촌 너희 맥주집에서 언제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유럽의 각 나라에서 온 탄광 노동자들만이 함께 살고 있는 광산촌이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무척 당연하였다.

그러나 때로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든 질문은 너희 나라에도 ‘자전거’가 있는가? 이곳 탄광 노동자들이 누구나 매일 타고 다니는 것이 자전거였기 때문에 한국에도 자전거가 있는지 그들에게는 퍽 궁금했을 거라고. 더욱이 한국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런 질문을 할 때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이들에게 그처럼 보잘것 없는 나라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나 놀라게 했고 슬프게 했었다.

만약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오래 전부터 그들의 나라를 질주하고 있는 한국 차들을 수없이 보고 있을 터인데… 그리고 지금은 한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에 대하여 일본의 식민지였었으며,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작은 나라,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나를 너무나 슬프게 했었다.

언젠가는 한국인들도 잘사는 국민이 되어 절대로 무시나 외면받아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마음속으로 외치며, 통일된 한국 국민 모두가 잘살고 행복한 국민이 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했다.

내가 루르탄광에 도착하던 해, 1964년 12월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루르탄광 함본광산을 방문하고 여러분! 우리의 먼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반드시 만들어 놓읍시다. 그리고 간호사들과 광부들을 위해 준비된 연설문을 끝마치지 못한 채 그들과 함께 울어버렸던 그 장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20세기에 기적처럼 번영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인류역사에서 보듯이 훌륭한 국가지도자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희망과 비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위대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진실을 보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2001년 10월에 독일 광산촌을 다시 방문했다. 수많은 한국청년들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맺힌 석탄광산은 폐광되었고, 나의 기억 속에 있었던 광산촌의 모습은 사라졌다. 지난 57년 전에 경험했던 힘들고 어려웠던 삶의 한 장면을 다시 회상하면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었다.

이제 2020년은 인류에게 재앙으로 닥쳐온 "코로나19"로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음악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제 9번 합창.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그리고 비발디 사계 등을 감상하면서 지나간 63년을 회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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