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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캐나다군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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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 당시 배경

 

대한민국 5천년 역사 중 조선시대 이래 피해가 가장 크고 치열했던 전쟁을 꼽으라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6.25 전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외국침략에 의한 전쟁이었다면 6.25전쟁은 동족간의 전쟁 이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침략에 의해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다가 1945년 8월15일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과 연합군의 승리로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2년도 안된 1950년 6월. 대한민국은 모든 점에서 어렵고 부족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제 T-34탱크 242대 원조를 받고,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시도 하였습니다.

탱크 한 대 없던 남한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습니다.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남으로 남으로 침공하였고,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UN의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민주주의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16개국의 UN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50년 6월25일부터 휴전을 한 1953년7월27일 까지 3년1개월2일 동안 싸운 결과 한반도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2)캐나다군의 참전경위

1950년 6.25전쟁은 민주주의 자유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의 침략전쟁 이었습니다. 그 당시 캐나다는 한국에 대표부조차 두지 않았던 나라였으나 평소 자유를 사랑하고 세계평화를 추구하여 왔기에 북괴군의 침략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는 북괴군의 침략을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미국과 UN의 행동에 적극 동조 하였습니다.

1950년 6월30일 개회 중이던 제21차 하원회의에서 전 의원들이 한국전의 사태를 보고받고, UN결의에 따른 파병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정부의 조치도 적극 지원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뿐 아니라 의회에서도 한국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의회에서 Louis St. Laurent수상은 "캐나다가 UN의 결의를 이행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은 그 목적이 어떤 한 국가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UN의 통제와 권위 밑에서 평화회복을 위한 집단 안보활동의 일부를 캐나다가 담당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에 파병하는 의미를 분명히 했습니다.

 

(3)지상군(육군) 파병의 애로점

해군과 공군 참전문제를 비교적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캐나다 정부도 지상군의 파병문제를 결정하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극동에 주둔하는 지상병력도 없었으며, 1950년 6월말 정규 육군이 고작2만369명 뿐이었습니다. 보병부대는 형식상 3개 연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각 연대의 보유병력이 1개 대대에 불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병을 하자고 하니 Broke Claxton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수 차례 육군수뇌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번번히 결론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끌었습니다. 정부는 7월20일 미국 정부로부터 UN군에 파병할 1개 여단규모의 파병요청을 받고도 회답을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태도에 국내의 여러 신문은 그 무기력을 비난하고 UN의 헌장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8월7일 마침내 육군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이날 저녁 Laurent 수상은 전국 라디오 망을 통하여 이 결정을 발표 하였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UN군에 파병할 1개 보병여단을 창설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이에 필요한 요원을 전투경험이 있는 퇴역장병들 가운데서 선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캐나다 육군당국은 결정발표 다음날인 8월8일부터 한국행 "캐나다 육군 특별부대"라는 가칭 밑에 요원모집 에 착수하고 선발된 지원병들은 국내의 3개 기존부대에서 기초훈련을 분담 실시토록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1월 초순에는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식 모두 3개 대대가 편성 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열차 편으로 집결지인 미국의 Fort Lewis 기지로 출발 하였습니다. 11월21일 3개 대대가 모두 한곳에 집결하자 초대 여단장으로 임명된 J.M. Rockingham 준장의 지휘하에 극동 출발을 위한 제반 준비를 시작 하였으며 "캐나다 제25여단" 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4) 한국전 참전 첫 부대(PPCLI 연대 2대대)

캐나다 제25 여단의 준비과정에 많은 문제가 발생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전 상황의 급변 이었습니다. UN군의 인천상륙작전 뒤에 10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그처럼 캐나다군 급파를 요구하던 UN 당국이 평양함락은 물론 11월 하순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자 UN군 장병들은 다가오는 성탄절에는 다들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군 수뇌부들은 한국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 캐나다 정부는 계획된 여단 병력 중 우선 1개 대대만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잔여병력은 미국Fort Lewis 기지에서 계속 훈련하는 한편 한국전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캐나다 정부는 제 25여단의 3개 보병대대중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연대의 제2대대를 제1차 파병부대로 지정하고 11월5일 미국선박인 Private Joe P. Martinez호 편으로 시애틀항을 출발 하였습니다.

주력인 여단병력을 남겨놓은 채 출항하게 된 PPCLI 제2대대 장병들은 싸우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과 같은 가벼운 기분으로 극동행 선박에 올랐고, 23일간의 항행 끝에 1950년 12월18일 918명이 부산행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넘어올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습니다.

 

(5) 6.25 전쟁의 피해 현황 및 우리의 마음가짐

남북한을 통틀어 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습니다.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피해는 1)군인 전사상자, 실종자: 62만명, 2)민간인 사상, 부상, 실종자: 99만명, 3)유엔군 사상자: 15만명, 4)이산가족: 1천만명.

북한 피해는 1)북한군 사망, 실종자: 64만명, 2) 민간인 피해자: 150만명, 3)중공군 사망 및 실종자: 97만명, 4)북한 산업시설: 대부분 파괴.

캐나다군 피해는 1)사망: 516명, 2)부상: 1212명, 3)참전자: 2만6791명.

6.25전쟁은 세계 전쟁 역사상 유일하게 모든 대륙에서 군인을 파병하여 우리를 도와 주었습니다. 아시아(터키, 태국, 필리핀), 유럽(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브르크, 그리스), 아프리카(남아공, 이디오피아),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남아메리카(콜롬비아),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아마도 UN 16개국의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250만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어지는 자유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의 값으로 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희생하신 분들의 그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인도 다음으로 세계에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필리핀, 태국은 물론 북한보다도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IT산업, 대학진학률, 반도체, 핸드폰, 조선소 등이 세계1위의 나라가 되었고, 세계경제규모 10위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대한민국을 구하려다 생명을 바친 수많은 젊은이들과 참전용사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산 유엔묘지에 가면 UN참전국들의 많은 젊은이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 이제는 우리도 그분들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의 희생과 고마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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