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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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4)-임진왜란
samkang39

 

 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 700척의 병선과 13만 명의 왜병이 부산포 앞 바다에 나타났다. 부산포의 첨사 정발의 군대 8,000명은 왜군의 조총 앞에서 전멸을 당하였다. 일사천리로 북진을 한 왜군은 이일과 신립장군의 가벼운 저항을 받았으나 파죽지세로 쳐부수고 2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선조는 4월 그믐날, 비가 쏟아지는 밤중에 허겁지겁 몽진길에 올라야 했고, 도망을 치다시피 한 일행은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물에 빠진 쥐들 모양 덜덜 떨면서 기약 없는 피난길을 재촉하였다. 칠흑의 그믐날 밤에 임진강을 건너려는데 비가 너무 쏟아져서 불이 다 꺼짐에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때에 도승지 이항복이 생각이 나는 바가 있어서, 마침 강가에 지어 있는 이율곡의 정자 화석정에 올라가 기둥에 붙어 있는 봉서를 여니 “이 정자에 불을 지르라” 써 있는 것이었다. 그 화석정에 불을 지르니 천지가 대낮같이 환하였다. 그래서 그 불빛을 이용하여 어가가 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 정자는 이율곡이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기둥에 기름을 먹였던 지라 불이 잘 붙었다고 한다. 율곡의 그 선경지명에서 지어진 그 정자가 바로 그 유명한 ‘화석정’이다.


 쫓아 오는 왜적들에게 개성을 내어 주고 평양을 내어 주고, 영변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이르러 침통한 표정으로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관산 달을 바라 통곡하며/ 압록강 바람에 상심하는 도다/
 조신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또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겠는가.”

 


지나친 당쟁이 나라를 그르쳐서 국경선 의주까지 쫓겨 오게 된 그의 심정을 표현한 글이다. 나라가 망조가 드니 그제야 당파싸움을 한탄하는 임금의 그 처절한 심경이 들어있다. 하지만 워낙 맹한 성품의 임금인지라 한탄 이상 더 나아질 일은 없었다.


 조선의 육군은 그렇게 전멸을 당하였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을 도와 첫 번째 해전 옥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두 번째 해전인 사천전투에서 그는 철갑선 거북선을 투입하여 적선을 마구 쳐부수었다. 이어서 당포(통영부근), 당황포(고성부근)에서도 승리를 거두니 일본의 병선들은 거북선만 보면 기겁을 하여 도망을 쳤다. 이순신의 3차 대전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그리고 4차 대전은 부산해전이었는데 모조리 쳐부수니 왜선들은 혼비백산을 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우리 해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우리 해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한편 그 해 12월에 명나라의 이여송이 원군 4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평양성에서 왜군과 대접전을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 벽제관에 이르러 이여송 군대는 왜군에게 대패를 당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원군은 평양으로 퇴각하여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묵묵하였다. 왜군과 싸우기를 꺼려하면서 조선 조정에는 거만을 부리고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민족의 의분이 솟구쳐 의병들이 일어났다.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 승려 유정과 같은 사람들이다. 의병들의 치고 빠지는 싸움에 왜군은 몹시 괴로워하였다. 남쪽에서 왜적의 수로를 막는 이순신, 육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왜군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의병들, 그리고 평양성에서 대치하고 있는 명나라의 이여송 군대로 말미암아 왜군과 아군간의 전투는 서서히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왜군과 명군 사이에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성사를 이루지 못하고 결렬됨으로 풍신수길은 14만 대군으로 재차 침입을 시도하였다. 그것이 1597년, 선조 30년에 재침을 당한 소위 정유재란이다. 2018년인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의 일이다. 


이렇게 전쟁이 몇 년을 끌다 보니 우리 조선의 백성들은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고, 일본 놈들은 식량조달이 제대로 아니 되니 우리 백성들의 식량을 약탈하고 민폐를 끼쳐서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식량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여인들을 겁탈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왜놈들의 만행은 끝없이 계속 되었다. 


 이 때에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있었는데 전투 실적이 미진하여 충청병사로 좌천을 당하였다. 이순신의 벼슬이 높아지고 자기가 좌천을 당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고 있는 원균은 수하의 일부 군신들과 결탁하여 불타는 복수심으로 이순신을 모함하는 글을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자기가 해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자기의 전함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이순신이 도와주지를 아니하여 패전을 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이순신은 직위해제를 당하고 죽음을 겨우 모면하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케 하였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왜군과 다시금 일전을 하였지만 전멸을 당하고 그 자신도 적병에게 끌려가서 죽음을 당하였다. 승전의 쾌거를 올린 왜군들은 해전은 물론 전주와 진주성을 함락하고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조선 사람들의 귀와 코를 베고 손바닥에 구멍을 내어 오랏줄로 묶어서 끌고 다녔다. 집과 숲에 불을 지르기가 일쑤였고 여인네를 마음대로 강간하였다. 


 이렇게 조선의 수군이 패배하고 약탈을 당함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감옥살이 하고 있는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거의 전멸을 당하고 남은 배 열두 척을 가지고 그는 싸워야 했다. 명나라의 수군 진린의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명량대첩에 임하였다. 


1599년 11월 19일, 선조 31년, 풍신수길이 사망하였다. 왜군은 조선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한 것이 명량대첩의 싸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열 두 척 배 앞에서 왜군은 또 전멸을 당하였다. 400척의 왜병 선박은 거의 다 침몰하였고 불과 몇 십 척만이 살아 도망쳤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거의 모두를 전멸시켜 대승을 거두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자신은 적군의 유탄을 맞아 최후를 마쳐야 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렇게 끝이 났으나 설마 설마를 믿던 전쟁 후유증은 이후 수십 년간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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